新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국립고궁박물관

2020년 7월 29일 ~ 2020년 11월 1일

도자기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기능과 형식이 크게 달라지는 실용기이기 때문에 도자기를 통해 당대 사회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는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 초기까지, 격동하는 당시의 모습과 조선이 지향했던 사회를 관통해 보여줍니다. 개항 직후 조선은 서양식 건축물을 짓고 세계 각국의 도자기를 사용하여 근대국가임을 과시하는 상징적 장치이자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조선왕실에서 사용했던 서양식 도자기는 격변기 최전선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는 왕실의 노력을 오롯이 보여주는 증거인 셈입니다.

근대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꿈꿨던 고종의 소망은 빛이 바랬습니다. 하지만 서양식 도자기로 조선왕실이 나아가려던 방향과 변화의 물결을 겪어냈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본다면 치열했던 당시의 상황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기 조선의 생생한 이야기를 “新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에 담았습니다.

Ⅰ 조선 후기 왕실의 도자 소비 Ceramic Consumption of the Joseon Royal Court

조선왕실은 15세기 중반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도자기 제작지인 분원分院을 두고 의례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자기를 생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던 분원 도자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 도자기 등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 청淸(1636-1912)을 오가는 사행단과 일본 통신사, 무역 등을 통해 외국 도자기의 수입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18세기 왕실 가족 무덤에서도 외국에서 수입된 화장품 도자용기가 출토되어 왕실의 도자기 선택 범위가 확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Ⅱ 新신 왕실도자 수용 배경 Background of the Embrace of Imported Ceramics by the Royal Court

조선 정부는 선진 제도와 문물을 배우고자 일본과 중국, 미국에 해외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이들이 국외에서 습득한 근대 문물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1880년대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세계 각국의 산업품을 전시하는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근대 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 속에서 궁궐 안팎에는 서양식 공간들이 생겨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새로운 도자기가 궁궐 곳곳을 채우게 되었다.


Ⅲ 조선과 프랑스의 도자기 예물 
Ceramic Gifts Exchanged between Joseon and France

1886년(고종 23) 조선과 프랑스는 양국의 우호, 왕래, 통상에 관한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프랑스는 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1853-1922)의 파견과 동시에 수교기념 예물로 도자기를 선물하였다. 이 화병들은 프랑스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Manufacture National de Sèvres에서 생산한 것으로, 당시 세브르 도자기는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는 자국을 대표하는 도자기를 선물하여 프랑스가 문화강국이자 우호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 하였다. 이에 고종은 12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와 왕실 공예품 <반화盤花>를 보내 프랑스에 화답하였다. 이 도자기 예물은 근대전환기 새로운 외교 관계에 직면한 조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Ⅳ 서양식 연회와 양식기 Western-style Banquets and Tableware

19세기 후반, 조선 왕실은 서구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정치, 산업을 비롯 생활, 문화와 관련된 서양 문물과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고자 했고, 각국의 외교관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국제적 입지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 대화의 장이었던 연회宴會, party가 중요해졌으며 연회 장소와 가구, 식기를 마련하는 일은 필수적이 되었다. 이에 서양식 건물을 짓고 공간에 어울리는 가구와 도자기 등을 수입하였는데, 왕실에서 사용한 수입도자는 조선왕실이 근대전환기에 맞닥뜨렸던 고민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했던 결과물이다.

Ⅴ 궁중을 장식한 수입 화병 Imported Vases That Adorned the Royal Court

19세기 말, 조선이 서양식 건축을 짓고 세계적으로 유행한 대형 화병을 장식한 것은 근대적 취향과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높이 60-90cm의 수입 화병은 일본과 중국제품이다. 일본 화병은 1880-1910년대에 만들어진 수출용 산업 도자기이며, 만국박람회에 소개되어 서구에 일본 문화 선호현상인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일으켰다. 중국 화병은 유리질의 에나멜 안료로 장식된 법랑琺瑯 자기이다. 말레이시아 등지에 살던 중국계 이민자 ‘페라나칸’의 취향에 맞춰 제작한 이 자기는 봉황, 모란무늬 등을 분홍색과 옅은 녹색 위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고급 공예품으로 인식되었던 법랑자기는 조선 말기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 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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