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에 형상이 놓일 때 생겨나는 공간. 그 안을 헤매듯 붓을 움직이며 선을 그려나간다. 때때로 형상은 붓이 피해 가야 할 장애물이, 또는 추진력을 제공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이곳저곳에 분산된 형상들은 비가시적으로 연결되며 긴장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선은 형상 사이를 횡단하며 그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을 와해시킨다. 일시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흐트러지는 아름다움이 아쉬우면서도 그로부터 생겨날 새로운 동선을 떠올리게 된다.
선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동선은 화면을 특정한 형태로 구획하면서, 안팎으로 여러 모양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생겨난 영역 일부에 색을 채워 넣으면, 안과 밖의 관계를 통해 흥미로운 공간적 구조가 발생한다. 그 안에서 다시 돌아다닐 궁리를 해본다. 도형을 추가하거나, 종이 조각을 뿌려 그 흔적을 남기거나, 혹은 동선이 만들어낸 형상을 활용하여 돌아다닐 규칙을 설정한다. 그리고 돌아다닌다. 이리저리.
하나의 화면 속에서 재차 조건을 설정하며 여러 방식으로 맴도는 일은 꼭 무언가의 지도를 만드는 것 같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것을 상상하기 위해 여러 경험을 떠올려 본다. 유년 시절을 보낸 서귀포 소도시의 길. 중학생 때 처음 방문해 방향감각을 잃었던 강남역. 낯선 곳에서 일부러 지도를 보지 않고 헤맸던 날. 네비게이션이 알려준 경로를 외우고 스마트폰을 가방 안에 넣어버리던 시절. 외출할 때마다 익숙한 공간의 동선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모든 스위치를 점검하는 매일. 지친 상태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사이를 횡단하는 습관. 자전거를 타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새벽의 도로.
이러한 기억들이 나의 작업과 연결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캔버스 위에 그리고자 하는 것이 출발지와 목적지를 잇는 최단 거리가 아니라 그 사이를 방황하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여작가: 고근호
그래픽 디자인: A Studio A(이재환)
출처: 인터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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