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다

경기도미술관

2020년 4월 28일 ~ 2020년 11월 29일

인류가 그림을 그린 역사는 언어를 사용한 역사보다 오래되었다. 아주 오래 전 인류에서부터 현재의 우리들은 언어 이전에 그림으로 먼저 자신을 표현했다. 그 표현을 살펴보면 개인의 방식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물, 사람, 순간을 볼 때 사람들은 자신만의 렌즈를 가지고 대상을 관찰하고 인지하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표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특히 그려서 표현하는 그림은 대상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관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해 보아도 사진과 같이 그리기 위해서는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 시간을 통해 평소에는 지나칠 수 있는 많은 조각들을 발견하게 된다.

관찰의 시간을 통해 발견 된 것들로 구성되는 그림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는 것으로 수없이 많은 결정을 수반한다. 3차원의 대상을 어떠한 형태로든 양식화하고 해석한다. 수채화의 여러 겹, 판화의 잉크막, 초상화에 담긴 시간의 흐름이 작가의 관찰의 층이 모여진 결과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열심히 대상을 바라보아 담아 낸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더 잘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회화를 감상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완성된 평면이지만, 그것의 과정은 겹(裌)의 끊임없는 중첩이다. 그 과정은 작가의 노동과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평소에 잘 보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 사람, 순간을 새롭게 보게 한다. 작가의 행위와 노력과 시간의 결과가 그림이고, 그림을 감상할 때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들도 그런 시간과 노동의 아우라인 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리고자 하는 욕구는 우리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욕구를 잃어버리지만, 어떤 이들은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그리기 욕구를 잘 간직하고 끊임없이 발현시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의 작품이 《그림, 그리다》에 전시되었다.

작가들이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관찰한 대상들을 온전한 노동의 시간으로 담아 낸 그림을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마주하였으면 좋겠다. 여러 겹들이 어떻게 쌓여서 표현되었는지 감상하면서 더 풍요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이명미, 놀이-사물 그리기, 캔버스에 유채, 194x260cm, 1985, 대구미술관 소장

40년 넘는 세월동안 회화라는 장르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하며 실천하는 작가 이명미는 자신만의 감성과 직관에 따라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작품에서 보여 지는 자유로운 붓질,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를 통해 밝고 명랑한 힘찬 에너지를 감상자들에게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일상적 삶의 모든 요소가 회화적 언어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처럼 놀이-사물그리기(1085) 작품에서는 우산, 물병, 전화기 등 일상의 사물이 주인공이다. 작가 특유의 단순한 형태로 재탄생한 일상의 사물들이 작품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경쾌함을 선사한다.
우리는 일상의 물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희민, 백합과 그녀들의 상처받은 마음,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겔미디움, 100x100cm, 2020

디지털이미지를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로 구현하는 작가 정희민은 디지털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인간의 시각성과 이미지의 상투성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우리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이슈들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디지털이미지를 볼 때에는 시각이 촉각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감각을 어떻게 깨어나게 할 것인가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그림은 작가 스스로에게 이 세상과 접촉해 있는 것을 환기시키는 도구라고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휘발되는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박제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자극과 감각을 일깨우고 싶은 작가는 그래픽 툴로 작업한 이미지를 평면에 옮기고,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미디엄으로 표면에 요철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다. 화면 속에는 일상에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과일들이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던 과일에서 느껴지는 감각들과는 다른 것들이 느껴진다. 확대되거나 잘려진 대상들의 이미지 조각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끌어내도록 요구하는 것 같다.
작가가 보여주는 익숙하면서 낯선 정물들 앞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가?



정정엽, 최초의 만찬 2, 캔버스에 유채 50x 100cm, 2019, 경기도미술관 소장

우리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미술인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작품의 대상으로 그려내는 작가 정정엽은 늘 자신 주변의 것들을 그림에 담아낸다.
나혜석을 비롯해 시인 김혜순, 서지현 검사 등 작가의 삶에 영향을 준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그림으로 그려 낸 ‘최초의 만찬(2019)’ 시리즈들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최초의 만찬(2019)’에서는 만찬을 준비하던 여성들이 만찬에 초대받아 주인공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이 식탁을 차린 사람은 작가이고, 자신이 초대하고 싶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라고 한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껴보자.
내가 만찬을 준비한다면 어떤 이들을 초대할 수 있을까?



이동기,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마,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90x160cm, 2013

한국의 1세대 팝 아티스트, 아토 마우스로 유명한 이동기 작가는 미술은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작가의 회화작업은 예술과 대중문화의 결합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 요인에 의한 다양한 이중성을 다루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팝아트라는 양측의 상이한 특징을 모두 가진 장르의 대표주자가 된 것일 것이다.
2012년부터 시작 된 ‘소프 오페라’시리즈는 외국사람들이 한류사이트에 놀려놓은 드라마 캡쳐 사진들의 정형화 된 이미지에 흥미를 느껴 시작된 작업이다. 한국드라마의 상투적인 이미지들이 아크릴 회화로 재현된 것이다. 캔버스에는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만들어 진 현실에 매혹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문화를 반영한 이 작품들은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대중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동시대적인 인물의 시선이 느껴지는 이 작품들은 한국 대중문화에서 자주 보여 지는 이미지를 통해 지금을 읽게 해 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림 속 클로즈업 된 인물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그들과 이야기 나누어 보자.



정직성, 200916, 캔버스에 유채, 194x259cm, 2009, 경기도미술관 소장

풍경을 다루는 작가 정직성은 도시의 익숙한 풍경을 낯설음으로 다시 보게 해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정직성의 그림은 늘 지나다니지만 무심코 지나치는 공간을 주인공으로 화면에 그려낸다. 200916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만들어진 한국 도시의 특수한 풍경을 회화라는 형식으로 표현한 풍경화이다. 하나의 색조로 통일 된 풍경 속에 기본적인 도형들이 채워져 있는 화면은 마치 추상화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붉은 색 바탕에 연립주택의 형태들이 반복적으로 앉혀져있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그림 속 풍경들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 것일까?
나의 주변에서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풍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성훈, 돌던지기, 캔버스에 유채, 193.9×130.3cm, 2017, 경기도미술관 소장



빈우혁, 심연, 캔버스에 유채, 195x350cm, 2019. 경기도미술관 소장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것에 집중하는 작가 빈우혁의 그림은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다. 작가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숲을 찾아 산책하고, 끊임없이 사색한다고 한다. 풍경화를 그리지만 형이상학적 공간을 표현하는 작가에게 숲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심연’은 풍경이면의 어떠한 비판이나 의미를 담지 않고, 풍경에 오롯이 집중한 순수 추상작품으로 형태적으로 익숙한 이미지가 모두 배제되어 있다.
커다란 화면을 오랫동안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엄청난 에너지와 동시에 평안함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려진 그림에서 느껴지는 노동의 에너지와 그리는 행위에서 평안함을 느끼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진다.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 보면서 작가의 에너지와 마음을 느끼면서 작가가 바라 본 풍경을 상상해 보자.



하종현, 접합 8, 대마천에 유채로 배체기법, 220x360cm, 1983, 경기도미술관 소장

다양한 매체의 물성을 실험하는 작가 하종현은 1974년부터 2009년까지 ‘접합(conjunction)’ 연작을 그렸다. 캔버스 뒤편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내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추상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었다. 작가가 사용하는 캔버스는 거칠고 성긴 올로 짜여 진 마대로 만들어졌고, 여기에 진흙과 같은 느낌의 물감덩어리를 사용하여 뒤에서 앞으로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 천의 틈새로 물감이 올올이 배어나오는 독특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배어나온 물감으로 채워진 캔버스에 최소한의 붓질을 더함으로써 그림은 완성된다.
언제나 나만의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행위를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서 회화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고요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하종현의 작품은 작가의 끊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탐구정신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직접적인 에너지가 담겨 있다.
한올 한올 스며 나온 물감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작가의 행위가 빚어낸 에너지를 느껴보자.
배체기법 : 화폭 뒤에서 색을 칠하는 초상화의 기법



박경률, 미팅 플레이스, 캔버스에 오일, 종이에 오일, 포장된 회화, 세라믹, 나무봉, 스폰지, 마스킹 테이프, 오렌지, 스티로폼에 석고, 아크릴관, 공산품, 클레이, 나무프레임, 가변크기, 2018, 경기도미술관 소장

2차원의 그림을 3차원으로 확장하는 ‘조각적 회화’라는 자신만의 작업방식을 보여주는 작가 박경률의 작품은 전시장에서 보여지는 모습으로는 감상자들에게 설치작업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녀는 다양한 이미지 기호들을 꼴라쥬 하면서 만들어지는 내러티브를 통해 무의식의 영역을 시각화하는 그림을 그리는 회화작가이다. 이미지의 위치, 구성, 틀과 같이 그림을 이루는 외부적 요소만으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 요소들 각 각이 오브제이다. 2차원에 놓여 진 오브제들(캔버스에 올려 진 물감덩어리와 붓질들)과 3차원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오브제들(작가의 추상적 행위의 결과물)은 각각의 위치에서 관람객들에게 읽혀진다. 이러한 읽기 행위가 그림을 보는 행위이다. 그림을 보는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뜻을 지닌 ‘A Meeting Place’ 는 회화를 보는 구조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행위 자체가 중요한 특징이라 한다.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캔버스 앞에서 그리고 오브제를 만들며 했을 작가의 행위를 떠올려보자.



안지산, 손 담그기,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15

드로잉과 오랜 연습, 철저한 습작 과정을 통해 화면을 채우는 작가 안지산은 물감의 물성이 느껴질 만큼의 두툼한 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린다. 그에게 회화라는 매체는 다른 어느 매체보다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이다.
작가는 직접 모델이 되어 물감을 몸에 바르고 씻어내는 과정에서 물감이 몸에 닿는 촉감을 느끼고,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깨들은 것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신체에 물감을 칠하고, 닦고, 지우는 생소하면서도 순수한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예술창작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화가의 직접적 행위와 그것을 캔버스에 옮긴 그림 앞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콘크리에이트랩 CONCREATE LAB, 무한 그림, 프로젝터, 키넥트 센서, 컴퓨터, 맞춤소프트웨어, 트랙커, 가변설치, 2020

디지털기술을 통해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는 작가그룹 콘크리에이트랩은 전시장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하얀 도화지를 펼쳤다. 작가들이 만들어낸 공간으로 들어서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붓을 들고 새하얀 화면 위에 마음껏 선을 긋고 색을 칠해보자.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의 행위와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겹(layer)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날로그 매체인 그림을 디지털매체로 경험하게 하는 그들의 작업은 2차원의 그림이 그려지는 행위와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한다.
무한의 매직 캔버스에 내가 보았거나, 보고 있거나, 생각했던 것이나, 상상했던 것들을 표현해보자.


참여작가
이명미, 정희민, 정정엽, 이동기, 정직성, 공성훈, 빈우혁, 하종현, 박경률, 안지산, 콘크리에이트랩

협찬: 산돌구름, 삼화페인트
음악 자문 및 제공: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출처: 경기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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