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혜원 개인전 : 섬호광 Hyewon Keum : A Lodestar

아트스페이스풀

2018년 10월 25일 ~ 2018년 11월 25일

유물전유목遺物前游目[1]
신지이(아트 스페이스 풀 큐레이터)

가을이되니 담쟁이가 바스러져 가는 벽을 더 맹렬히 감춘다. 서까래에 뽀얗게 깔려있던 먼지가 아래쪽 움직임에 바짝 긴장하며 이리저리 동요한다. 흙발에 지저분해진 바닥에 빛이 길게 드리우자 비로소 원래의 모습, 집의 모습을 찾았고, 드디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며 작가는 복잡해했다.

누군가의 가족사나 자전소설을 읽을 때 예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러 대에 걸친 가계도에서 당시 사회상을 엿보고, 삶의 이면과 성찰을 읽어내며, 종국에 그네들 인생의 기승전결이 어떻게 도래하는지 확인하길 기대한다. 금혜원이 펼쳐놓은 삼대의 이야기는 그런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지만 예견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모계의 서사가 전쟁과 근현대사를 아우르며 단단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이야기는 선형적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작가는 인간관계를 세심히 다루면서도 사건을 마무리 짓는 데에는 짐짓 무심하다. 그리고 때때로 이야기가 심연에 빠져버리는데, 그것은 극 속에 작자 자신을 적극적으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오래된 테이블에 책이 세 권 놓여있다. 그들은 제각기 자전적 글쓰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처음은 곧장 질러가고, 다음은 굴절하며, 마지막은 아주 커다란 원을 그린다. 첫 번째‘야행’은 작가의 외할머니가 작고하기 전 삶을 회고하며 쓴 6권의 노트에서 시작됐다. 금혜원은 조밀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손글씨 기록들에 역사적 증언들과 시대의 전형성을 보태고 자신의 상념을 틈입시켜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자전적 소설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책의 화자는 돌연 어린아이가 되어있다. 겨우 찾아온 평화를 누릴 새 없이 피난민들로 가득 차버린 부산 집에서, 제 공간을 마련하겠다고 층계참으로 숨어드는 아이는 작가의 어머니이다. 마지막 진술은 한 바퀴를 크게 돌아, 말하기로 결심한 작가의 몫이다. 단어와 물건을 세심하게 솎아내고, 기억을 되새김질하니 운문과 산문 사이의 글이 몇 편 나왔다. 아주 소소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밥을 지었고,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내 자리를 요구했던.

벽에 걸려있는 옛 사진들은 1940년부터 1970년 무렵까지 찍힌 것들이다. 부엌, 피아노가 있는 방, 집 앞, 동물원 등 특별할 것 없는 장소들로, 보다 정확히는 그 공간들을 하나의 정물처럼 바닥에 놓고 재차 찍은 사진들이다. 작년 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 전시의‘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사진들을 보았던 이라면 인물들이 빼곡한 사진들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어떤 사연으로, 어디에서 연루되었는지 소상히 적은 메모도 함께 있었다. 아트 스페이스 풀에는‘가족사진’이라 이름 붙은‘풍경사진’들이 걸려있다. 회색조의 빛바랜 사진은 익숙한 듯 하면서도 이질적인데, 그것은 아마 사진에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카메라가 상용화되기 이전이라 정보와 상징이라는 목적 없이 재미삼아 풍경을 찍기 어려웠을 것이라 짐작해보면 ‘풍경사진’이란 대단히 기묘한 장면인 것이다. 전시는 두 개의 큰 축으로 나뉘어 있다. 한 축은 기억을 바탕으로 시간을 조밀하게‘채워’가는 글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 서사에서 기억을‘비워’냄으로써 시간을 길게 늘어트리는 사진이다. 금혜원의<가족사진 시리즈>는 인물을 모두 지우고 빈 곳의 배경을 조심스럽게 복원해낸 조작된 사진이다. 누군가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너무나 온당한 사실이 삭제되자 마치 앞선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현존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아니, 그러면서도 실은‘모든 기억’에 존재한다고 역설해 버린다. 누구의 집, 누구의 부엌, 누군가와의 추억에서 특정한‘누구’를 지우니 보는 이로 하여금 개개인의 어떤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해 졌다. 주체의 자리에 불특정 타인의 임의의 기억들이 스며들 틈이 생긴 것이다. 이는‘나’, 개인이라는 작은 테두리로 이야기가 환원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수평적이며 비선형적으로 확장된 하나의 세계로 가족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는 아주 농밀한 가족의 서사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인물들이 희석되어 가더니 급기야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 전시장 곳곳에40년은 족히 되는 가구들과 물품들이 자리해 있다.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물건들에도 말과 기억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세상에는 책도 그림도 영화도, 재현이라 불리는 그 무엇도 필요 없을지 모르겠다. 그저 귀 기울이면 온갖 풍요로운 미시사에 세상은 터져버릴 테니까. 경험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가는 그것을 전시장에 놓아두는 한편, 곳곳에‘목소리’로도 숨겨 두었다. 처음 할머니의 삶을 구전으로 들었을 그때의, 고목의 기억에 공명하는 아이처럼.

지난2년간 작가는 지난한 리서치의 과정을 보냈다. 강박에 가까운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이야기는 사건과 사고(思考)들의 연쇄로 가파르게70여 년의 세월을 훑는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간에, 감동을 주거나, 고통을 주기에 이야기에 매료되어 듣고 읽는다. 그러나 이야기를‘쓰는’ 것은 단순히 매료나 사랑으로 설명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이 가족과 자신의 내밀한 부분의 발설이 전제된다면 더더욱.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자신의 자서전 『성년(L’Age d’homme)』의 서문에서글쓰기를 투우에 빗대어 말한다. “(황소의) 뿔이 내포하는 구체적인 위협 때문에 투우사의 기교에 유일하게 인간적인 현실을 부여하며, [...]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탁월해질 수 있는 기회를 끌어내는 투우사, 가장 위험한 순간에 자기 스타일의 장점을 모두 보여주는 투우사”가 그가 감탄하고 되고 싶은 것이라 말한다. 물론 금혜원의 이야기가 황소의 뿔처럼 어떤 구체적인 위해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레리스가 짚어내 듯) 책을 낸다는 건,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한 행위라는 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방식이 전과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앞서 금혜원의 이야기를 두고 소소하다 표현하였지만, 결코 이야기가 소박하다거나 평범해서 썼던 말은 아니다. 그들을 둘러싼 풍파와 격정들이 예삿일로 여겨질 만큼 너무나 나의, 우리의 여인들에 대한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선택과 그로 인한 성장의 근거를 가족으로부터 추적해 들어가는 많은 서사들에서 유독 모계에서 당위를 찾거나,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발화된 매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1]장파(張法)는 그의 저서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에서 ‘보기’라는 대상 인식의 방식으로 눈 돌리기(유목游目)와 초점(焦點)맞추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 돌리기에는 사람과 시각의 ‘움직임’이 포함된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면서”, “면면을 살피기”를 통해 우주를 획득하고 우주를 획득함으로써 자아를 획득하고자 하는것이 동양이 방식이다. 반면 초점 맞추기는 고정된 위치에서 고정되어 있는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서양의 방식이다. 이는 사물을 감상하는 최적의 시점을 찾는 적합성의 과정이지만 어떤 사물은 절대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는 ‘허무’를 포함한다고 기술한다.

기획: 신지이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공간디자인: 김형준
후원: 서울문화재단

출처: 아트스페이스풀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금혜원

현재 진행중인 전시

최진욱 개인전: 창신동의 달

2024년 3월 14일 ~ 2024년 4월 13일

오희원 개인전: Gleamy Languor

2024년 3월 5일 ~ 2024년 4월 16일

몸-짓하다

2024년 3월 19일 ~ 2024년 5월 19일

DMA 소장품 하이라이트 2024

2024년 3월 5일 ~ 2024년 10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