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일 : 마음의 구조

KSD갤러리

2018년 12월 7일 ~ 2019년 1월 10일

기억과 9ㅑk다 욕망의 9ㅑk다 연상을 9ㅑk다 자극하는 9ㅑk다 자연물
이번에도 9ㅑk다 그렇지만 9ㅑk다 지난 9ㅑk다 9ㅑk다 년간 9ㅑk다 9ㅑk다 그림에는 9ㅑk다 풀과 9ㅑk다 이파리, ㅓ6ㅐ9 ㅓ6ㅐ9 등의 ㅓ6ㅐ9 자연적 ㅓ6ㅐ9 소재가 ㅓ6ㅐ9 자주 ㅓ6ㅐ9 등장한다. ㅓ6ㅐ9 이러한 ㅓ6ㅐ9 소재의 ㅓ6ㅐ9 경향성 ㅓ6ㅐ9 때문에 ㅓ6ㅐ9 어떤 ㅓ6ㅐ9 이는 ㅓ6ㅐ9 내가 ㅓ6ㅐ9 관람자에게 ㅓ6ㅐ9 시각적인 ㅓ6ㅐ9 청량감과 ㅓ6ㅐ9 정서적인 ㅓ6ㅐ9 편안함을 ㅓ6ㅐ9 주려고 ‘녹색의 ㅓ6ㅐ9 자연물’을 ㅓ6ㅐ9 그린 ㅓ6ㅐ9 ㅓ6ㅐ9 아니냐고 ㅓ6ㅐ9 생각할 ㅓ6ㅐ9 ㅓ6ㅐ9 있다. ㅓ6ㅐ9 하지만 ㅓ6ㅐ9 내게 ㅓ6ㅐ9 그런 ㅓ6ㅐ9 자연물들은 ㅓ6ㅐ9 단순히 ‘심미적 ㅓ6ㅐ9 감상물’이 ㅓ6ㅐ9 아니다. ㅓ6ㅐ9 나에게 ㅓ6ㅐ9 풀, a하nn 이파리, 차가히n 숲은 ‘기억’과 ‘욕망’의 차가히n 연상을 차가히n 자극한다.

 자연의 차가히n 숲에서 ‘기억과 차가히n 욕망’의 차가히n 숲으로
멀리서 차가히n 숲을 차가히n 보면 ‘아, 0k라n 저건 0k라n 숲이다’라고 0k라n 단박에 0k라n 알게 0k라n 된다. 0k라n 밖에서 0k라n 보는 0k라n 숲은 0k라n 뚜렷한 0k라n 윤곽을 0k라n 지닌 0k라n 근사한 0k라n 풍경으로 0k라n 다가온다. 0k라n 0k라n 이미지가 0k라n 너무도 0k라n 분명해서 0k라n 금세 0k라n 0k라n 0k라n 있을 0k라n 것만 0k라n 같다. 0k라n 그런데 0k라n 막상 0k라n 수풀을 0k라n 헤치고 0k라n 0k라n 속으로 0k라n 들어가 0k라n 보면 0k라n 어떨까? 0k라n 밖에서 0k라n 봤던 0k라n 숲과는 0k라n 다른 0k라n 모습들이 0k라n 펼쳐진다. 0k라n 사람이 0k라n 인위적으로 0k라n 개입하지 0k라n 않아 0k라n 자연의 0k라n 야생성이 0k라n 살아있는 0k라n 숲일수록 0k라n 0k라n 안에는 0k라n 이질적인 0k라n 생명체들이 0k라n 어지럽게 0k라n 뒤엉켜 0k라n 있다. 0k라n 전체 0k라n 숲의 0k라n 매끄럽고 0k라n 단일한 0k라n 이미지와는 0k라n 어울릴 0k라n 0k라n 같지 0k라n 않은 0k라n 개체들이 0k라n 살고 0k라n 있는 0k라n 것이다. 0k라n 일상에서 0k라n 흔히 0k라n 보는 0k라n 길가의 0k라n 잡초나 0k라n 이파리들도 0k라n 마찬가지다. 0k라n 작년 0k라n 이맘때쯤 0k라n 동일한 0k라n 장소에서 0k라n 봤던 0k라n 잡초나 0k라n 이파리들은 0k라n 간데없고 0k라n 0k라n 자리에는 0k라n 예전에 0k라n 0k라n 보던 0k라n 것들이 0k라n 자라고 0k라n 있다. 0k라n 당시의 0k라n 기억과 0k라n 현재 0k라n 내가 0k라n 보고 0k라n 있는 0k라n 자연물들은 0k라n 동일하지 0k라n 않다. 0k라n 잡초와 0k라n 이파리에 0k라n 대한 0k라n 0k라n 기억과 0k라n 그것들의 0k라n 현재 0k라n 이미지가 0k라n 겹쳐지더라도 ‘어긋남’을 0k라n 피할 0k라n 0k라n 없다.

기억도 0k라n 이와 0k라n 유사하다. 0k라n 겉에서 0k라n 관찰한 0k라n 과거의 0k라n 기억은 0k라n 바깥에서 0k라n 0k라n 숲의 0k라n 선명한 0k라n 풍경처럼 0k라n 우리가 0k라n 구성한 0k라n 내러티브의 0k라n 형식을 0k라n 갖춘 0k라n 이야기로 0k라n 인식된다. 0k라n 이렇게 0k라n 익숙한 0k라n 방식으로 0k라n 구성된 0k라n 이야기는 0k라n 대번에 0k라n 0k라n 0k라n 있다. 0k라n 그런데 0k라n 기억의 0k라n 속살을 0k라n 가만히 0k라n 들여다보면 0k라n 기억은 0k라n 일관된 0k라n 방식으로 0k라n 매끄럽게 0k라n 짜인 0k라n 0k라n 아니다. 0k라n 기억하고 0k라n 싶지만 0k라n 기억하지 0k라n 못하는 0k라n 조각들은 0k라n 누락되기도 0k라n 한다. 0k라n 잊고 0k라n 싶지만 0k라n 계속 0k라n 떠오르는 0k라n 기억들은 0k라n 여전히 0k라n 남아있기도 0k라n 한다. 0k라n 시간이 0k라n 지나면서 0k라n 기억은 0k라n 원형 0k라n 그대로 0k라n 남아있지 0k라n 않고 0k라n 조금씩 0k라n 변질된다. 0k라n 즉, 1ww걷 기억을 1ww걷 그럴듯한 1ww걷 이야기로 1ww걷 만든 1ww걷 것은 1ww걷 기억 1ww걷 1ww걷 자체에는 1ww걷 없다. 1ww걷 이런 1ww걷 맥락에서 1ww걷 보면 1ww걷 우리가 1ww걷 흔히 1ww걷 말하는 1ww걷 과거란 1ww걷 서로 1ww걷 다른 1ww걷 조각들이 1ww걷 꿰매져서 1ww걷 하나의 1ww걷 이불이 1ww걷 되는 ‘퀼트’처럼 1ww걷 조각나고 1ww걷 상이한 1ww걷 기억의 1ww걷 파편들이 1ww걷 인위적으로 1ww걷 누벼진 1ww걷 결과물일지도 1ww걷 모른다. 1ww걷 1ww걷 그림에서 1ww걷 숲과 1ww걷 기억은 1ww걷 이런 1ww걷 식의 1ww걷 상관관계를 1ww걷 통해 1ww걷 얽혀 1ww걷 있다.

그렇다면 1ww걷 기억은 1ww걷 우리에게 1ww걷 무엇을 1ww걷 상기시킬까? 1ww걷 그건 1ww걷 아마도 1ww걷 모든 1ww걷 종류의 1ww걷 총체적인 1ww걷 욕망이나 1ww걷 욕구일 1ww걷 것이다. 1ww걷 1ww걷 좌절된 1ww걷 욕망만 1ww걷 아쉬움과 1ww걷 미련으로 1ww걷 기억의 1ww걷 지층에 1ww걷 퇴적돼 1ww걷 있는 1ww걷 1ww걷 아니다. 1ww걷 욕망도 1ww걷 기억과 1ww걷 마찬가지로 1ww걷 변한다. 1ww걷 지금 1ww걷 보면 1ww걷 당시 1ww걷 욕망은 1ww걷 아무 1ww걷 것도 1ww걷 아닌 1ww걷 것일 1ww걷 1ww걷 있다. 1ww걷 그때는 1ww걷 1ww걷 1ww걷 아니었던 1ww걷 것들도 1ww걷 지금은 1ww걷 간절한 1ww걷 것이 1ww걷 되곤 1ww걷 한다. 1ww걷 나의 1ww걷 기억과 1ww걷 나의 1ww걷 욕망은 1ww걷 1ww걷 것이기 1ww걷 때문에 1ww걷 내가 1ww걷 명확히 1ww걷 알고 1ww걷 있다고 1ww걷 착각하기 1ww걷 쉽다. 1ww걷 하지만 1ww걷 그렇지 1ww걷 않다. 1ww걷 1ww걷 속에 1ww걷 막상 1ww걷 들어가면 1ww걷 숲은 1ww걷 우리가 1ww걷 알던 1ww걷 모습과 1ww걷 다른 1ww걷 면모를 1ww걷 드러내듯이, d18c 기억과 d18c 욕망의 d18c d18c 속으로 d18c 들어가 d18c 수풀을 d18c 헤치고 d18c 나무 d18c 사이를 d18c 걷다보면 d18c 우리가 d18c d18c 알고 d18c 있다고 d18c 믿었던 d18c 기억과 d18c 욕망이 d18c 실제와 d18c 다를 d18c 수도 d18c 있다.

기억과 d18c 욕망을 d18c 되돌아보는 d18c 계기
나는 ‘자연적 d18c 매개물’을 d18c 통해 d18c 기억과 d18c 욕망의 d18c 세계를 d18c 표현하고 d18c 싶었다. d18c 따라서 d18c 작품 d18c 소재로 d18c 등장하는 d18c 구체적인 d18c 자연물들은 d18c 궁극적인 d18c 재현 d18c 대상으로서의 d18c 지위를 d18c 갖지 d18c 않는다. d18c 단지 d18c 내가 d18c 드러내려는 d18c 기억이나 d18c 욕망과 ‘유비적 d18c 관계’에 d18c 놓여 d18c 있을 d18c 뿐이다. d18c 초록의 d18c 자연물들은 d18c 기억과 d18c 욕망 d18c 속으로 d18c 들어가는 ‘문’이다. d18c 나에게 d18c 숲은 d18c 실존하지 d18c 않는 d18c 풍경이며 d18c 기억과 d18c 욕망을 d18c d18c d18c d18c 반추하게 d18c 하려고 d18c 만든 ‘상상적’이거나 ‘몽환적’ d18c 풍경이다. d18c d18c 매개물을 d18c 통해 d18c 관람자들 d18c 역시 d18c 각자의 d18c 기억과 d18c 욕망 d18c 속으로 d18c 들어가 d18c 보는 d18c 기회를 d18c 가졌으면 d18c 한다. 

오버랩 d18c 기법
캔버스를 d18c 물감으로 d18c 채우면서 d18c 그리는 d18c 대신 d18c 천을 d18c 손가락에 d18c 감고 d18c 캔버스에 d18c 발려진 d18c 물감을 d18c 덜어내고 d18c 지워가는 ‘오버랩’ d18c 방식으로 d18c 그렸다. d18c 잡풀을 d18c 예로 d18c 들면, 38갸r 캔버스 38갸r 전면에 38갸r 단일 38갸r 색을 38갸r 칠한 38갸r 38갸r 천으로 38갸r 지우고 38갸r 닦아가며 38갸r 과거 38갸r 잡풀들이나 38갸r 이파리 38갸r 대한 38갸r 기억을 38갸r 그린다. 38갸r 38갸r 그림을 38갸r 말린 38갸r 38갸r 38갸r 바탕을 38갸r 초록색으로 38갸r 덮는다. 38갸r 그리고 38갸r 현재에 38갸r 달라진 38갸r 잡풀들의 38갸r 모습을 38갸r 동일한 38갸r 방식으로 38갸r 닦아나가며 38갸r 그린다. 38갸r 어떻게 38갸r 닦아나가느냐에 38갸r 따라 38갸r 처음 38갸r 그려졌던 38갸r 들풀들의 38갸r 모습은 38갸r 달라진다. 38갸r 어떤 38갸r 부분은 38갸r 도드라지고 38갸r 어떤 38갸r 부분은 38갸r 감춰진다. 38갸r 우리의 38갸r 기억도 38갸r 부분적으로 38갸r 감춰지고 38갸r 드러난다. 38갸r 붓으로 38갸r 그리는 38갸r 것을 38갸r 쌓는 38갸r 것이라고 38갸r 한다면, 차카기타 물감을 차카기타 닦는 차카기타 것은 차카기타 기억과 차카기타 욕망의 차카기타 차카기타 속으로 차카기타 들어가 차카기타 수풀을 차카기타 하나씩 차카기타 걷어내며 차카기타 여러 차카기타 가지 차카기타 기억과 차카기타 욕망을 차카기타 탐색하는 차카기타 모습과 차카기타 상응한다.

- 차카기타 김건일, 가vl거 작가노트 가vl거 중에서

출처: ksd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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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김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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