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리 : 어쩔 수 없는 염장

가창창작스튜디오

2015년 7월 24일 ~ 2015년 8월 5일



금기와 아마추어리즘

김아리 작가의 영상 작업에는 언제나 아마추어리즘의 혐의가 드리워질 수밖에 없다. 가정용 캠코더 혹은 저가형 DSLR를 이용해 즉흥적으로 촬영된 듯한 영상은 시각적 충격을 앞세우는 오늘날의 미디어아트 예술들에 부족한 면이 있으며, 작품의 플롯은 영화라고 보기에는 어설프고 이미지적 조형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영화적이다. 무엇보다도 이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의미식 역시 지나치리만큼 단순하고 교훈적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업은 무엇인가 애매하다.


작가의 작업은 회화 작업과 이후의 영상 작업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성장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억압적인 어머니와 자폐적인 동생의 기억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가령 <욕실에서의 독서>(2012)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작가의 눈앞으로 어머니의 얼굴이 기린의 목처럼 뻗어 나와 노려본다. 이때 어머니의 얼굴이 찢고나온 화폭을 들고 있는 손은 반대쪽 욕조 구석에서 몸을 누이고 있는 작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숲>(2014)은 새의 형상을 한 몸뚱이 위로 어머니 혹은 작가의 얼굴, 또는 그 결합된 형태가 솟아 나오고 있다. 이 얼굴은 감상자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다. 이토록 직설적인 화법. 개인적인 가족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불안은 분명 젊은 예술가가 가장 손쉽게 창작의 영감을 얻어낼 수 있는 산실이지만 창의적인 가능성을 차단하고 벗어날 수 없는 늪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결정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작가의 관심은 영상 작업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기호'를 소재로 한 연작 시리즈는 난해하다기보다는 당혹스럽다. <기호, 늑대인간이 되다>(2012)에서 군 휴가를 나온 기호는 제대로 된 설명이나 맥락조차 없이 늑대인간으로 변신한다. <기호, 어니스트 되다>(2012)는 간신히 취업에 성공한 기호가 불법 다단계 기업임을 깨닫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점쟁이를 마주친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제대로 된 결론도 없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개연성 없이 종결지어버리기도 하며, 감정이 충분히 축적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는 신파적 교훈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아가기도 한다.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을 맡고 있는 기호는 연기에 대한 자의식이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이 작업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터넷 사회에 유행하는 이른바 '병맛' 개그의 UCC 영상 버전을 예술이라고 선언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야말로 아마추어적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아마추어적 요소들이 과연 얼마나 구체적인 의도를 갖고 배치되어 있는지 여부이다. 우스운 말인 줄은 알지만 이것이 기준이 된다. <기호, 저승가다>(2013)는 제목 그대로 저승을 방문한 기호가 지옥의 문지기 마님과의 만남을 통해 현실에서 고통을 안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기호가 현대인으로, 괴물이 고통으로, 마님이 프로프적인 후원자로 치환되는 이 노골적이다 못해 순진하기까지 한 상징성. 그러나 이와 같은 구성을 조소하기 전에, 이 작품에서 컴퓨터 그래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특수효과는 '꿈속의 나비'가 갖는 미숙하고 유치한 감성에 젖어들 여지를 애초부터 차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스프링클러를 통해 뿌려대는 것이 분명한 어설픈 빗줄기는 "추웠지?"라고 말하며 괴물 즉 자신의 고통을 끌어안는 기호의 신파적인 감성을 고의적으로 상쇄시킨다. 이조차도 부족했는지, 기호가 고통을 끌어안는 장면은 줄넘기를 하고 있는 기호의 이미지로 느닷없이 연결되며 일말의 감정적 이해마저 차단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당혹감을 증폭시킨다. 작가는 기호가 "흑흑"이라고 쓰여진 지문에서 실제 흐느끼는 시늉을 하는 대신 이를 문자 그대로 또박또박 발음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연출한다.


이는 물론 의도된 유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체적 특징이나 말장난을 이용한 유머와도 다르며 훈련된 감식안을 통해 음미할 수 있는 아이러니나 아날로지는 더더욱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더욱 어설프고 우스워 보이는 방향으로 스스로 몰아감으로써 관람객들에게 다가간다. 일종의 광대적 기질이다. 작가는 기호 시리즈를 기꺼이 웃음거리로 전락시키고자 한다. 프로프적인 의미에서 후원자(doner)는 신, 요정, 자연물 따위의 형태로 등장하여 주인공을 시험하고 도움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며, 이를 위해 작품 내적으로 신성화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기호, 어니스트 되다>의 점쟁이는 아이폰을 이용해 본인 손으로 얼굴에 푸르스름한 조명을 비추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예술품을 구성하는 기계장치를 노출하는 데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아니, 이를 보고 웃어달라고 요구한다. 작가는 아마추어적 장치라고 여겨지는 예술적 금기를 거리낌 없이 사용함으로써 기꺼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놓는다.


김아리 작가의 신작은 내용적으로 고무대야에 앉은 기호에게 소금을 뿌리는 것이 전부이다. 이번에는 영화적인 내러티브조차 사라지면서 사실상 퍼포먼스 작업에 가까워졌다. 본래 퍼포먼스는 그 시간과 현장의 진실성이 담보될 때에 의미가 있다. 디지털 매체로 옮겨질 때 그 가치는 폭락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성기게 편집되어 있는 이 작품은 애초부터 그 퍼포먼스의 순수성을 보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대신 카메라의 그림자가 드러나거나 반대편 촬영자나 연출자의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통해 노출된다. 촬영 보조자들에게 소금을 어떻게 뿌리도록 지시하는 연출자의 목소리까지 녹음된 현장 사운드는 오히려 퍼포먼스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를 작가 스스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치 공간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없었던 단채널 영상의 이전 기호 시리즈와도 달리, 이번 작품은 벽면의 한 모서리 양쪽으로 쏘아지는 형태이다. 관람객을 위한 의자는 어느 한 스크린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놓여 있어 우리의 관습적인 위치를 파괴하도록 만든다. 이는 마치 펼치면 입체 조형물이 튀어나오는 엽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종이 대신 펼쳐진 것은 영상이며, 튀어나오는 것은 조그마한 고무대야이다. 이러한 본말전도 현상 역시 짓궂은 장난이다. 관객의 시선은 영상작업의 소품으로 활용된 초라한 고무대야에 고정시키도록 만들고, 사실상 본 작업이어야 할 듯한 2채널 영상들은 그 주위로 마치 시선을 분산시키는 장애물처럼 기능한다.


오늘날 예술가들의 딜레마는 금기의 파괴를 의식적으로 추구하게 되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파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수준'을 판가름하기 위한 금기들은 여전히 존재할뿐더러 이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화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가는 우리가 가장 아마추어적이라고 말하는 노선을 돌파한다. 반항적인 기질은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지만 이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다소 엉뚱하고 이질적이다. 이와 같은 시도가 성공적일지는 이제 막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현재 단계에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야말로 어설픈 수준의 반발에서 머물러버리게 될 공산도 높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술'은 적어도 이전에 본 적이 없는 형태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작가의 과제는 자신의 작업들이 지닌 가치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이 아마추어리즘의 혐의는 당분간 쉽게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출처 -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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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김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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