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허앵 개인전 : mama do

킵인터치 서울

2020년 1월 11일 ~ 2020년 2월 2일

농담으로 증언하고 몸부림치며 살아내기.
윤민화

아이를 기르는 일. 이것을 우리는 육아라고 말한다. 이성애 규범이 특권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출산과 육아는 장려해야만 하는 생산성을 위한 수단이다. 출산이 곧 애국이 되는 이곳은 아이라는 기표를 통해 밝고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려고 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 미래의 노동력, 국가를 위해 헌신할 새로운 세대이자 인간이라는 종(種)을 위한 재생산으로서 아이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에 입각한 규범과 정책들은 아이를 배태하고 생산할 생물학적 여성을 포궁1)으로 치환한다. 따라서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구간의 고난과 고통은 발설하면 안 되는 금기가 된다.

여학생은 ‘가정’을, 남학생을 ‘기술’ 교과를 배우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정보는 누락된 채 바느질과 요리와 같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엄마의 역할에 커리큘럼이 맞춰져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미디어는 여전히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해서는 대중의 눈을 흐리게 하느라 급급하다. 산모의 산후관리는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성 연예인이 ‘꿀정보’라며 전달하는 고가의 마사지 용품으로 소비되고, 영아기와 유아기에 해당하는 아이를 고작 주말 동안 돌보는 아빠는 슈퍼맨이 되어 돌아온다. 어린 시절에 엄마들이 즐겨 읽던 『여성동아』, 『여성중앙』은 ‘주부’라는 정체성을 가공하고 또 가공한 나머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주부라는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선망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었다. 주부라는 카테고리에 부록처럼 딸려 오는 육아, 요리, 남편 내조와 같은 일상은 너무 세련되고 몹시 정갈하여서 잡지 속의 비현실적 행복을 욕망하면서도 혐오하게 만들었다.

시대가 바뀌어 예전에 잡지가 노출시킨 가정성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소셜 미디어가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소비되는 비정상적으로 가공된 아이들의 이미지가 그렇다. #육아스타그램 으로 검색하면, 셀프 카메라 어플을 사용해서 필터를 입힌 아이들의 사진이 잔뜩 나온다. 기이하리만큼 눈이 크고 턱이 뾰족한 서구적 이목구비를 가진 신생아 사진 밑에 댓글이 달린다. “너무 예뻐요. 실례지만 아기 옷 어디에서 구입하셨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로 가공된 아이의 이미지는 선망을 부추기는 기표가 되어 아이의 엄마는 ‘좋아요’의 횟수만큼 행복해진다.

김허앵의 ‘엄마하기’가 재생산적 미래주의가 주창하는 낙관주의를 정확히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에게 ‘미래’나 ‘희망’, ‘인류’같은 소리는 ‘자아 실현’이나 ‘행복’, ‘긍정’과 마찬가지로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에 불과하다. 아이를 길러내는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다 걸어야만 하는 상황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지난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 일 테니 말이다. 사회 구조적, 제도적, 규범적으로 충실히 언어화되기에 부대낌 없던 결혼 전의 삶과 임신으로부터 비롯된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삶 사이의 불균형을 직면하게 되는 일은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맞먹는 파급을 동원한다. 바바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가 긍정성에 관해 지적했듯이, 이 사회가 엄마에게 떠넘기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옷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맞지 않는다면 부정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러한 부정성의 효과에는 광기, 정신병, 우울 그리고 살인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일러둬야 하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미치거나, 죽거나, 죽였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쓴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에는 우울증에 걸린 여성이 등장한다. 의사인 남편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방에 감금되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벽지에 집착하게 된다. 벽지의 기이한 문양 뒤에 여성들이 갇혀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벽지를 찢고 네 발로 기어 다닌다. 이를 보고 충격 받아 쓰러진 남편 위를 기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빠져나왔어요.”

실제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산후 우울증을 앓게 된 경험을 기반으로 집필한 것이다. 작가는 산후우울증에 대한 처방으로 ‘휴식 치료’를 강요받게 되는데, 지적인 활동은 두 시간 이내로 제한하며 강제로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대한 처방이 휴식을 빙자한 감금이라는 점은 퍽 아이러니하다. 굳이 처방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육아는 고립, 감금, 정신적 마비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르누아르 풍의 그림에서 한껏 차려입은 엄마와 요람에 누운 아이가 햇빛이 충만하고 녹음이 무성한 풀밭 위에서 소풍을 즐기는 풍경은 부르주아적 가정생활의 선망을 자극하는 여성 잡지 만큼이나 유해하다. 이런 그림들이 유통되면 될수록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집 밖에 나가는 자유를 빼앗긴다는 점은 은닉된다. 82년생 김지영은 어떤가. 김지영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 커리어를 포기하면서 미쳤다. 사실 현실의 육아를 직면할 때 여성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관객에게 연민을 조장하느라 헛소리를 하는 정도로 곱게 미친 김지영이 아니라 벽지를 뜯으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쪽에 더 가깝다.

김허앵의 《mama do》는 시종일관 엉뚱한 유머 감각과 해학으로 육아 일상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본능적이고 광적이라는 점에서 에런라이크적 긍정성과 부정성이 마찰하면서 발생하는 징후를 발견하게 된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머리통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다>에서 머리통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양만 봐도 그렇다. 목 늘어난 셔츠와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이 퍽 안쓰럽게만 느껴지지 않는건 자학을 농담조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기2) 속에 갇혀서 끝없이 아이가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치우는 <Daily routine>이『누런 벽지』과 다를게 뭔가. 처진 뱃살을 시무룩하게 쳐다보고, 얼굴색이 누렇거나, 보라색이거나, 심지어 녹색이 된 (주로 널브러져 있는) 김허앵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는 (육아 게임에서) 빠져 나왔어요”고 말하는 상상을 해본다. 89년생 김허앵은 김지영처럼 곱게 미치는 대신 흘러내리는 중이다. 르누아르 풍의 그림처럼 결코 산뜻하지만은 않은 <한여름의 산책>에서 김허앵은 액체가 되어 흐른다. 실제로 김허앵은 육아를 “액체”적으로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의 변이나 침과 같은 배설물, 엄마의 젖, 항상 감기에 걸려 흐르는 콧물, 땀에 젖은 배냇머리와 축 늘어져 있는 엄마의 티셔츠와 같이 육아의 일상은 축축하거나 끈적이거나 흘러내린다.

‘엄마하기’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은 개인 서사로의 이행, 단일한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침범과 범람의 일상, 단절과 전환의 반복으로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비일관된 자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비고정적이고, 그 자체로 혼란이며, 정체성의 규범과 경계가 사라진 액체의 상태로 살아가기이다. 지난 날 여성 미술이 ‘엄마하기’의 자아를 주로 자폐적으로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으로 그려냈다면, 김허앵은 차라리 코미디로 그 혼란을 폭로하는 쪽을 택했다. 고혹적으로 요람 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여유로운 미소로 일관하는 주부의 표상은 정물화와 다르지 않다. 닫힌 프레임 속에 들어선 정물화처럼 박제된 주부의 공간에 김허앵은 만화 캐릭터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서 씩 웃어 보인다.

김허앵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허용치 안에서 소비되는 용도로서 ‘엄마하기’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오히려 ‘엄마하기’에 수반되는 광적인 날들을 유머와 해학으로서 농담처럼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을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으로 환원시키고자 몸부림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김허앵이라는 육아하는 자신을 현모양처도, 아줌마도, 주부의 이미지도 아닌 스스로 가공한 선택지에서 창안하고자 시도한 그 의지가 결국 김허앵이라는 엄마를 예술가로서 살도록 할 것이다.

1) 포궁(한문: 胞宮)은 자궁(한문: 子宮, 영어: uterus)의 다른 말이다. 실생활에서는 자궁이라는 단어가 포궁보다 절대적으로 많이 쓰이고 정식 의학용어도 자궁이다. 그러나 자궁의 아들 자자를 피하기 위해 포궁이라는 단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있다.
2) 실제로 참조한 게임은 너구리 게임이라고 한다.

디자인: 추미림
글: 윤민화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김허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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