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시와 비도시,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지며, 장소는 더 이상 정주의 공간이 아니라 사라지거나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무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이동성’은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정보·자원·교통의 흐름에 따라 삶의 지대가 바뀌는 현상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낙후된 지역이 번화해지거나, 반대로 번화한 지역이 쇠퇴하는 현상은 이동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시 공동체의 모델로 ‘메트로폴리스’가 자리 잡은 이후, 이동성에 따른 장소의 소멸은 오늘날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단지 장소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는 상실의 감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장소의 상실은 기억의 차원을 넘어, 개인과 사물의 관계를 변화시키며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둔주(遁走)’라는 개념을 문화적·사회적 층위에서 호출합니다.
전시 《둔주: 그림자가 된 전통》은 사회적 변화의 지층 속에서 ‘둔주’를 하나의 문화적 감각이자, 한국 사회의 집단적 정서로 바라봅니다. 19세기 말, ‘둔주’는 해리성 장애—즉 기억상실—로 분류된 정신질환의 일종이었습니다. 이 현상의 핵심은 ‘정체성을 상실한 채 장소를 이동하는 것’입니다. 낯선 장소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 장소와 정체성 상실이 지닌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몇 년간 지역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여러 지역을 현장 조사했습니다. 그 지역들 대부분이 식민지배와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며 급격한 변화와 해체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는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생산과 번영을 꿈꾸는 동시에 소멸과 쇠퇴의 공포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도시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색채는 빠르게 지워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지난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식민제국주의, 민족주의, 전쟁, 신자유주의 등을 겪으며 반복적인 장소 상실을 경험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정체성을 요구받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공동체와 사물의 가치가 끊임없이 재편되며 사회적 갈등은 심화되었고, 사람들은 그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정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곳’과 ‘저곳’을 끊임없이 출몰하는 ‘둔주’는 근대인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을 드러내는 동시에, 기존 정체성의 분리를 통해 새로운 존재 양식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전시는 근대/전근대, 식민 근대성/서구 근대성, 공산주의/자본주의라는 한국 현대사의 이분법적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도주하는 ‘둔주’의 궤적을 그립니다. 여기서 ‘둔주’는 회피나 도망이 아니라, 기존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또 다른 존재 양식으로 나아가는 탈주의 방법론을 제안합니다. ‘둔주’를 통해 근대 한국인의 기획된 몸을 탐구하고, 장소 상실이 불러온 애착과 혐오의 정동을 추적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감정 구조를 드러내며, 장소의 상실이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사회 전체에 남긴 흔적을 성찰하고자 합니다.
전시가 열리는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는 ‘이동성’이라는 전시 주제와도 깊게 맞닿아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과거 보부상 육로이자 충남 3대 우시장 중 하나로 오일장이 열린 중심지였으며,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식량 수탈과 자원 조달을 위해 장항선 판교역이 개설되며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장항선이 폐선되면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축을 잃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이곳을 ‘소멸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판교극장과, 과거 닭집으로 사용되었던 공간 두 곳에서 진행됩니다. 판교극장은 과거 지역 문화 활동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기능을 상실한 공간으로,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판교극장 1층에는 김동희, 이호억, 최수련, 신익균 작가가 허구적인 것, 반쯤 믿어진 것,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를 드러냅니다. 1층을 나서면 김재민이, 정한결, 김소라 작가의 작품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사의 시간성을 개인의 기억과 몸으로 연결짓습니다. 2층에는 노드 트리(이화영, 정강현), 쑨지, 장시재 작가가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림자’를 지닐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매체화하였습니다. 전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촌닭집에서는 전형진과 윤결이 삶의 애환과 흥을 담은 오늘날의 의례를 작품으로 선보입니다.
12인의 작가는 장소의 소멸과 출몰의 감각을 통해 근대 한국인의 기획된 몸과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탐구합니다. 이들은 그 안에 잠재된 애착과 혐오, 공포와 기대의 감정을 드러내며, 사라진 장소가 남긴 정동의 층위를 예술적으로 풀어냅니다.
《둔주: 그림자가 된 전통》은 사라진 후에야 드러나는 존재들과 함께 우리가 서 있는 땅과 공동체를 감각하는 시간을 제안합니다. 사라진 것들이 남긴 감정의 층위에 주목하며, 출몰과 소멸, 기억과 장소의 관계를 예술적으로 사유하는 이 여정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강정아)
참여 작가: 김동희, 김소라, 김재민이, 노드 트리(이화영, 정강현), 신익균, 쑨지, 윤결, 이호억, 전형진, 정한결, 장시재, 최수련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