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삐: 우리라는 유령들

통의동 보안여관

2025년 11월 14일 ~ 2025년 12월 6일

랩삐는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양한 역할극을 통해 인간의 물질-비물질 노동 간 교환 가치의 현주소를 질문하는 전시를 선보인 바 있다. 이러한 전시의 이면에는 작가들의 보이지 않는 활동이 있었다. 전시 운영을 위한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강도와 그것을 수행한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의 신체와 기억 속에 분명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새겨졌다. 이런 노동의 비가시성과 체현된 실체 간의 불균형이 랩삐가 ‘유령 노동(Ghost Work)’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사회는 정보가 곧 자본이 되는 인지 자본주의(Cognitive Capitalism) 체제 위에 서 있다. 인간의 지식, 감정, 그리고 사적인 경험까지 데이터로 환원되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 체제에서, 인간은 더 이상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 알고리즘의 보조역으로 기능한다. 인간을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하겠다는 최신 기술의 밝은 빛 이면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손과 신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AI와 같은 기술적 존재들이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익명의 그림자이다. 즉, 데이터를 정제하고, 이미지를 라벨링하고, 콘텐츠를 검열하는 수많은 유령 노동자의 모습은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랩삐는 유령 노동자를 특정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스스로의 시간과 노력을 시스템에 헌납하며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나날이 가속화되는 AI 시대에 일을 찾아 떠도는 자들로 한 데 묶는다. 유령은 눈으로 포착할 수 없지만, 어둠 속에서 그 흔적을 유추할 때 비로소 떠오르는 형상이다. 반면, 인간의 몸을 통해 실행되는 유령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노동자의 신체 속에 각인된 감각이다. 유령 노동자는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에 있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와 무력감은 공기와 데이터 속에서 진동하여 물리적 공간에도 작은 흔적을 남기고 점차 우리 모두의 감정에 침투하고 공명한다. 그래서 랩삐는 이 전시를 통해 유령 노동자의 삶에 연대하고 그 흔적을 읽으려 애쓰면서 그들의 목소리와 형상을 추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플랫폼과 데이터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시간, 감정, 신체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름 없는 존재들의 감각을 예술의 언어로 되살리고자 한다. 

전시 《우리라는 유령들》에서, 랩삐는 인간을 유령화하는 작금의 현실과 닮은 사변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 세계관 속에는 가상의 기업 ‘D.dal’, 공공미술 협회 ‘공공미술 365’, 유령 노동자 ‘고석하’가 등장한다. 랩삐는 이들을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 위에서 AI, 예술과 노동 시스템의 관계를 드러내는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관객은 먼저 유령 노동자 고석하의 일과를 담은 영상을 보게 된다. 하루 종일 공공미술 작품을 관리하고, 기계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쓸모없는 데이터를 분류하고 이미지를 필터링하는 등 고석하가 거쳐 간 노동의 잔재들은 전시장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 작업들은 유령노동자의 신체에 새겨진 반복된 데이터 노동의 흔적, 효율성을 위해 희생된 감정, 예술 현장에서조차 지워진 노동, 성공에 대한 욕망, AI와 인간의 공생에 대한 회의감이 뒤섞인 현 사회를 풍자한다. 

관객은 각자의 시선으로 파편화된 이미지와 텍스트, 영상과 설치물을 따라 전시장의 방 곳곳을 누비며 그의 삶을 목격한다. 시간이 지나 희미해진 노동의 흔적을 되짚고, 기술문명 아래 감춰진 인간의 몸을 더듬어 나간다. 이는 투명한 존재와 보려고 하는 존재가 서로 몸의 경계를 넘나드는 수행적 움직임이기도 하다. 유령 노동자의 몸을 찾아 추적하는 일은 곧 우리가 이 기술문명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는 일로 연결될 수 있다. 즉, 유령 노동의 그림자를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가능성의 빛을 본다. 보이지 않는 노동의 자리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기술의 속도를 잠시 멈추어 감각의 회복과 인간적 연대의 가능성을 되묻는다. 사라지지 않으려는 몸, 잊히지 않으려는 감정, 그 잔존의 힘이야말로 이 시대의 유령들이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신호일 것이다.

글: 랩삐(lab B : 강민정, 안가영, 최혜련)

주최및주관: lab B (강민정, 안가영,최혜련)
기획: lab B (강민정, 안가영,최혜련)
공간조성: 피스오브피스
사운드 : 최종빈
출연: 고경민, 박새라
강연: 이광석, 유은순
자문: 박정수, 서유경(아티스), 유채린, 이규식, 이솜이
영상촬영: 심동수
사진촬영: 송광찬
행정코디네이터: 김윤하
포스터, 도록디자인: 박채희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5년다원예술창작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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