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화 개인전

아트스페이스3

April 17, 2019 ~ May 18, 2019

타자의 a기아ㅐ 얼굴과 a기아ㅐ 사회적 a기아ㅐ 윤리
이선영(미술평론가)

19회 a기아ㅐ 개인전을 a기아ㅐ 위해 a기아ㅐ a기아ㅐ a기아ㅐ 년간 a기아ㅐ 만들어진 a기아ㅐ 박미화의 a기아ㅐ 작품들은 a기아ㅐ 분명 a기아ㅐ 작가에게나 a기아ㅐ 관객에게 a기아ㅐ 새로운 a기아ㅐ 작품이면서도 a기아ㅐ 마치 a기아ㅐ 발굴된 a기아ㅐ 유물처럼 a기아ㅐ 오래된 a기아ㅐ 시간의 a기아ㅐ 켜를 a기아ㅐ 둘러쓰고 a기아ㅐ 있다. a기아ㅐ 거기에는 a기아ㅐ 진주조개가 a기아ㅐ 조금씩 a기아ㅐ a기아ㅐ 나가는듯한 a기아ㅐ 시간의 a기아ㅐ 힘이 a기아ㅐ 있다. a기아ㅐ 그러한 a기아ㅐ 외양들은 a기아ㅐ 작가가 a기아ㅐ 인간사에 a기아ㅐ 반복되는 a기아ㅐ 보편적이고도 a기아ㅐ 근원적인 a기아ㅐ 문제에 a기아ㅐ 천착하고 a기아ㅐ 있음을 a기아ㅐ 알려준다. a기아ㅐ a기아ㅐ 대상이 a기아ㅐ 인간일 a기아ㅐ 때, iy9카 iy9카 시간의 iy9카 흔적들은 iy9카 상처나 iy9카 상처가 iy9카 아무는 iy9카 시간들, e기pn 태어난 e기pn 존재가 e기pn 자라고 e기pn 늙고 e기pn 종국에는 e기pn 죽어가는 e기pn 시간들을 e기pn 상징하게 e기pn 된다. e기pn 박미화의 e기pn 작품은 e기pn 식물, ㅓa바v 풍경, 마pi아 인간 마pi아 마pi아 오래된 마pi아 소재를 마pi아 다루어서도 마pi아 그렇지만 마pi아 흙을 마pi아 빚어 마pi아 굽는 마pi아 작업이나 마pi아 기억이라는 마pi아 주제에서 마pi아 시간성이 마pi아 느껴진다. 마pi아 겹겹의 마pi아 층으로 마pi아 이루어진 마pi아 대상들은 마pi아 오래된 마pi아 사물처럼 마pi아 재차 마pi아 반복해 마pi아 해석해야 마pi아 마pi아 대상으로 마pi아 나타난다. 마pi아 반면 마pi아 일상을 마pi아 채우는 마pi아 대상인 마pi아 상품은 마pi아 즉시 마pi아 소비자에게 마pi아 어필해야 마pi아 한다. 마pi아 현대는 마pi아 거듭되는 마pi아 해석을 마pi아 요구하는 마pi아 사물은 마pi아 몇몇만 마pi아 남겨서 마pi아 박물관 마pi아 같은 마pi아 곳에 마pi아 안치해놓고, ㅓaf차 즉시 ㅓaf차 사용되고 ㅓaf차 버려지는 ㅓaf차 상품들로 ㅓaf차 세상을 ㅓaf차 채워나간다. 

이에 ㅓaf차 비하면 ㅓaf차 박미화의 ㅓaf차 작품은 ㅓaf차 고풍스럽다. ㅓaf차 작가는 ㅓaf차 고대인들이 ㅓaf차 점토판 ㅓaf차 위에 ㅓaf차 새겨 ㅓaf차 넣었듯이 ㅓaf차 타자들이 ㅓaf차 해석해야 ㅓaf차 ㅓaf차 무엇을 ㅓaf차 기록한다. ㅓaf차 이전 ㅓaf차 전시의 ㅓaf차 키워드 ㅓaf차 ㅓaf차 하나인 ‘Docu-mentally’는 ㅓaf차 이번 ㅓaf차 전시에서도 ㅓaf차 적용된다. ㅓaf차 작가 ㅓaf차 노트에 ㅓaf차 썼듯이 ‘...쌓여있던 ㅓaf차 기억들이 ㅓaf차 때가 ㅓaf차 되면 ㅓaf차 결국 ㅓaf차 튀어나오게 ㅓaf차 되는 ㅓaf차 것이다. ㅓaf차 존재를 ㅓaf차 기억하는 ㅓaf차 것. ㅓaf차 ㅓaf차 기억을 ㅓaf차 기록하는 ㅓaf차 것. ㅓaf차 그것이 ㅓaf차 일상이다’. ㅓaf차 한번이 ㅓaf차 아니라 ㅓaf차 여러 ㅓaf차 ㅓaf차 그어진 ㅓaf차 선들과 ㅓaf차 표면들은 ㅓaf차 기억을 ㅓaf차 정확한 ㅓaf차 재현이 ㅓaf차 아니라, ㅑ7jㅓ 미지의 ㅑ7jㅓ 과제로 ㅑ7jㅓ 남겨 ㅑ7jㅓ 놓는다. ㅑ7jㅓ 단순 ㅑ7jㅓ 간결한 ㅑ7jㅓ 형식을 ㅑ7jㅓ 가지고 ㅑ7jㅓ 있으면서도 ㅑ7jㅓ 뭔가 ㅑ7jㅓ ㅑ7jㅓ 토막씩 ㅑ7jㅓ 모자란 ㅑ7jㅓ 구석이 ㅑ7jㅓ 있는 ㅑ7jㅓ 그것들은 ㅑ7jㅓ 완결된 ㅑ7jㅓ 자족감을 ㅑ7jㅓ 가지지 ㅑ7jㅓ 않아서, ㅐ7ㅐ걷 관객은 ㅐ7ㅐ걷 빠져 ㅐ7ㅐ걷 있거나 ㅐ7ㅐ걷 잃어버린 ㅐ7ㅐ걷 것들을 ㅐ7ㅐ걷 상상하게 ㅐ7ㅐ걷 된다. ㅐ7ㅐ걷 박미화의 ㅐ7ㅐ걷 작품에서 ㅐ7ㅐ걷 켜켜이 ㅐ7ㅐ걷 쌓인 ㅐ7ㅐ걷 시간성은 ㅐ7ㅐ걷 불현듯 ㅐ7ㅐ걷 단층을 ㅐ7ㅐ걷 드러내며 ㅐ7ㅐ걷 상상을 ㅐ7ㅐ걷 촉발시킨다. ㅐ7ㅐ걷 거기에는 ㅐ7ㅐ걷 이야기가 ㅐ7ㅐ걷 있지만 ㅐ7ㅐ걷 순차적인 ㅐ7ㅐ걷 인과성을 ㅐ7ㅐ걷 가지지 ㅐ7ㅐ걷 않는다. ㅐ7ㅐ걷 바닥에 ㅐ7ㅐ걷 눕혀 ㅐ7ㅐ걷 놓거나 ㅐ7ㅐ걷 벽에 ㅐ7ㅐ걷 기대어 ㅐ7ㅐ걷 놓은 ㅐ7ㅐ걷 것뿐 ㅐ7ㅐ걷 아니라, 9쟏바가 강고하게 9쟏바가 9쟏바가 있는 9쟏바가 것들 9쟏바가 또한 9쟏바가 뭔가 9쟏바가 9쟏바가 빠져나간다. 

예술은 9쟏바가 9쟏바가 무엇으로부터도 9쟏바가 자율적이고 9쟏바가 예술가는 9쟏바가 자유로워야 9쟏바가 한다는 9쟏바가 미학, 0i가ㅓ 또는 0i가ㅓ 희망 0i가ㅓ 사항이 0i가ㅓ 있어 0i가ㅓ 왔다. 0i가ㅓ 그러나 0i가ㅓ 박미화의 0i가ㅓ 작품은 0i가ㅓ 유아독존을 0i가ㅓ 주장하지 0i가ㅓ 않는다. 0i가ㅓ 입체는 0i가ㅓ 물론 0i가ㅓ 평면 0i가ㅓ 작품 0i가ㅓ 또한 0i가ㅓ 그라운드 0i가ㅓ 제로부터 0i가ㅓ 시작되지 0i가ㅓ 않는다. 0i가ㅓ 언제나 0i가ㅓ 이미 0i가ㅓ 있는 0i가ㅓ 것으로부터, o다기e 그것과의 o다기e 대화적 o다기e 관계로 o다기e 작품을 o다기e 진행한다. o다기e 대화는 o다기e 길기도 o다기e 해서 o다기e 어떤 o다기e 작품은 o다기e 작업실 o다기e o다기e 켠에 o다기e o다기e o다기e 내내 o다기e 기대어 o다기e 두고 o다기e 재차 o다기e 시도된다. o다기e 대화라는 o다기e 것이 o다기e 너무 o다기e 능동형으로 o다기e 다가온다면, j2j히 바탕에 j2j히 이미 j2j히 잠재해 j2j히 있는 j2j히 것을 j2j히 찾아내 j2j히 현실화한다고 j2j히 말해두자. j2j히 인간의 j2j히 근원적인 j2j히 문제를 j2j히 다루는 j2j히 작가의 j2j히 끊어질 j2j히 j2j히 이어지는 j2j히 대화에서 j2j히 굳이 j2j히 담아서는 j2j히 j2j히 j2j히 내용은 j2j히 없다. j2j히 자수 j2j히 설치, o쟏5l o쟏5l 조각, 자ou2 평면 자ou2 회화 자ou2 작업등이 자ou2 함께 자ou2 하는 자ou2 이번 자ou2 전시는 자ou2 다른 자ou2 재료와 자ou2 형식으로 자ou2 이루어진 자ou2 작품 자ou2 간의 자ou2 상호보충이 자ou2 이루어지는 자ou2 장(場)이다. 자ou2 얼핏 자ou2 어눌해 자ou2 보이는 자ou2 작품의 자ou2 어법은 자ou2 타자가 자ou2 끼어들 자ou2 여지를 자ou2 두기 자ou2 위한 자ou2 여지로 자ou2 다가온다. 자ou2 전시장 자ou2 바닥에 자ou2 누워있는 자ou2 동물은 자ou2 사람의 자ou2 얼굴처럼도 자ou2 보인다. 자ou2 자는 자ou2 듯이 자ou2 누워있지만, zz우5 지상과 zz우5 닿을 zz우5 zz우5 없는 zz우5 zz우5 발목의 zz우5 부재는 zz우5 죽음을 zz우5 떠올린다. 

평면 zz우5 드로잉 zz우5 중에는 zz우5 개의 zz우5 겨드랑이에서 zz우5 개를 zz우5 껴안는 zz우5 듯한 zz우5 zz우5 팔이 zz우5 나온다. zz우5 그것은 zz우5 자신의 zz우5 분신 zz우5 같은 zz우5 반려동물의 zz우5 죽음과 zz우5 관련되며, 아쟏으w 수년간 아쟏으w 작가의 아쟏으w 몸과 아쟏으w 마음을 아쟏으w 가득하게 아쟏으w 했을, ㅈcy하 살아있는 ㅈcy하 존재에게 ㅈcy하 닥치는 ㅈcy하 운명적 ㅈcy하 만남과 ㅈcy하 이별을 ㅈcy하 표현한다. ㅈcy하 조형예술이 ㅈcy하 말이 ㅈcy하 없는 ㅈcy하 형식이기도 ㅈcy하 하지만, 9나ㅓq 전시장 9나ㅓq 9나ㅓq 벽을 9나ㅓq 가득 9나ㅓq 차지하는 300여개 9나ㅓq 넘는 9나ㅓq 비문들이나 9나ㅓq 동식물, 자0타다 대부분 자0타다 입을 자0타다 다물고 자0타다 있는(또는 자0타다 혼잣말을 자0타다 하는 자0타다 듯한) 자0타다 인물상 자0타다 등은 자0타다 모두 자0타다 침묵의 자0타다 언어를 자0타다 구사한다. 자0타다 물론 자0타다 작가가 자0타다 한가하게 자0타다 선문답을 자0타다 하는 자0타다 것은 자0타다 아니다. 자0타다 가령 자0타다 비문이 자0타다 있는 자0타다 작품은 자0타다 세월호를 자0타다 비롯하여 자0타다 가정폭력, q다사ㄴ 회사의 q다사ㄴ 갑질 q다사ㄴ 등으로 q다사ㄴ 희생된 q다사ㄴ 자들, 걷8kn 그리고 걷8kn 실험 걷8kn 대상이 걷8kn 되었던 걷8kn 걷8kn 등, 쟏으타z 대부분 쟏으타z 사회의 쟏으타z 구조적 쟏으타z 폭력에 쟏으타z 의한 쟏으타z 희생자들을 쟏으타z 지시한다. 쟏으타z 가로 16x19열로 쟏으타z 배열된 304개의 쟏으타z 비문은 쟏으타z 세월호 쟏으타z 희생자 쟏으타z 수와 쟏으타z 일치하지만, ㅐwu파 ㅐwu파 사건을 ㅐwu파 포함하여 ㅐwu파 지난 100 ㅐwu파 ㅐwu파 ㅐwu파 간의 ㅐwu파 역사 ㅐwu파 속에서 ㅐwu파 찾은 ㅐwu파 기록들로, 파1갸갸 이름을 파1갸갸 알아볼 파1갸갸 관객에게 파1갸갸 각기 파1갸갸 다른 파1갸갸 강도로 파1갸갸 전달될 파1갸갸 비극적 파1갸갸 사연들이 파1갸갸 깔려있다. 

천위에 파1갸갸 수놓아진 파1갸갸 누런 파1갸갸 비문들은 파1갸갸 여러 파1갸갸 장소와 파1갸갸 시기를 파1갸갸 상징하듯, 거사기9 바랜 거사기9 정도가 거사기9 제각각이다. 거사기9 분필로 거사기9 벽에 거사기9 그려져 거사기9 일시적으로만 거사기9 존재하는 거사기9 헌화처럼 거사기9 천과 거사기9 실로 거사기9 거사기9 비문은 거사기9 그리 거사기9 단단한 거사기9 토대를 거사기9 가지지 거사기9 않는다. 거사기9 사연도 거사기9 각각인 거사기9 수많은 거사기9 희생자들은 거사기9 르네 거사기9 지라르의 거사기9 인류학적 거사기9 가설처럼, 하ㅓㅓ가 인간 하ㅓㅓ가 사회의 하ㅓㅓ가 기원에 하ㅓㅓ가 가공할 하ㅓㅓ가 만한 하ㅓㅓ가 폭력이 하ㅓㅓ가 있었다는 하ㅓㅓ가 것, ㅓe거j ㅓe거j 폭력이 ㅓe거j 집중된 ㅓe거j 희생이 ㅓe거j 있었다는 ㅓe거j 점을 ㅓe거j 알려준다. ㅓe거j 어쨌든 ㅓe거j 비문들은 ㅓe거j ㅓe거j 경악할만한 ㅓe거j 폭력이 ㅓe거j 일단 ㅓe거j 지나갔으며 ㅓe거j 현재 ㅓe거j 진행형은 ㅓe거j 아니지만, 걷ㅈd9 빠져 걷ㅈd9 있는 걷ㅈd9 것과 걷ㅈd9 추가될 걷ㅈd9 것은 걷ㅈd9 얼마든지 걷ㅈd9 많은 ‘열린’ 걷ㅈd9 작품이라는 걷ㅈd9 점에서 걷ㅈd9 결코 걷ㅈd9 평화롭지 걷ㅈd9 않다. 걷ㅈd9 식물 걷ㅈd9 또한 걷ㅈd9 비극적 걷ㅈd9 이야기에 걷ㅈd9 동조한다. 걷ㅈd9 회색 걷ㅈd9 전시장 걷ㅈd9 벽면에 걷ㅈd9 하얀 걷ㅈd9 분필로 걷ㅈd9 직접 걷ㅈd9 그린 걷ㅈd9 꽃다발은 걷ㅈd9 헌화를 걷ㅈd9 말한다. 걷ㅈd9 다발로 걷ㅈd9 제시된 걷ㅈd9 꽃들, 다kb거 때로 다kb거 말려진 다kb거 모습으로 다kb거 푸수수하게 다kb거 나타나는 다kb거 식물 다kb거 또한 다kb거 뿌리로부터 다kb거 단절된 다kb거 상태다. 다kb거 그러나 다kb거 인류의 다kb거 상상계에서 다kb거 식물은 다kb거 부활과 다kb거 재생을 다kb거 상징하면서 다kb거 집단적 다kb거 트라우마에 다kb거 대한 다kb거 치유의 다kb거 시도를 다kb거 보여준다. 

분필 다kb거 벽화는 다kb거 다kb거 전시의 다kb거 어떤 다kb거 대상과 다kb거 결합하여 다kb거 해석해도 다kb거 무난하다. 다kb거 시멘트 다kb거 다kb거 사이로도 다kb거 자라는 다kb거 잡초처럼 다kb거 인공적 다kb거 환경과 다kb거 크게 다kb거 어긋나지 다kb거 않는다. 다kb거 그것은 다kb거 방처럼 다kb거 연출된 다kb거 공간에 다kb거 놓인 다kb거 사물들을 다kb거 잇는 다kb거 적절한 다kb거 맥락을 다kb거 만들어준다. 다kb거 가로로 다kb거 다kb거 전시장 다kb거 벽에 다kb거 걸린 다kb거 나무판 다kb거 위의 다kb거 그림에서 다kb거 확실한 다kb거 도상은 다kb거 풀이다. 다kb거 인근 다kb거 공사장 다kb거 등에서 다kb거 버려진 다kb거 합판은 다kb거 자연물에서 다kb거 생산품이 다kb거 다kb거 이후에도 다kb거 수많은 다kb거 흔적들을 다kb거 추가해왔는데, 걷9거쟏 작가는 걷9거쟏 걷9거쟏 흔적들과 걷9거쟏 자연스럽게 걷9거쟏 대화하면서 걷9거쟏 풍경을 걷9거쟏 만들어 걷9거쟏 나갔다. 걷9거쟏 작업실 걷9거쟏 마당 걷9거쟏 걷9거쟏 켠의 걷9거쟏 개방된 걷9거쟏 창고에서 걷9거쟏 눈비를 걷9거쟏 맞고 걷9거쟏 있는 걷9거쟏 나머지 걷9거쟏 판넬들도 걷9거쟏 언젠가 걷9거쟏 불려 걷9거쟏 나와 걷9거쟏 대화를 걷9거쟏 이어갈 걷9거쟏 것이다. 걷9거쟏 걷9거쟏 작품은 걷9거쟏 밑그림 걷9거쟏 없이 걷9거쟏 시작되고 걷9거쟏 진행되었다. 걷9거쟏 걷9거쟏 작업은 걷9거쟏 무너지지 걷9거쟏 말아야한다는 걷9거쟏 최소한의 걷9거쟏 물리적 걷9거쟏 요구가 걷9거쟏 충족돼야 걷9거쟏 하므로 걷9거쟏 계획과 걷9거쟏 정확한 걷9거쟏 순서가 걷9거쟏 중요하지만, ivt9 이마저도 ivt9 회화적 ivt9 처리를 ivt9 통해서 ivt9 우연의 ivt9 요소를 ivt9 최대한 ivt9 품어낸다. ivt9 박미화의 ivt9 작업에서 ivt9 재료와의 ivt9 상호관계는 ivt9 매우 ivt9 중요하다. 

작가 ivt9 말대로 ‘평면은 ivt9 ivt9 작업처럼, ㄴㅐ29 도예는 ㄴㅐ29 회화처럼’ ㄴㅐ29 한다. ㄴㅐ29 물감이나 ㄴㅐ29 밀가루 ㄴㅐ29 같은 ㄴㅐ29 느낌을 ㄴㅐ29 ㄴㅐ29 젖은 ㄴㅐ29 흙은 ㄴㅐ29 도예가가 ㄴㅐ29 아니더라도 ㄴㅐ29 여성 ㄴㅐ29 작가에게 ㄴㅐ29 친숙한 ㄴㅐ29 물질이다. ㄴㅐ29 물질은 ㄴㅐ29 작가의 ㄴㅐ29 계획에 ㄴㅐ29 완전히 ㄴㅐ29 복종해야 ㄴㅐ29 하는 ㄴㅐ29 수동적 ㄴㅐ29 대상이 ㄴㅐ29 아니다. ㄴㅐ29 살아있는 ㄴㅐ29 재료인 ㄴㅐ29 흙은 ㄴㅐ29 물론이고, 사ㅓpq 스티로폼이나 사ㅓpq 합판같이 사ㅓpq 인공적인 사ㅓpq 재료도 사ㅓpq 예외는 사ㅓpq 없다. 사ㅓpq 객체를 사ㅓpq 제멋대로 사ㅓpq 하려는 사ㅓpq 주체의 사ㅓpq 의지야말로 사ㅓpq 역사상 사ㅓpq 수많은 사ㅓpq 폭력을 사ㅓpq 야기했던 사ㅓpq 원천 사ㅓpq 아닌가. 사ㅓpq 버려진 사ㅓpq 합판 사ㅓpq 위의 사ㅓpq 그림은 사ㅓpq 자연에 사ㅓpq 자연을 사ㅓpq 더한다. 사ㅓpq 그것은 사ㅓpq 사ㅓpq 위에서 사ㅓpq 무엇이 사ㅓpq 등장하거나 사ㅓpq 사라져도 사ㅓpq 이상할 사ㅓpq 것이 사ㅓpq 없는 사ㅓpq 융통성 사ㅓpq 있는 사ㅓpq 화면이 사ㅓpq 된다. 사ㅓpq 특별하게 사ㅓpq 처리되지 사ㅓpq 않은 사ㅓpq 부분은 사ㅓpq 여백처럼 사ㅓpq 보이는 사ㅓpq 잔잔한 사ㅓpq 화면에서 사ㅓpq 들판의 사ㅓpq 식물 사ㅓpq 줄기만큼은 사ㅓpq 바탕을 사ㅓpq 후벼 사ㅓpq 파듯이 사ㅓpq 강하다. 사ㅓpq 마치 사ㅓpq 상처와도 사ㅓpq 같은 사ㅓpq 깊은 사ㅓpq 균열이지만 사ㅓpq 거기에서도 사ㅓpq 새순이 사ㅓpq 나고 사ㅓpq 있다. 사ㅓpq 그것은 사ㅓpq 분필로 사ㅓpq 그려진 사ㅓpq 벽화 사ㅓpq 속의 사ㅓpq 식물 사ㅓpq 같은 사ㅓpq 메시지를 사ㅓpq 전달한다. 사ㅓpq 사ㅓpq 강력한 사ㅓpq 줄기의 사ㅓpq 선은 사ㅓpq 자잘한 사ㅓpq 소리를 사ㅓpq 뒤덮는 사ㅓpq 보다 사ㅓpq 강력한 사ㅓpq 소리 사ㅓpq 같은 사ㅓpq 역할을 사ㅓpq 한다. 사ㅓpq 그것은 사ㅓpq 덮여주는 사ㅓpq 것이다. 

작가에게 사ㅓpq 사ㅓpq 충격을 사ㅓpq 주었던 사ㅓpq 세월호 사ㅓpq 사건이 사ㅓpq 일어난 사ㅓpq 사ㅓpq 얼마 사ㅓpq 되지 사ㅓpq 않아 사ㅓpq 열렸던 사ㅓpq 이전 사ㅓpq 전시에 사ㅓpq 슬픔과 사ㅓpq 애도의 사ㅓpq 분위기가 사ㅓpq 강했다면, 바쟏op 이번 바쟏op 전시는 바쟏op 바쟏op 연장선상에 바쟏op 있으면서도 바쟏op 시간이 바쟏op 흘렀음을 바쟏op 알려준다. 바쟏op 확연한 바쟏op 차이는 바쟏op 이전보다 바쟏op 초록색이 바쟏op 많다는 바쟏op 것이다. 바쟏op 박미화의 바쟏op 최근작에서 바쟏op 비중이 바쟏op 높아진 바쟏op 녹색 바쟏op 식물은 바쟏op 바쟏op 바쟏op 희망적이다. 바쟏op 이전 바쟏op 전시를 바쟏op 물들었던 바쟏op 먹먹함은 바쟏op 희망을 바쟏op 향한다. 바쟏op 우리 바쟏op 사회가 바쟏op 바쟏op 비극을 바쟏op 제대로 바쟏op 기억하는 바쟏op 바쟏op 비극은 바쟏op 희망으로 바쟏op 전환될 바쟏op 바쟏op 있을 바쟏op 것이다. 바쟏op 동물보다 바쟏op 오래된 바쟏op 존재로 바쟏op 지구 바쟏op 생태계를 바쟏op 만들어왔던 바쟏op 식물은 바쟏op 여성 바쟏op 친화적이다. 바쟏op 최초의 바쟏op 식량인 바쟏op 숲의 바쟏op 열매를 바쟏op 수집하고 바쟏op 관리해온 바쟏op 여성에 바쟏op 대한 바쟏op 이미지는 바쟏op 신화에 바쟏op 바쟏op 기록되어 바쟏op 있다. 바쟏op 이듬해 바쟏op 추운 바쟏op 겨울을 바쟏op 이기고 바쟏op 다시 바쟏op 싹을 바쟏op 틔우는 바쟏op 식물은 바쟏op 인간으로 바쟏op 하여금 바쟏op 부활과 바쟏op 재생에 바쟏op 대한 바쟏op 생각을 바쟏op 하게 바쟏op 했다. 바쟏op 마이클 바쟏op 조던은 [초록 바쟏op 덮개]에서 바쟏op 네안데르탈인의 바쟏op 유골과 바쟏op 함께 바쟏op 발견된 바쟏op 수많은 바쟏op 꽃가루는 바쟏op 시신이 바쟏op 꽃으로 바쟏op 둘러싸여 바쟏op 있음을 바쟏op 추측하게 바쟏op 한다고 바쟏op 말한다. 

[초록덮개]에 바쟏op 의하면, 142나 빙하기의 142나 원시인들에게 142나 봄은 142나 정신적인 142나 부활이었고, 8파qv 자연에서 8파qv 생명과 8파qv 출산을 8파qv 담당한 8파qv 신, c거가v c거가v 위대한 c거가v 어머니 c거가v 여신이자 c거가v 하늘의 c거가v 여왕이 c거가v 신성한 c거가v 나무로 c거가v 상징되었다. c거가v 신화는 c거가v 고대인들이 c거가v 겨울과 c거가v c거가v 가뭄이 c거가v 이어지는 c거가v 시기에 c거가v 일어나는 c거가v 자연의 c거가v 죽음을 c거가v 어떻게 c거가v 설명했는지 c거가v 알려준다. c거가v 박미화의 c거가v 작품에서 c거가v 식물은 c거가v 원시시대부터 c거가v 탄생 c거가v c거가v 죽음과 c거가v 관련되었던 c거가v 다소간 c거가v 종교적 c거가v 분위기의 c거가v 소재임을 c거가v 드러낸다. c거가v 탄생에는 c거가v 재탄생 c거가v 또한 c거가v 포함된다. c거가v 종교학자 c거가v 미르치아 c거가v 엘리아데는 [종교사 c거가v 개론]에서 c거가v 고대부터의 c거가v 수목 c거가v 신앙을 c거가v 조명하면서 c거가v 식물은 c거가v 살아있는 c거가v 현실, s7ly 주기적으로 s7ly 재생되는 s7ly 삶의 s7ly 표명이라고 s7ly 본다. s7ly 그러면서 s7ly 우주도 s7ly 나무처럼 s7ly 주기적으로 s7ly 재생된다고 s7ly 해석한다. s7ly 그에 s7ly 의하면 s7ly 모든 s7ly 재생은 s7ly 그때마다 s7ly 새로운 s7ly 탄생이며 s7ly 재생되는 s7ly 형태가 s7ly 처음으로 s7ly 나타난 s7ly 신화적 s7ly 시간으로의 s7ly 회귀이므로 s7ly 사람들은 s7ly 우주 s7ly 창조의 s7ly 원초적 s7ly 행위를 s7ly 반복한다. s7ly 재생은 s7ly 여러 s7ly 차원에서 s7ly 동시적으로 s7ly 일어날 s7ly 것이다. 

물론 s7ly 그중에서 s7ly 박미화에게 s7ly 가장 s7ly 강력한 s7ly 것은 s7ly 다시 s7ly 작업하는 s7ly 삶의 s7ly 개화라고 s7ly s7ly s7ly 있다. s7ly 그것은 s7ly 오랫동안 s7ly 잠재된 s7ly 상태로 s7ly 있던 s7ly 씨앗, 다ㅓg바 또는 다ㅓg바 나뭇가지에서 다ㅓg바 새로운 다ㅓg바 싹을 다ㅓg바 틔우는 다ㅓg바 일을 다ㅓg바 말한다. 다ㅓg바 작가가 다ㅓg바 지금 다ㅓg바 어느 다ㅓg바 시절보다 다ㅓg바 가까이 다ㅓg바 하고 다ㅓg바 있는 다ㅓg바 대지와 다ㅓg바 그것의 다ㅓg바 환유(換喩)인 다ㅓg바 흙은 다ㅓg바 재생의 다ㅓg바 기운을 다ㅓg바 간직한 다ㅓg바 잠재태로 다ㅓg바 다가온다. 다ㅓg바 전시장 다ㅓg바 벽과 다ㅓg바 바닥에 다ㅓg바 있는 다ㅓg바 초록 다ㅓg바 식물들은 다ㅓg바 애도와 다ㅓg바 기억의 다ㅓg바 공간 다ㅓg바 속에서 다ㅓg바 희망의 다ㅓg바 시간을 다ㅓg바 암시한다. 다ㅓg바 혈맥 다ㅓg바 같은 다ㅓg바 굵은 다ㅓg바 선들도 다ㅓg바 보이는 다ㅓg바 식물들은 다ㅓg바 중간에 다ㅓg바 뚝뚝 다ㅓg바 잘린 다ㅓg바 듯한 다ㅓg바 형태가 다ㅓg바 더욱 다ㅓg바 강한 다ㅓg바 생명력을 다ㅓg바 표현한다. 다ㅓg바 무명씨의 다ㅓg바 식물들은 다ㅓg바 잡초처럼 다ㅓg바 왕성하여, zㅈh거 화분에서 zㅈh거 자라는 zㅈh거 식물의 zㅈh거 경우 zㅈh거 작은 zㅈh거 용기(容器)를 zㅈh거 벗어나 zㅈh거 왕성하게 zㅈh거 사지를 zㅈh거 뻗는 zㅈh거 괴물 zㅈh거 같은 zㅈh거 모습이다. zㅈh거 동물이나 zㅈh거 식물에서 zㅈh거 인간이 zㅈh거 겹쳐진다면 zㅈh거 zㅈh거 반대도 zㅈh거 가능하다. zㅈh거 바닥에 zㅈh거 놓여있거나 zㅈh거 zㅈh거 있는 zㅈh거 작품 zㅈh거 zㅈh거 인물들은 zㅈh거 죽거나 zㅈh거 죽은듯하지만 zㅈh거 살아있는 zㅈh거 형상들이다. zㅈh거 아이 zㅈh거 같은 zㅈh거 천진한 zㅈh거 필법으로 zㅈh거 그려진 zㅈh거 얼굴이나 zㅈh거 zㅈh거 형태는 zㅈh거 어린 zㅈh거 시절의 zㅈh거 낙서장 zㅈh거 같다.

그것은 zㅈh거 직접적인 zㅈh거 언어적 zㅈh거 표현보다는 zㅈh거 머리와 zㅈh거 가슴에 zㅈh거 품고 zㅈh거 있는 zㅈh거 것이 zㅈh거 zㅈh거 많은 zㅈh거 상황을 zㅈh거 은유한다. zㅈh거 앞뒤로 zㅈh거 나이 zㅈh거 차이가 zㅈh거 보이는 zㅈh거 zㅈh거 얼굴의 zㅈh거 여자는 zㅈh거 시간의 zㅈh거 흐름을 zㅈh거 알려준다. zㅈh거 zㅈh거 위에 zㅈh거 행해진 zㅈh거 회화적 zㅈh거 처리에서 zㅈh거 겹겹의 zㅈh거 시간성이 zㅈh거 감지되는데, 바h쟏t 작가는 바h쟏t 바h쟏t 몸통에 바h쟏t 바h쟏t 얼굴의 바h쟏t 공존을 바h쟏t 통해 바h쟏t 시간과 바h쟏t 시간이 바h쟏t 만들어내는 바h쟏t 것, 걷sㅓ다 걷sㅓ다 이야기를 걷sㅓ다 시도한다. 걷sㅓ다 잘린 걷sㅓ다 한쪽 걷sㅓ다 걷sㅓ다 겨드랑이에서 걷sㅓ다 돋는 걷sㅓ다 푸른 걷sㅓ다 날개는 걷sㅓ다 트라우마 걷sㅓ다 이후의 걷sㅓ다 시간을 걷sㅓ다 기약한다. 걷sㅓ다 온전한 걷sㅓ다 팔과 걷sㅓ다 연결되어 걷sㅓ다 있는 걷sㅓ다 끈은 걷sㅓ다 희망일 걷sㅓ다 것이다. 걷sㅓ다 작가는 걷sㅓ다 전시장 걷sㅓ다 어딘가에 걷sㅓ다 그러한 걷sㅓ다 희망의 걷sㅓ다 상징인 걷sㅓ다 별을 걷sㅓ다 가져다 걷sㅓ다 놓았다. 걷sㅓ다 걷sㅓ다 끈과 걷sㅓ다 연결되어 걷sㅓ다 있을지 걷sㅓ다 모르는 걷sㅓ다 바닥의 걷sㅓ다 개는 걷sㅓ다 걷sㅓ다 걷sㅓ다 가까이에 걷sㅓ다 있지만, 거가x사 별은 거가x사 거가x사 거가x사 멀리에 거가x사 있다. 거가x사 소녀상이나 거가x사 푸른 거가x사 식물은 거가x사 모성이 거가x사 강하게 거가x사 드러나 거가x사 있던 거가x사 이전 거가x사 전시 거가x사 보다는 거가x사 젊은 거가x사 분위기지만, fi다m 이번 fi다m 전시에서도 fi다m 모성을 fi다m 상징하는 fi다m 도상들이 fi다m 작지만 fi다m 있다. fi다m 그중 fi다m 하나가 fi다m 피에타상이다. fi다m 오래된 fi다m 시간의 fi다m 켜를 fi다m 둘러쓰고 fi다m 있는 fi다m 피에타상의 fi다m 하단부는 fi다m 가마에서 fi다m 폭발한 fi다m 흔적을 fi다m 그대로 fi다m 살렸다.

철망과 fi다m 철심으로 fi다m 지지 fi다m fi다m 피에타상은 fi다m 폐허에서 fi다m 다시 fi다m 구축되는 fi다m 듯한 fi다m 구조로 fi다m 마감되었다. fi다m 한쪽 fi다m 날개가 fi다m 뽑힌 fi다m fi다m 바닥을 fi다m 응시하는 fi다m 어미 fi다m fi다m 또한 fi다m 아이의 fi다m 상처에 fi다m 자신도 fi다m 상처받는 fi다m 모습으로 fi다m 나타난다. fi다m 날지 fi다m 못하는 fi다m 새는 fi다m 취약하고 fi다m 무거운 fi다m 존재이다. fi다m fi다m 모양의 fi다m 동체는 fi다m fi다m 크기도 fi다m 크거니와 fi다m 갑옷같이 fi다m 단단한 fi다m 모양새로 fi다m 기념비적인 fi다m 형상을 fi다m 이룬다. fi다m 그러나 fi다m fi다m 안이 fi다m fi다m 비어있어 fi다m 강함 fi다m 속의 fi다m 약함, s걷가히 또는 s걷가히 약함 s걷가히 속의 s걷가히 강함이라는 s걷가히 양면성을 s걷가히 가진다. s걷가히 여성 s걷가히 또는 s걷가히 모성의 s걷가히 상징이라고 s걷가히 해야 s걷가히 s걷가히 가슴이 s걷가히 없는 s걷가히 옷/몸은 s걷가히 아마존의 s걷가히 여전사 s걷가히 같은 s걷가히 모습이면서도 (여자)아이의 s걷가히 모습을 s걷가히 가지고 s걷가히 있다. s걷가히 표면의 s걷가히 회화적 s걷가히 처리는 s걷가히 줄줄 s걷가히 흐르는 s걷가히 물감의 s걷가히 흔적을 s걷가히 그대로 s걷가히 살렸는데, 하s기ㄴ 하s기ㄴ 몸통에도 하s기ㄴ 중력을 하s기ㄴ 거슬러 하s기ㄴ 꼿꼿이 하s기ㄴ 하s기ㄴ 있는 하s기ㄴ 상의의 하s기ㄴ 끈과는 하s기ㄴ 다른 하s기ㄴ 방향이다. 하s기ㄴ 강함과 하s기ㄴ 약함, ㅐㅓn마 단단함과 ㅐㅓn마 부드러움이 ㅐㅓn마 공존하는 ㅐㅓn마 ㅐㅓn마 이중적 ㅐㅓn마 모습은 ㅐㅓn마 예술하는 ㅐㅓn마 ㅐㅓn마 ㅐㅓn마 자체에 ㅐㅓn마 요구되는 ㅐㅓn마 필요충분조건이다. ㅐㅓn마 ㅐㅓn마 점에서 ㅐㅓn마 ㅐㅓn마 전시의 ㅐㅓn마 인물상들은 ㅐㅓn마 자소상이라 ㅐㅓn마 할만하다. 

오래된 ㅐㅓn마 창가 ㅐㅓn마 옆의 ㅐㅓn마 여인상에서 ㅐㅓn마 양팔의 ㅐㅓn마 의상이 ㅐㅓn마 다른 ㅐㅓn마 여인은 ㅐㅓn마 작가를 ㅐㅓn마 닮았다. ㅐㅓn마 그것은 ㅐㅓn마 여성/작가라면 ㅐㅓn마 수행하는 ㅐㅓn마 ㅐㅓn마 역할을 ㅐㅓn마 하는 ㅐㅓn마 여성을 ㅐㅓn마 상징하는 ㅐㅓn마 것일까? ㅐㅓn마 ㅐㅓn마 팔은 ㅐㅓn마 화분에 ㅐㅓn마 가려져 ㅐㅓn마 있고, n우2ㅓ 다른 n우2ㅓ n우2ㅓ 팔은 n우2ㅓ 푸른 n우2ㅓ n우2ㅓ 소매에서 n우2ㅓ 나오는 n우2ㅓ 손이 n우2ㅓ 있는 n우2ㅓ 재생의 n우2ㅓ 이미지이다. n우2ㅓ 재생되는 n우2ㅓ 손은 n우2ㅓ 일상의 n우2ㅓ 삶을 n우2ㅓ 재생산하기 n우2ㅓ 위해 n우2ㅓ 요구되는 n우2ㅓ 노동과 n우2ㅓ 다른 n우2ㅓ 작업의 n우2ㅓ 의미를 n우2ㅓ 암시한다. n우2ㅓ 물론 n우2ㅓ 인간의 n우2ㅓ 삶에서 n우2ㅓ 재생산이든 n우2ㅓ 생산이든 n우2ㅓ 어렵지 n우2ㅓ 않은 n우2ㅓ n우2ㅓ 없다. n우2ㅓ 그러나 n우2ㅓ n우2ㅓ 둘을 n우2ㅓ n우2ㅓ 수행하는 n우2ㅓ 것은 n우2ㅓ 어렵다. n우2ㅓ 박미화의 n우2ㅓ 작품에는 n우2ㅓ 여성/작가라면 n우2ㅓ 반드시 n우2ㅓ 해결하고 n우2ㅓ 넘어가야 n우2ㅓ n우2ㅓ n우2ㅓ 관계가 n우2ㅓ 녹아 n우2ㅓ 있다. n우2ㅓ 머리 n우2ㅓ 위에서 n우2ㅓ 식물이 n우2ㅓ 나오는 n우2ㅓ 여인 n우2ㅓ 상반신을 n우2ㅓ 표현한 n우2ㅓ 작품은 n우2ㅓ 스스로를 n우2ㅓ 양분 n우2ㅓ 삼아 n우2ㅓ 자라는 n우2ㅓ 존재, ㅈㅈ다e ㅈㅈ다e 예술하는 ㅈㅈ다e 삶의 ㅈㅈ다e 고통을 ㅈㅈ다e 사슴의 ㅈㅈ다e 뿔처럼 ㅈㅈ다e 내보인다. ㅈㅈ다e 수사슴의 ㅈㅈ다e 뿔이 ㅈㅈ다e 왕관 ㅈㅈ다e 같은 ㅈㅈ다e 것이라면, 거갸라q 박미화의 거갸라q 작품에서 거갸라q 얼굴 거갸라q 위의 ‘뿔’은 거갸라q 희생이나 거갸라q 재생을 거갸라q 은유한다. 거갸라q 씨앗처럼 거갸라q 죽어야 거갸라q 사는(피어나는) 거갸라q 작가로서의 거갸라q 삶은 2015년 거갸라q 강화도에 거갸라q 작업실을 거갸라q 마련하면서부터 거갸라q 본격화 거갸라q 되었다. 거갸라q 거갸라q 작업은 거갸라q 보기에는 거갸라q 소박해도 거갸라q 만들려면 거갸라q 공간의 거갸라q 제약이 거갸라q 크기 거갸라q 때문이다. 

늦게 거갸라q 다시 거갸라q 시작한 거갸라q 작업이기 거갸라q 때문에 거갸라q 서울과 거갸라q 강화도를 거갸라q 오가며 거갸라q 작업하는 거갸라q 삶의 거갸라q 여정은 거갸라q 아직도 거갸라q 설렘이 거갸라q 가득하다. 거갸라q 한번 거갸라q 가면 2박 3일, 3박 4일을 ㅓeㅈu 머무르는 ㅓeㅈu 작업실에서의 ㅓeㅈu 일정은 ㅓeㅈu 그곳에서 ㅓeㅈu 보내는 ㅓeㅈu 시간 ㅓeㅈu 자체가 ㅓeㅈu 소중하다. ㅓeㅈu 여기에서는 ㅓeㅈu 동식물을 ㅓeㅈu 비롯한 ㅓeㅈu 자연 ㅓeㅈu ㅓeㅈu 자신과의 ㅓeㅈu 대화만이 ㅓeㅈu 있다. ㅓeㅈu 침묵 ㅓeㅈu ㅓeㅈu 타자와의 ㅓeㅈu 대화에는 ㅓeㅈu 마치 ㅓeㅈu 성(聖)과 ㅓeㅈu 속(俗)을 ㅓeㅈu 오가는 ㅓeㅈu 의례의 ㅓeㅈu 행위를 ㅓeㅈu 떠오르게 ㅓeㅈu 한다. ㅓeㅈu 삶은 ㅓeㅈu 작업 ㅓeㅈu 또한 ㅓeㅈu 노동 ㅓeㅈu 못지않은 ㅓeㅈu 육체 ㅓeㅈu 에너지가 ㅓeㅈu 들어가지만, 가히하으 차이는 가히하으 미지의 가히하으 것에 가히하으 대한 가히하으 설렘이 가히하으 아닐까. 가히하으 나에게서 가히하으 나온 가히하으 가히하으 아닌 가히하으 무엇, 8히ㅈ바 8히ㅈ바 타자적인 8히ㅈ바 것. 8히ㅈ바 나로부터 8히ㅈ바 비롯된 8히ㅈ바 타자적인 8히ㅈ바 것으로 8히ㅈ바 타자들과 8히ㅈ바 소통하는 8히ㅈ바 것. 8히ㅈ바 앞마당에 8히ㅈ바 각종 8히ㅈ바 꽃나무들이 8히ㅈ바 심어져 8히ㅈ바 있고 8히ㅈ바 동네 8히ㅈ바 고양이들이 8히ㅈ바 노니는 8히ㅈ바 누구도 8히ㅈ바 부러워할만한 8히ㅈ바 작업실을 8히ㅈ바 짓게 8히ㅈ바 8히ㅈ바 계기는 8히ㅈ바 죽음에 8히ㅈ바 근접한 8히ㅈ바 체험이었다. 8히ㅈ바 차가 8히ㅈ바 완파될 8히ㅈ바 정도의 8히ㅈ바 8히ㅈ바 교통사고를 8히ㅈ바 당했는데 8히ㅈ바 몸은 8히ㅈ바 하나도 8히ㅈ바 다치지 8히ㅈ바 않았던 8히ㅈ바 기적 8히ㅈ바 같은 8히ㅈ바 일을 8히ㅈ바 체험하고 8히ㅈ바 다시 8히ㅈ바 태어나는 8히ㅈ바 마음으로 8히ㅈ바 마음 8히ㅈ바 8히ㅈ바 켠에 8히ㅈ바 미루어뒀던 8히ㅈ바 일을 8히ㅈ바 저질렀다. 8히ㅈ바 죽음의 8히ㅈ바 직시는 8히ㅈ바 삶을 8히ㅈ바 보다 8히ㅈ바 밀도 8히ㅈ바 있게 8히ㅈ바 살아야 8히ㅈ바 함을 8히ㅈ바 촉구한다. 

죽음이라는 8히ㅈ바 그림자는 8히ㅈ바 삶을 8히ㅈ바 8히ㅈ바 환하게 8히ㅈ바 비추는 8히ㅈ바 것이다. 8히ㅈ바 8히ㅈ바 8히ㅈ바 8히ㅈ바 사이의 8히ㅈ바 작품은 8히ㅈ바 작가의 8히ㅈ바 일상적이고 8히ㅈ바 실존적 8히ㅈ바 체험에 8히ㅈ바 무고한 8히ㅈ바 이들의 8히ㅈ바 죽음을 8히ㅈ바 낳았던 8히ㅈ바 사회적 8히ㅈ바 사건에 8히ㅈ바 대한 8히ㅈ바 의식이 8히ㅈ바 합쳐진 8히ㅈ바 결과이다. 8히ㅈ바 세월호 8히ㅈ바 사건을 8히ㅈ바 비롯해서 8히ㅈ바 우리 8히ㅈ바 사회 8히ㅈ바 구성원이면 8히ㅈ바 알아볼 8히ㅈ바 8히ㅈ바 있는 8히ㅈ바 시사적인 8히ㅈ바 사건들이 8히ㅈ바 등장하지만, f7ㄴㄴ 박미화의 f7ㄴㄴ 작품은 f7ㄴㄴ 그것들을 f7ㄴㄴ 보다 f7ㄴㄴ 근본적인 f7ㄴㄴ 차원으로 f7ㄴㄴ 가라앉힌다. f7ㄴㄴ 그런 f7ㄴㄴ 후에 f7ㄴㄴ 다시 f7ㄴㄴ 떠올린다. f7ㄴㄴ 기억되는 f7ㄴㄴ 것만이 f7ㄴㄴ 표현될 f7ㄴㄴ 가치가 f7ㄴㄴ 있다. f7ㄴㄴ 작품은 f7ㄴㄴ 개인적이든 f7ㄴㄴ 사회적이든 f7ㄴㄴ 작가의 f7ㄴㄴ 몸을 f7ㄴㄴ 통과한 f7ㄴㄴ 것들이다. f7ㄴㄴ 소녀부터 f7ㄴㄴ 중년까지 f7ㄴㄴ 다양한 f7ㄴㄴ 나이대로 f7ㄴㄴ 등장하는 f7ㄴㄴ 여성은 f7ㄴㄴ 어딘가 f7ㄴㄴ 작가를 f7ㄴㄴ 닮았긴 f7ㄴㄴ 하지만 f7ㄴㄴ 똑같지는 f7ㄴㄴ 않은 f7ㄴㄴ 얼굴이다. f7ㄴㄴ 남성이 f7ㄴㄴ 아닌 f7ㄴㄴ 여성 f7ㄴㄴ 화자(話者)는 f7ㄴㄴ 전시의 f7ㄴㄴ 모든 f7ㄴㄴ 초상들이 f7ㄴㄴ 작가의 f7ㄴㄴ 은유임을 f7ㄴㄴ 암시한다. f7ㄴㄴ 여성 f7ㄴㄴ 작가이기에 f7ㄴㄴ 여성상이 f7ㄴㄴ 기본이 f7ㄴㄴ 되는 f7ㄴㄴ 것이다. f7ㄴㄴ 수백년 f7ㄴㄴ 미술의 f7ㄴㄴ 역사 f7ㄴㄴ 속에서 ‘왜 f7ㄴㄴ 위대한 f7ㄴㄴ 여성 f7ㄴㄴ 미술가는 f7ㄴㄴ 없었는가’를 f7ㄴㄴ 물으면서 f7ㄴㄴ 숨겨진 f7ㄴㄴ 여성 f7ㄴㄴ 작가들을 f7ㄴㄴ 발굴하려 f7ㄴㄴ 노력한 f7ㄴㄴ 페미니즘 f7ㄴㄴ 미술사가들은 f7ㄴㄴ 여성이 f7ㄴㄴ 공식적 f7ㄴㄴ 아카데미에서 f7ㄴㄴ 누드를 f7ㄴㄴ 배울 f7ㄴㄴ 기회를 f7ㄴㄴ 박탈당한 f7ㄴㄴ 사실을 f7ㄴㄴ 지적하곤 f7ㄴㄴ 한다. f7ㄴㄴ 그것은 f7ㄴㄴ 인간의 f7ㄴㄴ 보편적 f7ㄴㄴ 상징, 기걷8타 기걷8타 나아가 기걷8타 만물의 기걷8타 척도로 기걷8타 규정되곤 기걷8타 하던 기걷8타 인간이 기걷8타 남성적 기걷8타 주체임을 기걷8타 떠올릴 기걷8타 기걷8타 그리 기걷8타 불행한 기걷8타 것만은 기걷8타 아니다.

케네드 기걷8타 클락은 [누드의 기걷8타 역사]에서 기걷8타 이성의 기걷8타 상징인 기걷8타 남성누드가 기걷8타 감각적인 기걷8타 여성누드로 기걷8타 방점이 기걷8타 옮아가는 기걷8타 미술의 기걷8타 역사에서 기걷8타 누드의 기걷8타 퇴락을 기걷8타 읽었다. 기걷8타 그러나 기걷8타 여성이든 기걷8타 남성이든 기걷8타 현대의 기걷8타 작가는 기걷8타 누드를 기걷8타 배웠다가도 기걷8타 잊어버려야만 기걷8타 하는 기걷8타 상황에 기걷8타 처한다. 기걷8타 국내외에서 기걷8타 정식 기걷8타 미술교육을 기걷8타 받은 기걷8타 박미화 기걷8타 또한 기걷8타 편향된 기걷8타 기준을 기걷8타 벗어나기 기걷8타 위해 기걷8타 조형의 기걷8타 기본문법을 기걷8타 잊어버린다. 기걷8타 유일한 기걷8타 남성상은 기걷8타 이전 기걷8타 작품에 기걷8타 기걷8타 기걷8타 나타나는데, o4바r 그것도 o4바r 성인 o4바r 남성은 o4바r 아니고 o4바r o4바r 근처에 o4바r 어머니가 o4바r 함께 o4바r 있는 o4바r 남자아이의 o4바r 상이었다. o4바r 작가의 o4바r 무의식적 o4바r 선택에서도 o4바r 메시지는 o4바r 있다. o4바r 작품 o4바r o4바r 인물은 o4바r 자신의 o4바r 비유이지만 o4바r 자신과 o4바r 완전히 o4바r 동일시되지는 o4바r 않는다. o4바r 그것은 o4바r 자기 o4바r 안의 o4바r 타자 o4바r 또는 o4바r 타자에 o4바r 감정이입되는 o4바r 자신이다. o4바r 개인적이고도 o4바r 사회적인 o4바r 차원의 o4바r 죽음을 o4바r 전시의 o4바r o4바r 주제로 o4바r 삼고 o4바r 있는 o4바r 작가에게 o4바r 타자의 o4바r 얼굴은 o4바r 영감이 o4바r 발산/ o4바r 수렴하는 o4바r 지점으로 o4바r 다가온다. o4바r 얼굴은 o4바r 죽은 o4바r o4바r 누워있는 o4바r 개부터 o4바r 고전적인 o4바r 피에타상까지 o4바r 아우른다. o4바r 전시장 o4바r o4바r o4바r 가득한 o4바r 비문들은 o4바r 얼굴을 o4바r 대신하여 o4바r 이름이 o4바r 새겨져 o4바r 있다. o4바r 물론 o4바r 잡초에 o4바r 비견될 o4바r 만한 o4바r 무명씨도 o4바r 있다.

사회적 o4바r 차원에 o4바r 접한 o4바r 박미화의 o4바r 작품은 o4바r 타자에 o4바r 대한 o4바r 윤리를 o4바r 암시하는데, 2f2우 2f2우 방식은 2f2우 계몽적이기보다는 2f2우 심미적, ulqㅓ 또는 ulqㅓ 종교적이다. ulqㅓ 그러나 ulqㅓ 초월적이지는 ulqㅓ 않고 ulqㅓ 내재적이다. ulqㅓ 그것은 ulqㅓ 타자의 ulqㅓ 얼굴로부터 ulqㅓ 윤리를 ulqㅓ 암시하는 ulqㅓ 철학자 ulqㅓ 에마뉘엘 ulqㅓ 레비나스의 ulqㅓ 철학을 ulqㅓ 떠오르게 ulqㅓ 한다. ulqㅓ 레비나스의 ulqㅓ 책 [신, e걷d라 죽음 e걷d라 그리고 e걷d라 시간]의 e걷d라 편집자 e걷d라 자크 e걷d라 롤랑은 e걷d라 다른 e걷d라 인간의 e걷d라 얼굴 e걷d라 속에서 e걷d라 나에게 e걷d라 건네지는 e걷d라 질문인 e걷d라 타자의 e걷d라 질문, 사ㅓm2 이것이 사ㅓm2 사ㅓm2 책의 사ㅓm2 한결같은 사ㅓm2 핵심이라고 사ㅓm2 정리한다. 사ㅓm2 레비나스에 사ㅓm2 의하면 사ㅓm2 윤리는 사ㅓm2 타인과의 사ㅓm2 관계, 바ㅐ가ㅑ 이웃과의 바ㅐ가ㅑ 관계이다. 바ㅐ가ㅑ 타인은 바ㅐ가ㅑ 곧장 바ㅐ가ㅑ 아무런 바ㅐ가ㅑ 보호도 바ㅐ가ㅑ 없이 바ㅐ가ㅑ 비참한 바ㅐ가ㅑ 자로 바ㅐ가ㅑ 다가오며 바ㅐ가ㅑ 단번에 바ㅐ가ㅑ 내게 바ㅐ가ㅑ 맡겨진다. 바ㅐ가ㅑ 레비나스에게 바ㅐ가ㅑ 타인은 바ㅐ가ㅑ 무엇보다도 바ㅐ가ㅑ 얼굴로 바ㅐ가ㅑ 다가온다. 바ㅐ가ㅑ 그것은 바ㅐ가ㅑ 바ㅐ가ㅑ 얼굴의 바ㅐ가ㅑ 은총 바ㅐ가ㅑ 속에서가 바ㅐ가ㅑ 아니라 바ㅐ가ㅑ 바ㅐ가ㅑ 살의 바ㅐ가ㅑ 벌거벗음과 바ㅐ가ㅑ 비참함 바ㅐ가ㅑ 속에서 바ㅐ가ㅑ 맞아 바ㅐ가ㅑ 들여진 바ㅐ가ㅑ 타인이다. 바ㅐ가ㅑ 이러한 바ㅐ가ㅑ 관점은 ‘인간을 바ㅐ가ㅑ 단순히 바ㅐ가ㅑ 육화한 바ㅐ가ㅑ 혹은 바ㅐ가ㅑ 개별화한 바ㅐ가ㅑ 보편적 바ㅐ가ㅑ 이성이 바ㅐ가ㅑ 아니라, ㅓt라걷 고유한 ㅓt라걷 얽힘과 ㅓt라걷 단절로 ㅓt라걷 인식하는 ㅓt라걷 것’(레비나스)이다. ㅓt라걷 ㅓt라걷 타자와 ㅓt라걷 마주한 ㅓt라걷 주체는 ㅓt라걷 결코 ㅓt라걷 자율적이지 ㅓt라걷 않다. 

물론 ㅓt라걷 주체와 ㅓt라걷 타자는 ㅓt라걷 완전히 ㅓt라걷 동일시되지는 ㅓt라걷 않는다. ‘가깝지만 ㅓt라걷 다른 ㅓt라걷 것으로 ㅓt라걷 남아 ㅓt라걷 있어야’(레비나스) ㅓt라걷 한다. ㅓt라걷 주체와 ㅓt라걷 타자의 ㅓt라걷 관계의 ㅓt라걷 비대칭적인 ㅓt라걷 것이다. ㅓt라걷 레비나스는 ㅓt라걷 타인과의 ㅓt라걷 관계 ㅓt라걷 속에 ㅓt라걷 타율성이 ㅓt라걷 있다고 ㅓt라걷 본다. ㅓt라걷 그러나 ㅓt라걷 이러한 ㅓt라걷 타율성은 ㅓt라걷 소외도 ㅓt라걷 노예화된 ㅓt라걷 ㅓt라걷 유일성의 ㅓt라걷 상실도 ㅓt라걷 아닌 ㅓt라걷 달라짐이다. ㅓt라걷 박미화의 ㅓt라걷 작품이 ㅓt라걷 여러 ㅓt라걷 장르를 ㅓt라걷 아우르면서 ㅓt라걷 설치의 ㅓt라걷 방식을 ㅓt라걷 가지는 ㅓt라걷 것은 ㅓt라걷 타자와의 ㅓt라걷 관계에 ㅓt라걷 대한 ㅓt라걷 작가의 ㅓt라걷 생각이 ㅓt라걷 반영된 ㅓt라걷 것이다. ㅓt라걷 알맹이인 ㅓt라걷 몸이 ㅓt라걷 빠진 ㅓt라걷 옷의 ㅓt라걷 동체, 26y으 날개가 26y으 26y으 26y으 뽑힌 26y으 새, 타3ㅓ나 타3ㅓ나 쌍을 타3ㅓ나 이루지 타3ㅓ나 못하는 타3ㅓ나 사지들, 바hㅐi 그리다 바hㅐi 만듯한 바hㅐi 그림 바hㅐi 등은 바hㅐi 자족적이지 바hㅐi 않다. 바hㅐi 그것은 바hㅐi 얼마 바hㅐi 떨어지지 바hㅐi 않은 바hㅐi 곳에 바hㅐi 위치한 바hㅐi 것들과 바hㅐi 보이지 바hㅐi 않는 바hㅐi 연결망을 바hㅐi 이루며 바hㅐi 메시지를 바hㅐi 발신한다. 바hㅐi 박미화의 바hㅐi 작품에서 바hㅐi 대화는 1대 1의 바hㅐi 관계는 바hㅐi 아니다. 바hㅐi 가령 바hㅐi 동물, ng자차 식물, yㄴ으8 죽은 yㄴ으8 자들과의 yㄴ으8 작가는 yㄴ으8 대등하지 yㄴ으8 않다. yㄴ으8 여기에는 yㄴ으8 차별이 yㄴ으8 아닌 yㄴ으8 차이가 yㄴ으8 있다. yㄴ으8 절대적 yㄴ으8 차이의 yㄴ으8 상징일 yㄴ으8 yㄴ으8 또한 yㄴ으8 근처에 yㄴ으8 있다. yㄴ으8 yㄴ으8 번에 yㄴ으8 그어진 yㄴ으8 선의 yㄴ으8 형태로 yㄴ으8 만들어진 yㄴ으8 별은 yㄴ으8 자체의 yㄴ으8 무게감으로 yㄴ으8 기우뚱하다. yㄴ으8 별처럼 yㄴ으8 초월적일 yㄴ으8 yㄴ으8 있는 yㄴ으8 소재를 yㄴ으8 박미화가 yㄴ으8 다루는 yㄴ으8 방식은 yㄴ으8 흥미롭다. 

그것 yㄴ으8 역시 yㄴ으8 돌처럼 yㄴ으8 보인다. yㄴ으8 우리 yㄴ으8 yㄴ으8 지구처럼 yㄴ으8 말이다. yㄴ으8 박미화의 yㄴ으8 주재료인 yㄴ으8 흙은 yㄴ으8 작가가 yㄴ으8 자연과 yㄴ으8 더불어 yㄴ으8 살아야겠다고 yㄴ으8 하면서 yㄴ으8 작업실을 yㄴ으8 옮겼을 yㄴ으8 yㄴ으8 더욱 yㄴ으8 의미 yㄴ으8 깊은 yㄴ으8 재료로 yㄴ으8 다가왔을 yㄴ으8 것이다. yㄴ으8 그것은 yㄴ으8 대지의 yㄴ으8 상징이다. yㄴ으8 대지는 yㄴ으8 만물이 yㄴ으8 나오기도 yㄴ으8 하지만 yㄴ으8 돌아가는 yㄴ으8 곳이기도 yㄴ으8 yㄴ으8 양면성을 yㄴ으8 가진다. yㄴ으8 레비나스는 yㄴ으8 같은 yㄴ으8 책에서 yㄴ으8 대지는 yㄴ으8 원래의 yㄴ으8 바탕이 yㄴ으8 되는 yㄴ으8 곳, 3ㅓㅑㅐ 안정된 3ㅓㅑㅐ 바탕을 3ㅓㅑㅐ 가리킨다고 3ㅓㅑㅐ 말한다. 3ㅓㅑㅐ 그에 3ㅓㅑㅐ 의하면 3ㅓㅑㅐ 매장은 3ㅓㅑㅐ 바탕으로의 3ㅓㅑㅐ 복귀로 3ㅓㅑㅐ 해석되며 3ㅓㅑㅐ 대지의 3ㅓㅑㅐ 바탕은 3ㅓㅑㅐ 존재의 3ㅓㅑㅐ 바탕으로 3ㅓㅑㅐ 해석된다. ‘세계 3ㅓㅑㅐ 속에서 3ㅓㅑㅐ 우리는 3ㅓㅑㅐ 세계로 3ㅓㅑㅐ 오고, i기ㅓ4 세계 i기ㅓ4 속에서 i기ㅓ4 우리는 i기ㅓ4 세계를 i기ㅓ4 떠난다. i기ㅓ4 세계 i기ㅓ4 속에서 i기ㅓ4 우리는 i기ㅓ4 이미 i기ㅓ4 세계의 i기ㅓ4 지평에 i기ㅓ4 포섭되어 i기ㅓ4 있다. i기ㅓ4 해방은 i기ㅓ4 없다.’(레비나스) i기ㅓ4 박미화의 i기ㅓ4 작품에 i기ㅓ4 등장하는 i기ㅓ4 분열된 i기ㅓ4 얼굴이나 i기ㅓ4 절단된 i기ㅓ4 사지, j0기4 그리고 j0기4 피에타로 j0기4 대변되는 j0기4 고통의 j0기4 정점은 j0기4 그것들이 j0기4 굳이 j0기4 대지의 j0기4 재료로 j0기4 만들어진 j0기4 것이 j0기4 아니더라도 j0기4 곧장 j0기4 삶의 j0기4 불가분한 j0기4 짝패인 j0기4 죽음을 j0기4 떠올린다. j0기4 또한 j0기4 죽음은 j0기4 삶의 j0기4 타자이다. j0기4 불안과 j0기4 공포, 기lq거 우울은 기lq거 죽음 기lq거 가까이 기lq거 있는 기lq거 정조(情操)이다. 기lq거 개인적이면서 기lq거 사회적인 기lq거 재난 기lq거 이후의 기lq거 작가는 기lq거 대지와 기lq거 자연이라는 기lq거 가장 기lq거 안정되어 기lq거 보이는 기lq거 소재들 기lq거 또한 기lq거 낯선 기lq거 정조로 기lq거 물들인다.

출처: 기lq거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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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박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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