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화 개인전

아트스페이스3

2019년 4월 17일 ~ 2019년 5월 18일

타자의 얼굴과 사회적 윤리
이선영(미술평론가)

19회 개인전을 위해 근 몇 년간 만들어진 박미화의 작품들은 분명 작가에게나 관객에게 새로운 작품이면서도 마치 발굴된 유물처럼 오래된 시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다. 거기에는 진주조개가 조금씩 커 나가는듯한 시간의 힘이 있다. 그러한 외양들은 작가가 인간사에 반복되는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 대상이 인간일 때, 이 시간의 흔적들은 상처나 상처가 아무는 시간들, 태어난 존재가 자라고 늙고 종국에는 죽어가는 시간들을 상징하게 된다. 박미화의 작품은 식물, 풍경, 인간 등 오래된 소재를 다루어서도 그렇지만 흙을 빚어 굽는 작업이나 기억이라는 주제에서 시간성이 느껴진다. 겹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대상들은 오래된 사물처럼 재차 반복해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 반면 일상을 채우는 대상인 상품은 즉시 소비자에게 어필해야 한다. 현대는 거듭되는 해석을 요구하는 사물은 몇몇만 남겨서 박물관 같은 곳에 안치해놓고, 즉시 사용되고 버려지는 상품들로 세상을 채워나간다. 

이에 비하면 박미화의 작품은 고풍스럽다. 작가는 고대인들이 점토판 위에 새겨 넣었듯이 타자들이 해석해야 할 무엇을 기록한다. 이전 전시의 키워드 중 하나인 ‘Docu-mentally’는 이번 전시에서도 적용된다. 작가 노트에 썼듯이 ‘...쌓여있던 기억들이 때가 되면 결국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어진 선들과 표면들은 기억을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미지의 과제로 남겨 놓는다. 단순 간결한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뭔가 한 토막씩 모자란 구석이 있는 그것들은 완결된 자족감을 가지지 않아서, 관객은 빠져 있거나 잃어버린 것들을 상상하게 된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성은 불현듯 단층을 드러내며 상상을 촉발시킨다. 거기에는 이야기가 있지만 순차적인 인과성을 가지지 않는다. 바닥에 눕혀 놓거나 벽에 기대어 놓은 것뿐 아니라, 강고하게 서 있는 것들 또한 뭔가 푹 빠져나간다. 

예술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율적이고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미학, 또는 희망 사항이 있어 왔다. 그러나 박미화의 작품은 유아독존을 주장하지 않는다. 입체는 물론 평면 작품 또한 그라운드 제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언제나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그것과의 대화적 관계로 작품을 진행한다. 대화는 길기도 해서 어떤 작품은 작업실 한 켠에 일 년 내내 기대어 두고 재차 시도된다. 대화라는 것이 너무 능동형으로 다가온다면, 바탕에 이미 잠재해 있는 것을 찾아내 현실화한다고 말해두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화에서 굳이 담아서는 안 될 내용은 없다. 자수 설치, 흙 조각, 평면 회화 작업등이 함께 하는 이번 전시는 다른 재료와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 간의 상호보충이 이루어지는 장(場)이다. 얼핏 어눌해 보이는 작품의 어법은 타자가 끼어들 여지를 두기 위한 여지로 다가온다. 전시장 바닥에 누워있는 동물은 사람의 얼굴처럼도 보인다. 자는 듯이 누워있지만, 지상과 닿을 수 없는 네 발목의 부재는 죽음을 떠올린다. 

평면 드로잉 중에는 개의 겨드랑이에서 개를 껴안는 듯한 두 팔이 나온다. 그것은 자신의 분신 같은 반려동물의 죽음과 관련되며, 수년간 작가의 몸과 마음을 가득하게 했을, 살아있는 존재에게 닥치는 운명적 만남과 이별을 표현한다. 조형예술이 말이 없는 형식이기도 하지만, 전시장 한 벽을 가득 차지하는 300여개 넘는 비문들이나 동식물,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는(또는 혼잣말을 하는 듯한) 인물상 등은 모두 침묵의 언어를 구사한다. 물론 작가가 한가하게 선문답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비문이 있는 작품은 세월호를 비롯하여 가정폭력, 회사의 갑질 등으로 희생된 자들, 그리고 실험 대상이 되었던 개 등, 대부분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을 지시한다. 가로 16x19열로 배열된 304개의 비문은 세월호 희생자 수와 일치하지만, 그 사건을 포함하여 지난 100 여 년 간의 역사 속에서 찾은 기록들로, 이름을 알아볼 관객에게 각기 다른 강도로 전달될 비극적 사연들이 깔려있다. 

천위에 수놓아진 누런 비문들은 여러 장소와 시기를 상징하듯, 바랜 정도가 제각각이다. 분필로 벽에 그려져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헌화처럼 천과 실로 된 비문은 그리 단단한 토대를 가지지 않는다. 사연도 각각인 수많은 희생자들은 르네 지라르의 인류학적 가설처럼, 인간 사회의 기원에 가공할 만한 폭력이 있었다는 것, 그 폭력이 집중된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어쨌든 비문들은 그 경악할만한 폭력이 일단 지나갔으며 현재 진행형은 아니지만, 빠져 있는 것과 추가될 것은 얼마든지 많은 ‘열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결코 평화롭지 않다. 식물 또한 비극적 이야기에 동조한다. 회색 전시장 벽면에 하얀 분필로 직접 그린 꽃다발은 헌화를 말한다. 다발로 제시된 꽃들, 때로 말려진 모습으로 푸수수하게 나타나는 식물 또한 뿌리로부터 단절된 상태다. 그러나 인류의 상상계에서 식물은 부활과 재생을 상징하면서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시도를 보여준다. 

분필 벽화는 이 전시의 어떤 대상과 결합하여 해석해도 무난하다. 시멘트 틈 사이로도 자라는 잡초처럼 인공적 환경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것은 방처럼 연출된 공간에 놓인 사물들을 잇는 적절한 맥락을 만들어준다. 가로로 긴 전시장 벽에 걸린 나무판 위의 그림에서 확실한 도상은 풀이다. 인근 공사장 등에서 버려진 합판은 자연물에서 생산품이 된 이후에도 수많은 흔적들을 추가해왔는데, 작가는 그 흔적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풍경을 만들어 나갔다. 작업실 마당 한 켠의 개방된 창고에서 눈비를 맞고 있는 나머지 판넬들도 언젠가 불려 나와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이 작품은 밑그림 없이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흙 작업은 무너지지 말아야한다는 최소한의 물리적 요구가 충족돼야 하므로 계획과 정확한 순서가 중요하지만, 이마저도 회화적 처리를 통해서 우연의 요소를 최대한 품어낸다. 박미화의 작업에서 재료와의 상호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작가 말대로 ‘평면은 흙 작업처럼, 도예는 회화처럼’ 한다. 물감이나 밀가루 같은 느낌을 줄 젖은 흙은 도예가가 아니더라도 여성 작가에게 친숙한 물질이다. 물질은 작가의 계획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살아있는 재료인 흙은 물론이고, 스티로폼이나 합판같이 인공적인 재료도 예외는 없다. 객체를 제멋대로 하려는 주체의 의지야말로 역사상 수많은 폭력을 야기했던 원천 아닌가. 버려진 합판 위의 그림은 자연에 자연을 더한다. 그것은 그 위에서 무엇이 등장하거나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융통성 있는 화면이 된다. 특별하게 처리되지 않은 부분은 여백처럼 보이는 잔잔한 화면에서 들판의 식물 줄기만큼은 바탕을 후벼 파듯이 강하다. 마치 상처와도 같은 깊은 균열이지만 거기에서도 새순이 나고 있다. 그것은 분필로 그려진 벽화 속의 식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강력한 줄기의 선은 자잘한 소리를 뒤덮는 보다 강력한 소리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덮여주는 것이다. 

작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렸던 이전 전시에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준다. 확연한 차이는 이전보다 초록색이 많다는 것이다. 박미화의 최근작에서 비중이 높아진 녹색 식물은 좀 더 희망적이다. 이전 전시를 물들었던 먹먹함은 희망을 향한다. 우리 사회가 그 비극을 제대로 기억하는 한 비극은 희망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보다 오래된 존재로 지구 생태계를 만들어왔던 식물은 여성 친화적이다. 최초의 식량인 숲의 열매를 수집하고 관리해온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신화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 추운 겨울을 이기고 다시 싹을 틔우는 식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활과 재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 덮개]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꽃가루는 시신이 꽃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고 말한다. 

[초록덮개]에 의하면, 빙하기의 원시인들에게 봄은 정신적인 부활이었고, 자연에서 생명과 출산을 담당한 신, 즉 위대한 어머니 여신이자 하늘의 여왕이 신성한 나무로 상징되었다. 신화는 고대인들이 겨울과 긴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 일어나는 자연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려준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식물은 원시시대부터 탄생 및 죽음과 관련되었던 다소간 종교적 분위기의 소재임을 드러낸다. 탄생에는 재탄생 또한 포함된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고대부터의 수목 신앙을 조명하면서 식물은 살아있는 현실,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삶의 표명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우주도 나무처럼 주기적으로 재생된다고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재생은 그때마다 새로운 탄생이며 재생되는 형태가 처음으로 나타난 신화적 시간으로의 회귀이므로 사람들은 우주 창조의 원초적 행위를 반복한다. 재생은 여러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박미화에게 가장 강력한 것은 다시 작업하는 삶의 개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잠재된 상태로 있던 씨앗, 또는 나뭇가지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는 일을 말한다. 작가가 지금 어느 시절보다 가까이 하고 있는 대지와 그것의 환유(換喩)인 흙은 재생의 기운을 간직한 잠재태로 다가온다. 전시장 벽과 바닥에 있는 초록 식물들은 애도와 기억의 공간 속에서 희망의 시간을 암시한다. 혈맥 같은 굵은 선들도 보이는 식물들은 중간에 뚝뚝 잘린 듯한 형태가 더욱 강한 생명력을 표현한다. 무명씨의 식물들은 잡초처럼 왕성하여,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경우 작은 용기(容器)를 벗어나 왕성하게 사지를 뻗는 괴물 같은 모습이다. 동물이나 식물에서 인간이 겹쳐진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다. 바닥에 놓여있거나 서 있는 작품 속 인물들은 죽거나 죽은듯하지만 살아있는 형상들이다. 아이 같은 천진한 필법으로 그려진 얼굴이나 몸 형태는 어린 시절의 낙서장 같다.

그것은 직접적인 언어적 표현보다는 머리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더 많은 상황을 은유한다. 앞뒤로 나이 차이가 보이는 두 얼굴의 여자는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다. 흙 위에 행해진 회화적 처리에서 겹겹의 시간성이 감지되는데, 작가는 한 몸통에 두 얼굴의 공존을 통해 시간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 즉 이야기를 시도한다. 잘린 한쪽 팔 겨드랑이에서 돋는 푸른 날개는 트라우마 이후의 시간을 기약한다. 온전한 팔과 연결되어 있는 끈은 희망일 것이다. 작가는 전시장 어딘가에 그러한 희망의 상징인 별을 가져다 놓았다. 그 끈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르는 바닥의 개는 좀 더 가까이에 있지만, 별은 좀 더 멀리에 있다. 소녀상이나 푸른 식물은 모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던 이전 전시 보다는 젊은 분위기지만, 이번 전시에서도 모성을 상징하는 도상들이 작지만 있다. 그중 하나가 피에타상이다. 오래된 시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는 피에타상의 하단부는 가마에서 폭발한 흔적을 그대로 살렸다.

철망과 철심으로 지지 된 피에타상은 폐허에서 다시 구축되는 듯한 구조로 마감되었다. 한쪽 날개가 뽑힌 채 바닥을 응시하는 어미 새 또한 아이의 상처에 자신도 상처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날지 못하는 새는 취약하고 무거운 존재이다. 옷 모양의 동체는 그 크기도 크거니와 갑옷같이 단단한 모양새로 기념비적인 형상을 이룬다. 그러나 그 안이 텅 비어있어 강함 속의 약함, 또는 약함 속의 강함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여성 또는 모성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가슴이 없는 옷/몸은 아마존의 여전사 같은 모습이면서도 (여자)아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표면의 회화적 처리는 줄줄 흐르는 물감의 흔적을 그대로 살렸는데, 빈 몸통에도 중력을 거슬러 꼿꼿이 서 있는 상의의 끈과는 다른 방향이다. 강함과 약함,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이 이중적 모습은 예술하는 삶 그 자체에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점에서 이 전시의 인물상들은 자소상이라 할만하다. 

오래된 창가 옆의 여인상에서 양팔의 의상이 다른 여인은 작가를 닮았다. 그것은 여성/작가라면 수행하는 두 역할을 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것일까? 한 팔은 화분에 가려져 있고, 다른 한 팔은 푸른 긴 소매에서 나오는 손이 있는 재생의 이미지이다. 재생되는 손은 일상의 삶을 재생산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동과 다른 작업의 의미를 암시한다. 물론 인간의 삶에서 재생산이든 생산이든 어렵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그 둘을 다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 박미화의 작품에는 여성/작가라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두 관계가 녹아 있다. 머리 위에서 식물이 나오는 여인 상반신을 표현한 작품은 스스로를 양분 삼아 자라는 존재, 즉 예술하는 삶의 고통을 사슴의 뿔처럼 내보인다. 수사슴의 뿔이 왕관 같은 것이라면, 박미화의 작품에서 얼굴 위의 ‘뿔’은 희생이나 재생을 은유한다. 씨앗처럼 죽어야 사는(피어나는) 작가로서의 삶은 2015년 강화도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흙 작업은 보기에는 소박해도 만들려면 공간의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늦게 다시 시작한 작업이기 때문에 서울과 강화도를 오가며 작업하는 삶의 여정은 아직도 설렘이 가득하다. 한번 가면 2박 3일, 3박 4일을 머무르는 작업실에서의 일정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가 소중하다. 여기에서는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 및 자신과의 대화만이 있다. 침묵 속 타자와의 대화에는 마치 성(聖)과 속(俗)을 오가는 의례의 행위를 떠오르게 한다. 삶은 작업 또한 노동 못지않은 육체 에너지가 들어가지만, 차이는 미지의 것에 대한 설렘이 아닐까. 나에게서 나온 나 아닌 무엇, 즉 타자적인 것. 나로부터 비롯된 타자적인 것으로 타자들과 소통하는 것. 앞마당에 각종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동네 고양이들이 노니는 누구도 부러워할만한 작업실을 짓게 된 계기는 죽음에 근접한 체험이었다. 차가 완파될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던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하고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마음 한 켠에 미루어뒀던 일을 저질렀다. 죽음의 직시는 삶을 보다 밀도 있게 살아야 함을 촉구한다. 

죽음이라는 그림자는 삶을 더 환하게 비추는 것이다. 근 몇 년 사이의 작품은 작가의 일상적이고 실존적 체험에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낳았던 사회적 사건에 대한 의식이 합쳐진 결과이다.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서 우리 사회 구성원이면 알아볼 수 있는 시사적인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박미화의 작품은 그것들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가라앉힌다. 그런 후에 다시 떠올린다. 기억되는 것만이 표현될 가치가 있다. 작품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작가의 몸을 통과한 것들이다. 소녀부터 중년까지 다양한 나이대로 등장하는 여성은 어딘가 작가를 닮았긴 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얼굴이다. 남성이 아닌 여성 화자(話者)는 전시의 모든 초상들이 작가의 은유임을 암시한다. 여성 작가이기에 여성상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수백년 미술의 역사 속에서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를 물으면서 숨겨진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려 노력한 페미니즘 미술사가들은 여성이 공식적 아카데미에서 누드를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상징, 더 나아가 만물의 척도로 규정되곤 하던 인간이 남성적 주체임을 떠올릴 때 그리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케네드 클락은 [누드의 역사]에서 이성의 상징인 남성누드가 감각적인 여성누드로 방점이 옮아가는 미술의 역사에서 누드의 퇴락을 읽었다. 그러나 여성이든 남성이든 현대의 작가는 누드를 배웠다가도 잊어버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국내외에서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박미화 또한 편향된 기준을 벗어나기 위해 조형의 기본문법을 잊어버린다. 유일한 남성상은 이전 작품에 한 번 나타나는데, 그것도 성인 남성은 아니고 그 근처에 어머니가 함께 있는 남자아이의 상이었다. 작가의 무의식적 선택에서도 메시지는 있다.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의 비유이지만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안의 타자 또는 타자에 감정이입되는 자신이다.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차원의 죽음을 전시의 한 주제로 삼고 있는 작가에게 타자의 얼굴은 영감이 발산/ 수렴하는 지점으로 다가온다. 얼굴은 죽은 듯 누워있는 개부터 고전적인 피에타상까지 아우른다. 전시장 한 면 가득한 비문들은 얼굴을 대신하여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물론 잡초에 비견될 만한 무명씨도 있다.

사회적 차원에 접한 박미화의 작품은 타자에 대한 윤리를 암시하는데, 그 방식은 계몽적이기보다는 심미적, 또는 종교적이다. 그러나 초월적이지는 않고 내재적이다. 그것은 타자의 얼굴로부터 윤리를 암시하는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레비나스의 책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편집자 자크 롤랑은 다른 인간의 얼굴 속에서 나에게 건네지는 질문인 타자의 질문, 이것이 이 책의 한결같은 핵심이라고 정리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윤리는 타인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이다. 타인은 곧장 아무런 보호도 없이 비참한 자로 다가오며 단번에 내게 맡겨진다. 레비나스에게 타인은 무엇보다도 얼굴로 다가온다. 그것은 그 얼굴의 은총 속에서가 아니라 그 살의 벌거벗음과 비참함 속에서 맞아 들여진 타인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을 단순히 육화한 혹은 개별화한 보편적 이성이 아니라, 고유한 얽힘과 단절로 인식하는 것’(레비나스)이다. 즉 타자와 마주한 주체는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 

물론 주체와 타자는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가깝지만 다른 것으로 남아 있어야’(레비나스) 한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의 비대칭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타율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타율성은 소외도 노예화된 또 유일성의 상실도 아닌 달라짐이다. 박미화의 작품이 여러 장르를 아우르면서 설치의 방식을 가지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알맹이인 몸이 빠진 옷의 동체, 날개가 한 짝 뽑힌 새, 한 쌍을 이루지 못하는 사지들, 그리다 만듯한 그림 등은 자족적이지 않다. 그것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들과 보이지 않는 연결망을 이루며 메시지를 발신한다. 박미화의 작품에서 대화는 1대 1의 관계는 아니다. 가령 동물, 식물, 죽은 자들과의 작가는 대등하지 않다. 여기에는 차별이 아닌 차이가 있다. 절대적 차이의 상징일 별 또한 근처에 있다. 한 번에 그어진 선의 형태로 만들어진 별은 자체의 무게감으로 기우뚱하다. 별처럼 초월적일 수 있는 소재를 박미화가 다루는 방식은 흥미롭다. 

그것 역시 돌처럼 보인다. 우리 별 지구처럼 말이다. 박미화의 주재료인 흙은 작가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겠다고 하면서 작업실을 옮겼을 때 더욱 의미 깊은 재료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은 대지의 상징이다. 대지는 만물이 나오기도 하지만 돌아가는 곳이기도 한 양면성을 가진다. 레비나스는 같은 책에서 대지는 원래의 바탕이 되는 곳, 안정된 바탕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매장은 바탕으로의 복귀로 해석되며 대지의 바탕은 존재의 바탕으로 해석된다.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세계로 오고,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세계를 떠난다. 세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세계의 지평에 포섭되어 있다. 해방은 없다.’(레비나스) 박미화의 작품에 등장하는 분열된 얼굴이나 절단된 사지, 그리고 피에타로 대변되는 고통의 정점은 그것들이 굳이 대지의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곧장 삶의 불가분한 짝패인 죽음을 떠올린다. 또한 죽음은 삶의 타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은 죽음 가까이 있는 정조(情操)이다.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인 재난 이후의 작가는 대지와 자연이라는 가장 안정되어 보이는 소재들 또한 낯선 정조로 물들인다.

출처: 아트스페이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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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박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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