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학 : 검은 정원 BLACK GARDEN

갤러리도스

2018년 9월 19일 ~ 2018년 10월 2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기억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영학의 작품 속 흑백의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총천연색으로 이루어진 실제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빠졌지만, 잘 찍힌 흑백사진이 그러하듯이 결핍감은 없다. 오히려 세계는 선택되고 조율된 조형 언어 덕분에 어떤 독특한 질과 분위기를 유지한다. 회화 자체가 일종의 감축이지만, 여기에 가세하는 또 다른 감축은 세계를 또 다른 풍부함으로 되비쳐 준다.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실제의 세계에 추가한다. 그의 풍경은 이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이 향하는 것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대안의 세계다. 현실과 상상은 나뭇가지와 뿌리처럼 역전된 상의 관계를 가지기에, 현실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릴수록 상상은 더 힘차게 뻗어날 것이다. 백보다 더 밝아 보이는 백, 흑보다 더 어두워 보이는 흑은 흑백 사이를 최대한 벌리고 그 사이에서 무한한 무채색의 계열을 펼친다. 그의 작품은 선 또는 면의 대조에 의해 흑백의 영역이 직접 맞대고 있는가 하면, 미세하게 펴 바른 목탄이 수묵화 같은 섬세한 농담의 변화를 구현한다.

장지가 붙어있는 캔버스 위에 돌가루를 여러 번 칠해 견고한 표면을 만든 후에 목탄으로 그어 만든 힘이 있으면서도 유려한 선, 그리고 ‘풍경 너머로’(2010) 전을 비롯한 이전 작업에서 공간 일부를 뒤덮는 숯 조각들은 자연에 투사된 동양적 이상화와 시각적 강렬함에 호소하는 현대적 감각을 중첩시킨다. 박영학의 풍경에는 지금 여기와 다른 저 멀리로 빠져 나가는 정신적 공간이 있는가 하면, 장면들을 눈앞으로 강하게 당겨오는 물질적 실재감이 있다. 대조되는 것들 간의 관계는 지각과 기억이 뒤섞인 방식에서도 발견된다. 이 모든 대조 항들이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 작품의 매력이다. 자연스러움은 종이, 목탄, 숯 같은 자연적인 재료로 자연을 묘사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직접 본 것, 기억한 것, 상상한 것, 배운 것, 실험한 것, 장기간 연구되어 고안된 것 등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박영학의 작품은 인공적 언어이면서도 자연을 닮으려는 예술의 궁극적 지향이 있다.

자연스러움이란 근대의 새로움과 충격의 미학이 지배적이 된 이래 희귀해졌다. 대부분 미술계라는 제도적 장치의 보호를 받고 있는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일상적 삶의 근본적 변화에 큰 도움을 주지 않는 동화되기 힘든 생경함, 즉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 대한 찬가가 너무 오랫동안 반복되지 않았나 반성해 볼 일이다. 박영학은 자연스러움을 위해 현대의 화가들에게 스케치 대용으로 편리하게 사용되는 도구인 카메라의 사용도 자제한다. 기계적으로 길들여진 눈으로 보면 그의 풍경은 원근법도 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진정한 경험이 아닌 사진으로 대체된 경험, 또는 사진만 남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사진으로 찍기 힘든 것들이 있다. 가령 박영학의 작품 속에서 숯으로 꼴라주 된 미묘하게 촉각적인 부분은 둔탁한 평면으로 재현되기 일쑤이다. 사진으로 코드화된 정보들은 컴퓨터 등을 통해 많은 조합을 만들지만, 실재와 유리된 코드들의 유희는 금방 싫증이 나는 진부함을 낳을 뿐이다.

박영학의 작품에서는 단순히 목격한 것이 아니라, 기억의 필터로 걸러진 것만이 살아남는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들이 그의 몸을 통해 출력되는 것이다. 작품 제작에 있어 스케치의 비중은 높고 거의 그 단계에서 90%이상 결정된 후 큰 화면에 옮겨진다. 낱장의 종이는 좀 더 견고한 종이판으로, 연필은 목탄과 숯 등으로 옮아간다. 이러한 이행이 성공적이기에 목탄의 강렬함에는 연필의 섬세함이 내재되어 있다. 2010년부터는 숯을 깨서 화면에 직접 붙이기 시작하면서 농담의 폭은 더욱 커졌다. 특히 풍경의 윗부분에 붙은 숯은 재료와 결합된 짙은 검은색과 은은한 반사면을 통해, 화면의 자율성을 위해 필요한 촉각성, 그리고 세계를 반영하는 환영(가령 밤하늘 같은)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많은 재료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종이와 그 위에 그려지는 연필, 목탄, 숯 같은 재료는 그가 전공했던 한국화의 느낌을 보존한다. 돌가루로 처리한 바탕 면 위에 날렵하게 그어진 선들은 농담이 없지만 수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일획을 중시하는 동양화의 방식이 관철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운 재료로 그린 수묵화를 닮은 풍경화는 관념의 지평선으로 아련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얀 여백을 가르는 간결한 선과 그 사이사이에 나무숲 등으로 자리 잡은 촉각적 부분들은 선택한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살린다. 목탄의 터치의 결을 달리해서 그려진 부분들은 타피스티리 같은 미묘한 질감으로, 보는 것을 넘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뭉글뭉글하거나 뾰족뾰족한 형상으로 등장하는 식물군들은 나무숲의 신선한 기운을 뿜어내는 듯하다. 털실로 짠 뭉개구름 처럼 보이는 식물들 사이의 바위들은 그 무게감을 비워낸다. 풍부한 부피감과 중력에 순응하는 주름만을 남긴 채 그렇게 솟아 있는 바위산들은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유령 같다. 껍데기를 들어 올리면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 면봉으로 비벼서 표현한 부드러운 식물군이 털의 느낌을 준다면, 하얀 봉우리들은 살이나 뼈 같다. 그 내부가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가벼운 느낌을 주는 바위산은 가변성과 연결되어 여러 개가 어울려 마치 자라나거나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반석 같은 사물에 생물체에 비견되는 (잠재적)동감을 부여한다. 길이나 계곡처럼 보이는 지역은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고, 바닥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같은 물길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해 그림에 새로이 추가된 요소인, 거대한 나무처럼 솟아있는 사슴뿔은 작품에 따라서 오른쪽에, 가운데에, 왼쪽에 자리한다. 그 사이사이에도 나무숲이 있기에 뿔은 거대한 나뭇가지나 숲 사이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무나 뿔의 가지들처럼 연상의 사슬은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박영학의 작품은 재료나 소재 면에서 절제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의 상상 역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상상은 흑백의 계열로 제시된 형태(gestalt)의 구조적 동형성에 바탕을 둘 것이다. 청주미술 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올해 전시는 13회째 개인전으로, 첫 개인전을 청주에서 연 작가의 주요 동 선은 청주 외에 진천, 제천, 충주 등, 중부 내륙 지방에 있다. 작가는 그곳들에서 터의 골이 살아있는 야트막한 풍경을 발견했다.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는 밭고랑이 있는 풍경은 실제에서 따온 것이지만 생략된 부분 또한 많았다. 그것은 이후 지각되는 순간부터 걸러지고 편집되는 기억의 풍경을 낳았다. 충청 내륙지방 뿐 아니라 서해와 남해 쪽의 바위산이나 섬도 주요 소재이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에서 지리산과 북한산 계곡의 물줄기를 발견할 수도 있다. 특히 대청호와 충주호가 있는 지역의 풍경은 작가에게 큰 감흥을 준다. 달 밝은 밤에 호숫가 풍경은 명암의 극적인 차이를 연출했을 것이다. 하늘은 칠흙같이 어둡지만 달빛이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풍경은 낮과 밤을 공존시키는 초현실성을 자아냈을 것이다. 계몽의 빛으로 환한 고전주의가 낮의 세계라면, 어슴푸레한 꿈과 환상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는 밤의 세계이다. 그러나 타자가 배제된 각각은 불완전한 반쪽에 불과하다. 어떤 시인이 노래했듯이, 낮에 밤이, 밤에 낮이 지나가도록 해야 한다.

알베르 베갱은 [낭만적 꿈과 영혼]에서 ‘새벽은 한밤의 짙은 어둠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낮의 아름다움은 밤의 어둠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하면서, 진정한 빛이 실존의 밤의 양상들 속에서만 진정한 빛에 도달될 수 있음을 강조한바 있다. 한 화면에 빛과 어둠을 병렬시키는 박영학의 풍경에는 환한 밤 같은 역설적인 시공간이 발견된다. 밤과 낮의 결합의 결합을 꾀하는 상상력을 찬양하는 베갱은 ‘영감은 밤의 충만함과 낮의 명료함을, 무의식의 신비와 의식의 규칙을 결합시킨다’는 헤르더의 싯귀를 인용한다. 셸링은 낮과 밤의 이러한 결합에 달빛에 흠뻑 젖은 이미지를 부여한다. ‘밤 속에서도 빛이 떠오른다면, 밤과 같은 낮과 낮과 같은 밤이 우리 모두를 껴안을 수 있다면, 결국 그것은 모든 욕망의 최고의 목표일 것이다. 그래서 달빛으로 환한 밤은 우리의 영혼을 그토록 신비스럽게 감동 시킨다’(셸링) 박영학의 작품은 언뜻 하얀 눈에 덮인 풍경처럼도 보이지만, 어떤 한 시 공간 대에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현재 기억으로 그리고 있는 풍경의 부분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온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2015년의 개인전 제목은 그냥 풍경이 아니라 ‘풍경너머로’로 정해졌다. 실제의 자연을 많이 찾아다녔지만,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작년부터는 보고 그리지 않았다. 특히 기억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진은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동시에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하므로 가급적 배제한다. 하나의 관념적 시점을 전제하는 원근법도 해체되어 있다. 몸이 자연 속에서 시시각각 움직일 때 원근법은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시점들이 복합되어 있는 박영학의 작품 속 토포스에서 고정된 외눈박이의 시점은 상대화된다. 풍경에 새로이 등장하는 사슴뿔은 십장생의 하나라든가 대지의 기운을 대변한다든가 하는 상징 외에, 가지를 치는 상상력을 표현한다. 시간의 시험을 살아남은 기억은 실제로부터 온 상상의 풍경을 낳는다. 풍경에 이질적인 규모의 사슴 뿔 이미지가 섞여 들면서 더욱 농후해진 이상적인 풍경이다. 현실과 상상을 뒤섞는 유토피아적 풍경들은 지금 여기와는 다른 매혹적인 다른 곳을 시사한다.

욜렌 딜라스-로세리외는 유토피아 사상의 역사를 다룬 [미래의 기억 유토피아]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위치한 완전한 세계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을 소개한 바 있다. 저자는 오늘날 그러한 유토피아는 웹싸이트같은 가상공간 속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는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는 16세기의 [유토피아] 저자 토마스 모어가 처음으로 제시한 원칙, 즉 아무데도 없는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20세기에 이미 일어난 정보혁명을 통한 가상현실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물감이라는 실재와 육감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화가에 의해 구성된 장소와는 차이가 있다. 화가는 추상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자리로 만든다. 강제로(또는 실수로) 지워지기 전에는 데이터가 그대로 남아있는 컴퓨터가 불망(不忘)증 환자라면, 그러한 도구들에 비해 인간은 기억용량이 턱도 없이 적다. 그가 무엇인가를 기억하려면 무엇인가는 망각해야 한다. 흑백의 대조에 의해 더욱 하얗게 보이는 부분들은 무엇인가 지워진 자리일 것이다.

박영학의 풍경에는 무엇이 남아있고 무엇이 사라지는가. 그가 풍경을 위해 여기저기 많이 다녀본 실제의 시골에는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는 굴곡진 자연을 따라 파인 밭고랑이나 길 같은 인간의 흔적만 남겨 놓을 뿐, 인간 자체도 등장시키지 않는다. 거기에는 풍경 속을 이리저리 거닐었을 법한 인간의 육감만이 남아있다. 흔히 동양화의 여백으로 표현되는 비워지거나 지워진 영역, 하이데거가 ‘토대 없는 심연’이라 불렀을 법한 그 영역이 작품의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바닥이 없는 장소들은 연속성을 단절시키지만, 동시에 또 다른 연결의 시작이 된다. 허공이 생성의 자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의 풍경에는 입력된 연산법칙을 따라가야 할 정해진 길이 없다. 길인 줄 알았는데 나무였고, 나무인줄 알았는데 사슴뿔인 그의 길은 미로에 가깝다. 거기에는 분리하면서 연결한다는 역설이 있다. 이처럼 유연하며 열려있는 장소에서 재현이 아닌 생성이 야기된다. 그것은 ‘진정한 시작은 항상 도약’(하이데거)임을 알려준다.

기억은 상당부분 망각에 빚지고 있다.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은 저자 보르헤스가 말하듯이, ‘망각은 기억의 한 형식’이며, ‘동전의 비밀스런 뒷면’이다. 하랄트 바인리히는 [망각의 강 레테]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의식 속에서 문학과 기억은 비슷한 성질이라고 지적한다. 프루스트는 작가에게 실제란 기억 속에서야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된다고 확신한다. 이를테면 꽃은 기억의 대상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꽃이 된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이 기억의 형태는 시간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해주며, 이 기억을 믿고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은 이 기억이 선사하는 행복을 체험한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예술은 망각의 심연에서 솟아나온 회상의 시학이라고 평가된다. 박영학의 풍경(너머)에 자리하는 것은 어느 농부가 대지에 파놓았을 밭고랑, 어떤 물줄기와 길, 어느 순간 보았을 구름과 풀숲 등이다. 기억이지만 재현은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다시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발굴된 것들은 이를 지각하는 관객의 기억과 공명한다. 또는 그들의 기억에 새로이 추가된다.

출처: 갤러리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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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박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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