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빈 개인전 : INSIDE

갤러리가비

2020년 6월 3일 ~ 2020년 6월 27일

심상의 풍경, 그 내면에 존재하다.
최재혁 독립 큐레이터

그런 그림들이 있다. 평범한 듯 묘한 매력을 지닌 그림. 그 매력을 말로 풀어 설명하기 어려운 그림. 그래서 더 세밀한 관찰과 해석을 요구하는 그림. 박효빈 작가의 회화가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단지 일상의 풍경을 담담하게 묘사한 유화 작품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제작과정에 내재된 한국적 기법과 정서, 사물과 풍경을 대하는 작가의 철학을 이해한다면 보이는 것 이면에 존재하는 깊이와 매력을 읽어낼 수 있다.

사생의 풍경
이미지 수집 기술이 좋아진 현재에도 작가는 사생(寫生)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생의 과정은 녹록치 않다.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 감흥이 오는 장소를 직접 찾아다닌다. 날씨를 고려해야 하고 인적을 피해야 한다.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드로잉북에 선묘를 생략하고 곧바로 수채화 과슈로 채색한다. 이후 작업실로 돌아가 스케치를 단서로 기억을 되살려 캔버스에 유화로 새롭게 그린다. 전작 〈thing〉 시리즈는 이러한 과정으로 이탈리아의 돌로미티(Dolomiti)산을 등반하며 사생한 작업이었다. 비록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18세기 조선시대 산수화가들의 방식 그대로다. 당시 화가들도 현장에서 초본을 간략하게 그리고 돌아와 족자, 병풍 등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풍경을 재단하고 화면을 재구성하게 된다. 특히, 겸재 정선은 실경의 재현을 넘어 사의를 중시한 남종화법과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 및 필법을 아울렀다. 박효빈 작가 또한 현장에서의 감동과 주관적 해석을 가미해 캔버스에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수묵화의 주요한 특징은 수정이 불가함에 있다. 색을 쌓아 올리는 전통 유화와는 다르다. 그래서 일필휘지의 필력이 필요하다. 박효빈의 작업에는 대상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보다도 거칠지만 치밀한 붓질이 화면을 채운다. 특히, 초원을 그릴 때 여실히 드러난다. 필요에 따라 적당히 신중하고 적절히 과감하다. 때로는 물감과 테레핀의 비율을 알맞게 조절하여 전체 분위기에 해가 되지 않는 정도의 흘러내림 효과를 주기도 한다. 〈머물다 지워진 기억〉의 노란 꽃 깊숙한 부분의 흘러내림이 회화의 맛을 더한다. 〈혼자 걷는 시간〉에서는 나무기둥을 구성하는 곧은 붓질이 시원하게 떨어졌다. 세 번의 붓질 안에 갈색의 오묘한 변주가 원통형의 무게감을 부여한다. 편안한 풍경화 같지만 작가에게는 긴장과 집중력으로 점철된 화면인 것이다.

존재의 풍경
작가는 어릴 적부터 ‘그리움’의 감정이 많았다 한다. 지나간 시간, 추억, 관계 등 자신의 삶을 둘러싼 사소한 것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과 그리움을 쌓아갔다. 작업은 사물과 풍경을 빗대어 그리움의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통로가 된다. 전작 〈steal-life〉 시리즈는 사물의 외피가 아닌 사물의 ‘존재성’ 그러니까 그 사물을 사용했던 사람, 그것에 깃든 삶의 궤적에 대한 이야기였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는 「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s, 1952)이라는 글에서 사물에 담긴 ‘존재(Being)’를 통해 예술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존재’란 단순히 ‘있다’의 개념을 넘어선다. 반 고흐가 그린 〈한 켤레의 구두〉를 예로 들었는데, 낡고 닳은 구두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 것이 아닌 구두 주인 즉, 농부의 고단하고 힘든 삶의 표현으로 읽을 때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단지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보던 근대 예술문화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 동시대미술에서는 당연한 듯 보이지만, 막상 오늘날의 예술에서도 그 의도와 본질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특히, 박효빈의 회화는 그 ‘존재의 진리’가 지극히 개인적이다. 작가가 그린 장소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여유, 쓸쓸함, 외로움 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다. 파리 유학시절을 비롯해 현재 작업실 주변 등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장소들을 그림으로써, 본인의 일상과 삶의 궤적을 녹여내고 있다. 이번 전시의 신작은 풍경 속에 자신을 포함하기까지 했다. 그런 의미에서 뒷모습을 그린 〈두 세계〉는 상징적이다. 풍경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넘어 그 풍경 안에 나 또한 실존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란 환경, 자연 등과 상호보환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진리의 세계’다. 박효빈이 그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심상(心想)의 풍경은 자신만의 진리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박효빈의 작업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변화 중이다. 초창기에는 물감을 덧바르는 전통적인 유화 기법을 따랐지만 작품을 거듭할수록 물감을 덜어내 회화의 맛을 살리고, 자신만의 강점을 극대화한다. 고민의 양 만큼 기교는 숙련되고 에너지는 응집되었다. 사물과 풍경을 대하는 태도 또한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장소에서 느끼는 감동과 분위기,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과 호흡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냄으로써 ‘존재’에 대한 성찰을 확고히 한다. 이처럼 기법적, 철학적 측면에서 자신의 색채를 찾기 위한 노력, 차분하지만 치열한 과정 속에 박효빈 회화의 매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갤러리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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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박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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