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호 : 본능, 생존을 위한 능력

가창창작스튜디오

2015년 8월 7일 ~ 2015년 8월 19일



내가 비현실적인 것의 현실성

가끔 이런 경우가 있다. 시작 단계부터 이미 완성형의 작업을 가지고 등장하는 예술가 말이다. 방정호가 그렇다. 음악가는 데뷔 앨범이나 리사이틀로, 영화감독은 입봉 작으로, 시인은 등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면, 미술에서 작가의 출발은 첫 개인전일 것이다. 이 작가의 경력은 자발적인 유예를 거치며 이제야 온전한 의미의 첫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벌인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서 완결된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내 말이 무턱대고 뱉는 칭찬은 아니다. 이것은 위험부담을 떠안은 명예다. 형식적인 완성도의 성취가 내용을 보증하지는 못하므로, 작가가 매너리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고전 미학의 기본적인 가정을 따르는 완성미는 동시대 미술에 와서 의미가 옅어져버린 사실도 여기에 한 몫 거든다. 반면에, 내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탁월한 점이 그의 작업 안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작가는 순지와 장지에 선명한 바탕색을 깔고, 그 위에 세밀한 필체로 대상을 그린다. 그가 파고 들어가는 작업은 보통 사람들의 성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집중력이 필요하다. 붓이 아닌 펜으로 그려도 될 도상인데 사서 고생하는 인상마저 든다. 음, 다 이유가 있겠지. 여기에 관한 작가의 견해를 물어본다는 걸 나는 잊었다. 만약 붓을 고집하는 이유가 한국화가로서 자신의 이력을 증명하는 방법이라면 나는 그 선택에 관해 실망할 것이다. 쉽게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묵과 잉크가 남긴 질감은 서로 다르며, 붓으로 찍은 수묵은 예컨대 번짐 효과 같은 결과가 아련함 내지 은근함을 이끌어낼 여지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 이 같은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몽환적인 현상이 아닌 현실적인 상황이 그림을 채운다. 이 그림은 흡사 지옥도처럼 펼쳐진다.

지금껏 그가 그린 많은 회화 작품들 속에는 약육강식의 살벌함이 깃들어있다. 생김새부터 사납게 생긴 동물(에다가 식충식물까지 추가)들은 자기보다 작은 동물들을 삼키기 위해 눈을 번뜩이고, 아가리를 벌린다. 그런데 포식자로부터 벗어나려는 먹잇감들조차 가련하게 묘사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중요하다. 흔히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각각 악과 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방정호의 미적 세계 안에서 그와 같은 전형성은 없다. 모든 유기체의 습성과 형태는 오직 자기 생존을 위한 방식으로 진화되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따라서 존재 자체가 다른 존재에게는 폐를 끼치는 이기적인 본성을 지니는 건 당연하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현상이 항상 추악한 외양을 가지는 건 아니다. 희소자원을 두고 벌이는 쟁탈전은 전쟁터에서도, 스포츠 시합에서도, 정치판에서도 미적인 순간을 현현시킨다. 방정호는 그 순간을 자신의 작품에서 상징적인 상황으로 재현한다. 이런 비정함조차, 그 속에 존재하는 위협이나 분노 혹은 속임수도 겉으로 충분히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대왕 문어다. 연체류 가운데에서 가장 진화한 동물, 어린 아이 세 살 수준에 맞먹는 지능을 가진 이 동물은 어떤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는 불길함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림에는 느릿느릿한 불안이 드리워져 있다. 그 움직임은 권태롭지만 예민하고, 무심하지만 관능적이다. 또한 그것은 익살스럽게 비춰지지만 전체를 보아서는 침묵에 쌓여있다. 여러 개의 다리는 머리와는 상관없는 그것들만의 의지로 탐욕스럽게 먹잇감을 휘감고 흡인하는 모양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드러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역설이 확인되는 장면은 예술가의 시각이 아니라면 신화 속 리바이어던(leviathan)이나 거대 문어의 상상도감보다 재미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림 속에 숨겨진 문맥을 모르기 때문에, 작가가 자기 고백을 발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작품이 품은 메타포를 완전히 알 수 없다. 언젠가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작품은 그것이 가지고 있던 빛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방정호의 작품은 자신이 침묵하는 말과 공모자 관계일 수밖에 없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짐작하는 이 작업의 주제는 상징 동물들에 빗댄 인간의 본성이 진선미의 딱딱한 이분법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을 거짓으로부터 가려내고, 착함을 못됨으로부터 구하고, 아름다움을 못남과 구분 지으려는 인식은 위선이 아닐까. 작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출발 단계로부터 세계를 다시 배치(display)하는 일에 집착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앞으로도 다른 표현 방법을 작업에 끌어들일 일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잘하는 일이 있으며 그것을 숙련하는 게 바람직하긴 하다. 그는 예컨대 설치 미술과 같은 형식 실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면서, 평면 회화나 미디어 아트 속에 논쟁적인 내용으로 대리보충하려 한다. 이런 사실은 일견 두 개의 주제가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평면 연작과 애니메이션 <Products>의 대비를 설명한다. 


비현실적일 만큼 극단적인 묘사는 거꾸로 현실을 직시하는 단초가 된다. 우리가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역설에 가까운 본질을 깨달았더라도, 그것을 교훈 삼을 필요는 없다.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Flying Dutchman)처럼 언제까지든 고통 받을 사람은 작가 본인 한 명이면 충분하다. 작가가 삶의 희로애락으로부터 잔혹한 면모를 뽑아낼수록,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순진무구한 사람들에게 본인의 죄악을 정화 받았다는 거짓 위안을 선물한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 예술사회학)


출처 - 가창창작스튜디오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방정호

현재 진행중인 전시

이희경 개인전: 바람의 속삭임 Lee Heekyung: Desir Angin
이희경 개인전: 바람의 속삭임 Lee Heekyung: Desir Angin

2025년 11월 29일 ~ 2026년 1월 10일

영원의 사상(事象)을 통역하는 예술
영원의 사상(事象)을 통역하는 예술

2025년 11월 14일 ~ 2026년 1월 25일

이민재 개인전: Doppel-Lumpen
이민재 개인전: Doppel-Lumpen

2025년 12월 5일 ~ 2025년 12월 21일

2025 부산현대미술관 플랫폼: 나의 집이 나
2025 부산현대미술관 플랫폼: 나의 집이 나

2025년 11월 29일 ~ 2026년 3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