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함과 흐릿함 사이
글 손지영
나는 오래전부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 오랜 질문을 산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어간다. 낮에는 웅장한 입체로 다가오지만, 밤이 되면 검은 평면처럼 보이는 산의 모습은 우리가 대상을 얼마나 조건적이고 가변적으로 바라보는지를 드러낸다. 최근 가까운 것은 흐릿하고 멀리 있는 것은 선명하게 보이는 원시(遠視) 현상을 겪게 되면서 이번 전시의 주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흐릿함과 선명함이 뒤바뀌는 그 경험이, 내가 바라보는 방식 전체를 다시 묻게 만든다.
_입체에서 평면으로
산은 언제나 묵직하게 제자리에 있다. 쉽게 흔들리고 변화하는 나와 달리, 변하지 않는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요즘은 집 근처의 작은 야산을 오르내리며 산과 마주하는데, 이 일상적인 시간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고 동시에 산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한다. 2022년 산에 둘러싸인 창작센터에 머물며 처음으로 산을 본격적으로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낮에는 입체로 다가오던 산이 해가 지며 검은 평면으로 변해가는 순간은 특별했고, 그 장면을 검푸른 회화로 표현하게 되었다. 밤의 산을 평면으로 그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입체가 줄 수 없는 2차원의 평평함 속에서 여러 겹의 물감을 쌓아 올려 깊이를 만드는 방식이다. 평면은 오히려 밤의 깊음과 공명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오래 관심을 가져온 내게, <검은 산>은 자연스러운 결과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_시각에서 촉각으로
밤이 되어 입체가 평면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은 단순히 눈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것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깊음과 공명에 가까웠다. 이를 회화에서는 물감의 층을 쌓아 평면 속에 깊이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동시에,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감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그 깊음을 시각에서 촉각적 경험으로 확장해보고자 했다. 스펀지는 흡수하는 재료로, 단단함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산의 이미지를 가볍고 말랑한 물질로 변주한다. 시각에서 촉각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이자, 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_재료로 산을 바꾸다
재료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스며드는 산><고인 산>의 재료인 스펀지는 물과 소리, 충격을 흡수하는 재료로 밤의 산이 지닌 깊음과 공명을 잘 담아낼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한다. 가장 높고 단단한 산 에베레스트를 스펀지로 제작함으로써 ‘산’이라는 인식에 균열을 내보았다. <쪼갠 돌>은 수락산에서 채집한 돌을 본떠 만든 조각으로 마치 실제 돌과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비누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산을 소멸 가능한 물질로 바꿔, 산의 이미지를 다시 묻게 한다.
이번 전시는 멀리와 가까이, 명확함과 흐릿함, 가상과 현실, 입체와 평면, 시각과 촉각 사이를 오가며 ‘보는 방식의 전환’을 경험하도록 기획되었다. 관람자는 낯선 풍경과 익숙한 풍경을 넘나들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일상의 감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작가: 손지영
기획: 이층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