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짐과 사라짐, 그 찰나의 긴장
안소연 (미술비평)
펼쳐놓은 그의 그림은 거친 벽들로 꽉 차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장소를 쳐다보는 시선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벽 위로 떨어진다. 무언가 있다 없어진 흔적들이 현재의 순간을 손 쓸 수 없는 허무함에 몰아넣는다. 마침, 벽에 걸린 옷을 뒤집어쓴 채 서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도 무언가가 남기고 간 허무한 흔적처럼 벽에 붙어버렸다. 안지산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떨어져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떨어지다”와 “사라지다” 같은 단어는, 앞서 <Pause & Gesture>(2015-16) 연작에서 중요한 참조점이 됐던 바스 얀 아델(Bas Jan Ader)의 작업에 기인한다. 안지산은 1970년대 개념적 퍼포먼스 작업을 하던 중 홀연히 바다로 사라진 아델의 행위를 떠올리며, 그 두 개의 단어가 파생시키는 일련의 상황들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fly-er》다. 제자리에서 떨어져 사라진 존재들, 그리고 그것이 남긴 부재의 흔적들, 그때 감지되는 원초적 상실과 불안에 대해, 안지산은 《fly-er》에서 그 붙잡아 둘 수 없는 형태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벽과 추락하는 존재들
두 개의 벽이 있다. 그가 그린 두 개의 벽 중 하나에는 반쯤 찢겨나간 종이가 뒤집힌 채 간신히 매달려 있고, 또 다른 벽에는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아두었던 색색의 테이프만 어지럽게 붙어있다. <레퍼런스, 레퍼런스>(2016)와 <전단지>(2016)에서는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는 임의의 형태들에 대한 암시가 뚜렷하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밝혔듯, “떨어지다”라는 동사가 이번 전시에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고 “떨어지는 형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으로 작가는 전단지에 주목했다. 이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레퍼런스는 아델의 <Falling> 연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남긴 퍼포먼스 영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아델에게도 매우 중요한 화두였다. 아델은 자신의 신체가 지붕이나 강둑에서 갑자기 추락하는 퍼포먼스를 수행하면서, “중력”에 의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리적 상황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밝힌 적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중력에 반응하는 신체의 운동형태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와 결정론(determinism)에 관한 철학적 탐구에 몰두했다.
안지산은 아델이 영상으로 기록한 일련의 신체적 행위를 그림의 소재로 삼아, 오랜 시간 회화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이어왔다. 예컨대 <Pause & Gesture> 연작 중 아델의 영상작업 <I’m too sad to tell you 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프다>(1971)에서 두 장면을 포착해 그린 <27초67>(2015)과 <43초90>(2015)은, “실제의 대상을 그리는 행위”로써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행위 사이의 인과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를 보여준다. 아델이 중력에 반응해 휘청거리다가 그 긴장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허무하게 추락해버린 것처럼, 안지산은 실제 물리적인 상황에서 전개되는 신체 행위의 인과성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상과 관계하며 그림 그리는 자신의 행위와 나란히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아델의 영상작업을 안지산은 회화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이번 개인전 《fly-er》에서는, 아델의 작업에서 비롯된 “떨어지다”와 “사라지다”라는 단어가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넘어 작가가 처한 매우 현실적인 장소에서 다뤄졌다는 게 눈에 띤다. 사실 아델의 작업 역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리적 힘의 작용을 자신의 집과 같이 일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왜소한 신체를 이용해 실험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안지산이 작가연구에 좀 더 집중했던 <Pause & Gesture> 연작을 거쳐 현실의 장소에 대한 회화적 접근을 시도하며 동일한 사유를 확장해 가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행보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련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아델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 안지산의 그림에는 구체적인 장소가 드러나진 않지만 일상의 세계에서 끌어온 텅 빈 벽과 추락하는 실체들이 등장한다. 그가 내내 검증해 왔던 회화의 실제 대상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모두 현실에서 목격한 실제의 풍경이 맞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전단지>와 <레퍼런스, 레퍼런스>의 구조는 <개인교습>(2016), <가는 길>(2016), <볼링공>(2016), <두 번째 숨바꼭질>(2016)로 이어진다.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벽의 형태들에는 무언가를 간신히 매달아둘 효력마저 상실한 듯 무력함이 짙게 묻어있다. 사실 그의 그림에서 화면 전체를 가로막고 서있는 텅 빈 벽들은, 살짝 치우친 구조와 그 폐쇄적인 부재의 표상 탓에 심리적 불안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때 안지산은 중력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여 마침내 모든 것이 제 위치에서 떨어져 사라질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현실의 장소로 다시 벽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불완전한 간이벽 위로 수없이 붙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전단지의 흔적들,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에 서서히 뜯겨나간 낡은 벽지 등은 현실의 어떤 힘에 맞서 실존했던 형태들이 일제히 붕괴하며 추락했던 바로 그 찰나를 기억한다. 때문에 언뜻 허무하기 이를 데 없이 무력해 보이는 이 벽들은, 역설적이게도 매달려 있던 존재의 위상을 강하게 위협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관한 실존적인 물음을 재차 환기시킨다.
어딘가에 있는, 사라진 것들의 항해
폐허처럼 불길한 <반지하>(2016) 역시 무언가 선명하게 있다가 없어진 장소임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건물의 내벽 위로 검고 두꺼운 얼룩마저 내려앉았다. 이 장소에 바짝 밀착되어 있던 생의 순간들이 일제히 침몰이라도 해버린 듯, 폐쇄된 텅 빈 공간은 사라진 것들이 남겨놓은 나태하고 허무한 흔적들로 가득하다. 안지산은 그것을 굳이 말하자면 “낙서”라 했고 다시 말하겠지만 그것을 그림 그리는 자신의 행위에 빗대기도 했다. 아무튼 일종의 무대 같은 이 상황은, 아델이 퍼포먼스를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떠났다가 한 사람의 목격자도 없이 영영 사라져버린 침몰의 순간과 맞닿는다. 아델의 마지막 작업이 되어 버린 그 퍼포먼스는 결과가 매우 비극적이면서 또한 낭만적이기까지 해, 그 경험을 공유하는데 있어 현실과 현실 바깥의 경계가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로써 아델의 <Falling> 연작에서 비롯된 안지산의 회화적 고민은, 이번 전시를 통해 현실에서 비현실적으로 경험되는 “부재의-실존적-장소”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아감벤의 표현을 빌려 에둘러 말하자면 “비현실적인 것의 차원”에 대한 심오한 탐색일 테고, 아델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떠올리면 현실 어딘가에 있는 죽음의 장소-“Death is elsewhere”-를 항해하는 작가의 태도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봤을 때, 힘없는 먼지 더미를 딛고 쉽게 닿지 않는 벽에 사라질 낙서를 남기려는 어린아이의 몸짓이 가파른 지붕이나 나무에 매달려 허무하게 추락해버린 아델의 비/현실적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거다. 매달려 있음으로써 삶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스스로의 실존을 증명해 보이지만 또다시 어딘가 비현실적인 것의 차원으로 추락하게 될 전단지 조각들처럼, 안지산은 현실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나 유실된 존재들에 대한 깊은 상념과 보이지 않는 멜랑콜리아의 낯선 실체에 다가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 <화가의 부엌>(2016) 또한 그렇다. 전단지를 붙였다 뗀 흔적으로 잔뜩 뒤덮인 현실의 가벽들처럼, 혹은 폐쇄된 반지하를 답답하게 채우고 있는 부재의 흔적들처럼, 화가의 부엌은 그림 그리는 행위가 남겨놓은 허무한 흔적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물감 자국과 버려진 그림들로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화가의 부엌은, 역설적이게도 현실과 조금 빗겨선 채 어딘가로 항해 중인 화가의 실존을 말해준다. 안지산은 자신의 손과 발에 물감을 잔뜩 바르고 그것을 닦아내는 강박적인 행위에 몰입해, 그 실존하는 대상을 직접 그림으로 기록하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때 그가 말한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사라진/사라질 것의 형태를 붙잡아 표현하려는 의지와 동시에 그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화가의 부엌>은 화가인 그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것의 차원을 탐색하는 실제의 장소이면서, 스스로 떨어져 사라짐을 택한 한 작가의 끝나지 않은 항해와 견줄 만큼 추상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안지산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떨어지다”라는 단어만 두고 봤을 때 하나의 단어로부터 확장될 수 있는 현실의 수많은 상황들과 그 구체적인 형태들에 대한 접근 가능성까지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발끝으로 서다>(2016)에서 그러한 작가의 태도를 짐작해 본다. 의자 위에 발끝으로 서있는 위태로운 상황은, 단지 한 사람의 추락을 예고하는 형태로만 머무르지 않고 크고 작은 추락의 순간 예기치 않게 되살아나는 현실에서의 긴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아델로부터 안지산으로 이어진 사유에서, 실존을 경험하는 “떨어짐”의 순간과 비현실적인 차원으로의 “사라짐”은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곤 한다. 눈앞에서 가라앉고 있는 배를 모두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fly-er》에서 작가가 풀어 놓은 추락하는 형태들과 부재의 장소들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장면들을 실제보다 더욱 강렬하게 불러낸다.
*Alexander Dumbadze, Bas Jan Ader-Death is elsewhere,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3.

오프닝: 8월 5일 금요일 6시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2016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 전시입니다.
출처 - 합정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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