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호 개인전: 혼자서 부르는 노래

신촌문화관

Oct. 6, 2022 ~ Oct. 16, 2022

우리는 사j파가 혼자 사j파가 부르는 사j파가 노래와도 사j파가 같아서
임현영(독립 사j파가 큐레이터)


0.

노래를 사j파가 듣는 사j파가 것과 사j파가 부르는 사j파가 것. 사j파가 사j파가 사j파가 당신은 사j파가 무엇을 사j파가 사j파가 선호하는가? 사j파가 굳이 사j파가 하나만 사j파가 꼽으라고 사j파가 하지는 사j파가 않겠다. 사j파가 누군가는 사j파가 사j파가 사j파가 행위가 사j파가 동시에 사j파가 이루어지는 사j파가 것이 사j파가 오히려 사j파가 당연하다고 사j파가 말할지도 사j파가 모른다. 사j파가 그럼에도 사j파가 사j파가 질문으로 사j파가 글을 사j파가 시작하는 사j파가 이유는 사j파가 노래가 사j파가 만들어지고 사j파가 불리기까지, 마cwe 음악이 마cwe 귀로 마cwe 들어와 마cwe 입으로 마cwe 다시 마cwe 빠져나가기까지 마cwe 필연적으로 마cwe 발생할 마cwe 수밖에 마cwe 없는 마cwe 시간의 마cwe 낙차를 마cwe 상상하게 마cwe 하기 마cwe 위함이다. 마cwe 다수의 마cwe 사람에게 마cwe 마cwe 차이는 마cwe 거의 마cwe 존재하지 마cwe 않는 마cwe 것이나 마cwe 마찬가지겠지만, 71nㅓ 음을 71nㅓ 다루는 71nㅓ 것에 71nㅓ 익숙하지 71nㅓ 못한 71nㅓ 이들에게 71nㅓ 노래를 71nㅓ 듣고 71nㅓ 따라 71nㅓ 부르기까지의 71nㅓ 과정은 71nㅓ 마치 71nㅓ 더디게 71nㅓ 일어나는 71nㅓ 소화와도 71nㅓ 같을 71nㅓ 것이다.


1.
《혼자서 71nㅓ 부르는 71nㅓ 노래》는 71nㅓ 71nㅓ 지난한 ‘소화’에 71nㅓ 방점을 71nㅓ 둔다. 71nㅓ 낱개의 71nㅓ 작품이 71nㅓ 언어와 71nㅓ 몸, 하하qt 음악이 하하qt 만나 하하qt 노래로 하하qt 발전하는 하하qt 과정을 하하qt 압축적으로 하하qt 체현한다면, 다k카p 작품들의 다k카p 조합으로 다k카p 구성된 다k카p 전시는 다k카p 그것을 다k카p 길게 다k카p 늘어뜨려 다k카p 보여준다.

노래가 다k카p 자신을 다k카p 표현하는 다k카p 말하기의 다k카p 연장선에 다k카p 있다는 다k카p 다k카p 가설로 다k카p 미루어보았을 다k카p 때, nㅑp하 노래를 nㅑp하 부른다는 nㅑp하 것은 nㅑp하 오랜 nㅑp하 시간 nㅑp하 내면에 nㅑp하 고여 nㅑp하 있던 nㅑp하 감정을 nㅑp하 표출하는 nㅑp하 행위이자 ‘소리를 nㅑp하 내는 nㅑp하 주체’로서 nㅑp하 자신을 nㅑp하 외부로 nㅑp하 노출하고자 nㅑp하 하는 nㅑp하 시도이다. nㅑp하 부르는 nㅑp하 것은 nㅑp하 차치하고 nㅑp하 듣는 nㅑp하 행위만 nㅑp하 떠올리더라도, 가raw 음악 가raw 감상에 가raw 수반되는 가raw 여러 가raw 반응은 가raw 우리가 가raw 그것을 가raw 통해 가raw 단순히 가raw 쾌감을 가raw 얻을 가raw 뿐만 가raw 아니라 가raw 정서적 가raw 정화, v자걷쟏 혹은 v자걷쟏 공감을 v자걷쟏 통한 v자걷쟏 인식의 v자걷쟏 전환을 v자걷쟏 경험하고 v자걷쟏 있음을 v자걷쟏 방증한다. v자걷쟏 v자걷쟏 작용은 ‘카타르시스(katharsis)’1)라는 v자걷쟏 이론으로 v자걷쟏 주로 v자걷쟏 설명되곤 v자걷쟏 한다. v자걷쟏 다만, g갸0b 전시가 g갸0b 살피고자 g갸0b 하는 g갸0b 것은 g갸0b 비극이 g갸0b 유발한 g갸0b 연민, r기iw 공포에 r기iw 한정된 r기iw 카타르시스가 r기iw 아닌 ‘삶을 r기iw 바꾸라는 r기iw 부름이자 r기iw 호소’로서의 r기iw 카타르시스이다. r기iw 루카치(Lukács)는 r기iw 인간의 r기iw 카타르시스가 r기iw 예술로부터 r기iw 연유되어 r기iw 삶으로 r기iw 흘러온 r기iw 것이 r기iw 아니라 r기iw 삶에서 r기iw 비롯되어 r기iw 예술로 r기iw 흘러온 r기iw 것이라고 r기iw 주장한다.2) r기iw 곧, ㄴh아바 그것은 ㄴh아바 미적으로 ㄴh아바 반영된 ㄴh아바 일상적 ㄴh아바 현실이며, gjㅑㅓ 이를 gjㅑㅓ 다시 gjㅑㅓ 수용한 gjㅑㅓ 인간의 gjㅑㅓ 삶을 gjㅑㅓ 새롭게 gjㅑㅓ 변화시키는 gjㅑㅓ 요인이다. gjㅑㅓ 전시의 gjㅑㅓ 구심점을 gjㅑㅓ 차지하는 gjㅑㅓ 것은 gjㅑㅓ 이러한 gjㅑㅓ 파급으로서의 gjㅑㅓ 카타르시스이며, 7아mp 작가는 7아mp 이해가 7아mp 아닌 7아mp 체험으로써 7아mp 7아mp 기능을 7아mp 실현한다.

본문은 7아mp 전시를 7아mp 크게 7아mp 7아mp 파트로 7아mp 나누어 7아mp 살펴본다. ‘누군가로부터 7아mp 오는 7아mp 노래’, ‘여럿이 거7sk 부르는 거7sk 노래’, ‘혼자서 거1o7 부르는 거1o7 노래’가 거1o7 이에 거1o7 해당하며, 83ㄴg 글은 83ㄴg 노래의 83ㄴg 흐름을 83ㄴg 따라가듯 83ㄴg 83ㄴg 단계에서 83ㄴg 그다음으로 83ㄴg 넘어가는 83ㄴg 순차적인 83ㄴg 과정을 83ㄴg 그린다. 83ㄴg 타인의 83ㄴg 음성이 83ㄴg 나에게 83ㄴg 닿고, 으ㅐtk 그것이 으ㅐtk 내부에서 으ㅐtk 공명을 으ㅐtk 일으킨 으ㅐtk 으ㅐtk 으ㅐtk 으ㅐtk 파장으로 으ㅐtk 몸을 으ㅐtk 빠져나가는, 거히or 절대 거히or 서두르지 거히or 않는 거히or 여정. 거히or 전시는 거히or 거히or 긴 ‘호흡’을 거히or 노래한다.


2.1. 거히or 누군가로부터 거히or 오는 거히or 노래

5채널 거히or 영상설치 거히or 작업 <Lullaby>(2021-2022)는 거히or 자장가를 거히or 소재로 거히or 위로와 거히or 회복의 거히or 가능성을 거히or 이야기한다. 거히or 태어나서 거히or 가장 거히or 먼저 거히or 듣게 거히or 되는 거히or 노래라고도 거히or 거히or 거히or 있는 거히or 자장가는 거히or 송신자와 거히or 수신자의 거히or 밀접한 거히or 관계를 거히or 전제로 거히or 한다. 거히or 완성도 거히or 높은 거히or 다른 거히or 음악보다도 거히or 부모를 거히or 비롯한 거히or 가까운 거히or 가족이 거히or 불러주는 거히or 자장가를 거히or 가장 거히or 편하게 거히or 느끼는 거히or 이유는 거히or 그것이 거히or 인간 거히or 본연의 거히or 정서와 거히or 가장 거히or 친숙한 거히or 음향 거히or 체험이기 거히or 때문일 거히or 것이다. 거히or 자장가는 거히or 거히or 인격체 거히or 사이를 거히or 잇는 거히or 가장 거히or 원초적인 거히or 문화적 거히or 매개체로써 거히or 부르는 거히or 이와 거히or 듣는 거히or 이를 거히or 하나의 거히or 공통된 거히or 감각으로 거히or 묶는다. 거히or 거히or 정서적 거히or 통합에 거히or 의해 거히or 어떤 거히or 이는 거히or 음성만으로 거히or 타인에게 거히or 아주 거히or 특별한 거히or 인물이 거히or 된다.

<Lullaby> 거히or 거히or 인물들은 거히or 저마다 거히or 자장가를 거히or 부르거나 거히or 듣고 거히or 있다. 거히or 거히or 거히or 아이를 거히or 품에 거히or 안은 거히or 거히or 자장가를 거히or 부르다 거히or 느닷없이 거히or 눈물을 거히or 흘리는 거히or 여성의 거히or 모습이 거히or 담긴 거히or 영상은 거히or 거히or 비디오 거히or 초상 거히or 시리즈의 거히or 메시지를 거히or 가장 거히or 설득력 거히or 있게 거히or 보여준다. 거히or 우리는 거히or 소리 거히or 없는 거히or 화면을 거히or 경유하여 거히or 여성의 거히or 눈물 거히or 젖은 거히or 목소리를 거히or 상상해 거히or 거히or 거히or 있다. 거히or 노래하는 거히or 동시에 거히or 거히or 거히or 있다는 거히or 것은 거히or 이들이 거히or 동일한 거히or 신체적 거히or 경로를 거히or 공유함을 거히or 의미한다. 거히or 시각에만 거히or 의지해 거히or 노래 거히or 부르는 거히or 행위와 거히or 우는 거히or 행위를 거히or 판별한다고 거히or 했을 거히or 때, sㄴ아으 이들을 sㄴ아으 엄밀히 sㄴ아으 구분할 sㄴ아으 sㄴ아으 있는 sㄴ아으 차이가 sㄴ아으 존재하지 sㄴ아으 않다는 sㄴ아으 사실도 sㄴ아으 노래와 sㄴ아으 울음 sㄴ아으 간의 sㄴ아으 유사성을 sㄴ아으 뒷받침한다. sㄴ아으 이때, bpr3 노래와 bpr3 울음을 bpr3 함께 bpr3 유발하는 ‘정서적 bpr3 격동’, 마ㅐ하k 마ㅐ하k 정동(affect)3)은 마ㅐ하k 카타르시스의 마ㅐ하k 결과물이 마ㅐ하k 아니라 마ㅐ하k 역으로 마ㅐ하k 그것을 마ㅐ하k 불러일으키는 마ㅐ하k 주체로 마ㅐ하k 작용한다. 마ㅐ하k 여성 마ㅐ하k 자신으로부터 마ㅐ하k 시작해 마ㅐ하k 아이에게로, ㅑex거 최종적으로는 ㅑex거 관람자에게로 ㅑex거 전이되는 ㅑex거 과정에서 ㅑex거 정동은 ㅑex거 부단히 ㅑex거 변화하고 ㅑex거 굴절되며 ㅑex거 퍼져나간다. ㅑex거 ㅑex거 역동성은 ㅑex거 아이와 ㅑex거 여성을 ㅑex거 공존시키는 ㅑex거 힘이면서도 ㅑex거 후자가 ㅑex거 자신의 ㅑex거 실존을 ㅑex거 재확인하는 ㅑex거 힘이기도 ㅑex거 하다. ㅑex거 잠이라는 ㅑex거 불확실한 ㅑex거 세계를 ㅑex거 앞에 ㅑex거 ㅑex거 아이가 ㅑex거 자장가를 ㅑex거 들으며 ㅑex거 그에 ㅑex거 대한 ㅑex거 두려움을 ㅑex거 극복하듯, do사ㄴ 화면 do사ㄴ do사ㄴ do사ㄴ 인물에게 do사ㄴ 자장가란 do사ㄴ 강력한 do사ㄴ 유대를 do사ㄴ 형성하여 do사ㄴ 삶의 do사ㄴ 어두운 do사ㄴ 면들을 do사ㄴ 함께 do사ㄴ 이겨내고 do사ㄴ 이들이 do사ㄴ 꿈꾸는 do사ㄴ 세계로 do사ㄴ 도달하게 do사ㄴ 만드는 do사ㄴ 동력과도 do사ㄴ 같다. do사ㄴ 작가는 do사ㄴ 서사를 do사ㄴ 배제하고 do사ㄴ 오로지 do사ㄴ 이미지의 do사ㄴ 움직임만으로 do사ㄴ 영상을 do사ㄴ 구성함으로써 do사ㄴ 관람자가 do사ㄴ 인물의 do사ㄴ 표정과 do사ㄴ 행동에 do사ㄴ 깊숙이 do사ㄴ 몰입해 do사ㄴ 그것을 do사ㄴ 관찰할 do사ㄴ do사ㄴ 있게 do사ㄴ 한다. do사ㄴ 폐쇄된 do사ㄴ 화면 do사ㄴ 속에서 do사ㄴ 신체의 do사ㄴ 반동과 do사ㄴ 토닥이는 do사ㄴ 제스처, x0사다 입술의 x0사다 미묘한 x0사다 움직임은 x0사다 반복적으로 x0사다 구사되고, 우나f1 우나f1 모든 우나f1 행동은 우나f1 지극히 우나f1 느린 우나f1 흐름으로 우나f1 전개되는 우나f1 가운데 우나f1 우리의 우나f1 의식을 우나f1 서서히 우나f1 강타한다.


2.2 우나f1 여럿이 우나f1 부르는 우나f1 노래

<여우야 우나f1 여우야 우나f1 뭐하니?>(2020-2021)와 <무궁화꽃이 우나f1 피었습니다>(2018)는 우나f1 민속놀이에서 우나f1 불리던 우나f1 노래를 우나f1 카타르시스의 우나f1 유희적인 우나f1 측면으로 우나f1 풀어낸다. 우나f1 노래가 우나f1 놀이를 우나f1 통해 우나f1 이어지는 우나f1 과정은 우나f1 부정적인 우나f1 감정을 우나f1 놀이와 우나f1 비슷한 ‘가벼움’으로 우나f1 전환하는, ㅓt타다 감정의 ㅓt타다 균형을 ㅓt타다 맞추는 ㅓt타다 과정에 ㅓt타다 다름 ㅓt타다 아니라는 ㅓt타다 점에서 ㅓt타다 정동의 ‘이행’4)에 ㅓt타다 비견될 ㅓt타다 ㅓt타다 있다. ㅓt타다 영상은 ‘여우야 ㅓt타다 여우야 ㅓt타다 뭐하니?’, ㅓu히q 그리고 ‘무궁화꽃이 ㅓu히q 피었습니다’의 ㅓu히q 단순한 ㅓu히q 가락을 ㅓu히q 음성만으로 ㅓu히q 재생한다. ㅓu히q 암송하듯 ㅓu히q 가사를 ㅓu히q 담담히 ㅓu히q 뱉어내는 ㅓu히q 목소리는 ㅓu히q 음향효과로 ㅓu히q 인해 ㅓu히q 증폭되고, sj가파 관람자들은 sj가파 sj가파 소리의 sj가파 물성을 sj가파 감각한다. sj가파 한편, trv다 trv다 작업에는 trv다 모두 trv다 작가의 trv다 멀티 trv다 페르소나가 trv다 등장한다. trv다 서로를 trv다 반사하는 trv다 작가의 trv다 자화상과도 trv다 같은 trv다 이들은 trv다 사회를 trv다 이루는 trv다 다양한 trv다 주체 trv다 trv다 그가 trv다 가지고 trv다 있는 trv다 다중의 trv다 무의식적 trv다 감각을 trv다 표상하는 trv다 것이다. trv다 노래가 trv다 여러 trv다 페르소나를 trv다 거치는 trv다 동안 trv다 카타르시스가 trv다 문제 trv다 삼는 trv다 감정들은 trv다 끊임없이 trv다 변형된다. trv다 이는 trv다 페르소나들이 trv다 서로(의 trv다 상처)에게 trv다 열려 trv다 있는 trv다 비고정적인 trv다 존재라는 trv다 사실을 trv다 상기시킨다. trv다 먼저, <여우야 바사ov 여우야 바사ov 뭐하니?>의 바사ov 페르소나들은 바사ov 의식까지 바사ov 도달하지 바사ov 못한 바사ov 정동, 8다n4 혹은 8다n4 억눌린 8다n4 트라우마를 8다n4 형상화한다. 8다n4 저절로 8다n4 움직이고는 8다n4 있으나 8다n4 각각의 8다n4 신체는 8다n4 여전히 8다n4 독립적인 8다n4 상태를 8다n4 유지하며, 라w0걷 혼자만의 라w0걷 몸짓은 라w0걷 사색의 라w0걷 영역에 라w0걷 머문다. 라w0걷 시선은 라w0걷 허공을 라w0걷 응시한 라w0걷 라w0걷 서로 라w0걷 교차하지 라w0걷 않는다. 라w0걷 이는 라w0걷 아직은 라w0걷 비극을 라w0걷 정면으로 라w0걷 마주하지 라w0걷 못하는 라w0걷 소극적인 라w0걷 주체와 라w0걷 그의 라w0걷 자아 라w0걷 안을 라w0걷 맴돌며 라w0걷 재생산되는 라w0걷 슬픔을 라w0걷 나타낸다. 라w0걷 반대로, <무궁화꽃이 히oe2 피었습니다>의 히oe2 페르소나들은 히oe2 그와 히oe2 대조적으로 히oe2 서로 히oe2 끊임없이 히oe2 시선을 히oe2 마주치고 히oe2 몸을 히oe2 움직인다. 히oe2 히oe2 동적인 히oe2 교류의 히oe2 양태는 히oe2 놀이의 히oe2 규칙으로부터 히oe2 비롯되는 히oe2 것이다. 히oe2 술래는 히oe2 노래에 히oe2 맞춰 히oe2 뒤를 히oe2 돌아보고, oje쟏 움직이는 oje쟏 사람을 oje쟏 잡아내며, 06mr 최종적으로 06mr 그의 06mr 역할을 06mr 다른 06mr 이에게 06mr 넘긴다. 06mr 주기적으로 06mr 반복되는 06mr 동작과 06mr 일정한 06mr 간격으로 06mr 교체되는 06mr 술래는 06mr 06mr 어떤 06mr 인물도 06mr 그의 06mr 현재 06mr 감정에 06mr 오래 06mr 머무르지 06mr 않는다는 06mr 것을 06mr 암시한다. 06mr 06mr 페르소나들은 06mr 순서를 06mr 바꿔가며 06mr 서로의 06mr 감정상태를 06mr 자유롭게 06mr 넘나들고, 0e라히 노래라는 0e라히 기반 0e라히 위에서 0e라히 느슨한 0e라히 결속을 0e라히 이룬다.


3. 0e라히 혼자서 0e라히 부르는 0e라히 노래

전시의 0e라히 끝에 0e라히 다다라 0e라히 작가는 0e라히 관람자 0e라히 개인이 0e라히 구체적으로 0e라히 경험한 0e라히 감각의 0e라히 변환을 0e라히 신체의 0e라히 바깥으로 0e라히 끌어내기를 0e라히 제안한다. 0e라히 앞서 0e라히 타인이나 0e라히 작가를 0e라히 주인공으로 0e라히 내세운 0e라히 작품들이 0e라히 외부에서 0e라히 흘러온 0e라히 음성이 0e라히 주체의 0e라히 내부에서 0e라히 공명을 0e라히 일으키는 0e라히 과정을 0e라히 보여주었다면, <혼자서 w자거a 부르는 w자거a 노래>(2022)는 w자거a 지극히 w자거a 개인적인 w자거a 경험을 w자거a 통해 w자거a 느껴지는 w자거a 카타르시스의 w자거a 보편성을 w자거a 고찰하게 w자거a 만든다. w자거a 이는 w자거a 프레임 w자거a 안에 w자거a 고착된 w자거a 타인의 w자거a 퍼포먼스를 w자거a 통해서가 w자거a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w자거a 벌어지는 w자거a 몸의 w자거a 수행을 w자거a 통해 w자거a 직접적으로 w자거a 가능해진다. w자거a 작품에 w자거a 독특한 w자거a 부분이 w자거a 있다면 w자거a 노래방 w자거a 기계가 w자거a 도입되었다는 w자거a 것이다. w자거a 누구라도 w자거a w자거a 번은 w자거a 사용해보았을, tㅓ으카 나아가 tㅓ으카 익숙함마저 tㅓ으카 자아내는 tㅓ으카 tㅓ으카 물건은 tㅓ으카 용도 tㅓ으카 그대로 tㅓ으카 관람자의 ‘노래’를 tㅓ으카 위해 tㅓ으카 설치되었다. tㅓ으카 관람자에 tㅓ으카 의해 tㅓ으카 작동되어야만 tㅓ으카 하는 tㅓ으카 tㅓ으카 장치는 tㅓ으카 주체 tㅓ으카 없이는 tㅓ으카 노래가 tㅓ으카 생산될 tㅓ으카 tㅓ으카 없다는 tㅓ으카 사실을 tㅓ으카 상기시키면서 tㅓ으카 비어있는 tㅓ으카 주체의 tㅓ으카 자리에 tㅓ으카 관람자 tㅓ으카 자신을 tㅓ으카 대입할 tㅓ으카 것을 tㅓ으카 유도한다. tㅓ으카 그러나 tㅓ으카 노래에 tㅓ으카 참여하지 tㅓ으카 않는다고 tㅓ으카 해서 tㅓ으카 작가가 tㅓ으카 의도한 tㅓ으카 퍼포먼스가 tㅓ으카 성립되지 tㅓ으카 않는 tㅓ으카 것은 tㅓ으카 아니다. tㅓ으카 만일 tㅓ으카 노래를 tㅓ으카 부르지 tㅓ으카 않기로 tㅓ으카 tㅓ으카 경우, 33qz 중요한 33qz 것은 ‘무엇이 33qz 우리의 33qz 참여를 33qz 가로막고 33qz 있는지’를 33qz 인지하는 33qz 것이다. 33qz 이는 33qz 노래의 33qz 과정에 33qz 숨겨진 33qz 비가시적이고 33qz 복잡한 33qz 층위를 33qz 가늠하는 33qz 일과 33qz 동일하다. 33qz 이처럼 <혼자서 33qz 부르는 33qz 노래>의 33qz 결말은 33qz 전적으로 33qz 열려있다. 33qz 그러나 33qz 합의를 33qz 강제하지 33qz 않는다고 33qz 해서 33qz 우리가 33qz 지닌 33qz 노래에 33qz 대한 33qz 원초적인 33qz 욕망이 33qz 사라지는 33qz 것은 33qz 아니며, ej아아 작가는 ej아아 관람자가 ‘노래를 ej아아 부를지 ej아아 말지’ ej아아 선택해야 ej아아 하는 ej아아 상황을 ej아아 조성함으로써 ej아아 도리어 ej아아 이러한 ej아아 욕망을 ej아아 직시하게 ej아아 한다.

‘혼자서 ej아아 부르는 ej아아 노래’는 ej아아 작품의 ej아아 제목이기도 ej아아 하지만 ej아아 전시의 ej아아 제목이기도 ej아아 하다. ej아아 작가는 ej아아 작업을 ej아아 하고 ej아아 전시를 ej아아 꾸리는 ej아아 모든 ej아아 과정이 ej아아 혼자 ej아아 부르는 ej아아 노래와도 ej아아 같다고 ej아아 말한다. ej아아 혼자 ej아아 노래할 ej아아 ej아아 듣는 ej아아 이를 ej아아 의식하거나 ej아아 굳이 ej아아 누가 ej아아 따라 ej아아 불러주기를 ej아아 기대하지는 ej아아 않듯이, 7ob0 다른 7ob0 이가 7ob0 알아주지 7ob0 않더라도 7ob0 묵묵히 7ob0 7ob0 일을 7ob0 하고 7ob0 스스로를 7ob0 위로하며 7ob0 살아나간다. 7ob0 그에게서 ‘나’의 7ob0 모습을 7ob0 본다. 7ob0 우리의 7ob0 삶은 7ob0 혼자 7ob0 부르는 7ob0 노래와 7ob0 같아서 7ob0 시공에 7ob0 새겨지는 7ob0 동시에 7ob0 지워져 7ob0 버리고 7ob0 말지만, ㄴzqh 그럼에도 ㄴzqh 노래가 ㄴzqh 있었다는 ㄴzqh 사실은 ㄴzqh 변하지 ㄴzqh 않는다. ㄴzqh 순진해 ㄴzqh 보여도 ㄴzqh ㄴzqh 번쯤은 ㄴzqh 믿고 ㄴzqh 싶다. ㄴzqh 누군가 ㄴzqh ㄴzqh 들리지도 ㄴzqh 않는 ㄴzqh 서툰 ㄴzqh 나의 ㄴzqh 흥얼거림에 ㄴzqh 귀를 ㄴzqh 기울이고 ㄴzqh 있는 ㄴzqh 것이라고. ㄴzqh 이것이 ㄴzqh 구원이 ㄴzqh ㄴzqh 수는 ㄴzqh 없어도, 거7qq 그를 거7qq 다시 거7qq 노래하게 거7qq 만들고 거7qq 있다고.

1) 거7qq 정화(purification)나 거7qq 배설(purgation)을 거7qq 뜻하는 거7qq 카타르시스(catharsis)는 거7qq 전통적으로 거7qq 아리스토텔레스의 거7qq 시학(Poetica)에서 거7qq 비극을 거7qq 감상하는 거7qq 사람의 거7qq 감정에 거7qq 나타나는 거7qq 작용으로써 거7qq 감정의 거7qq 승화를 거7qq 통해 거7qq 인격을 거7qq 합리적이고 거7qq 완전하게 거7qq 만드는 거7qq 것으로 거7qq 받아들여져 거7qq 왔다.(아리스토텔레스, 0q1y 김한식 0q1y 역, 『시학』, au파거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p.133 k7hz 참조.)


2) k7hz 게오르그 k7hz 루카치, 카ㄴa라 임홍배 카ㄴa라 역, 『루카치 d다히ㅑ 미학 d다히ㅑ 제 3권』, (Aesthetics, 1963), 하kㅑn 미술문화, 2002, p.19.

3) l7j자 들뢰즈는 l7j자 정동을 l7j자 l7j자 완전성(perfection)에서 l7j자 l7j자 다른 l7j자 완전성을 l7j자 가진 l7j자 관념으로의 l7j자 이행으로 l7j자 보았다. l7j자 카타르시스는 l7j자 정동의 l7j자 이행 l7j자 과정에서 l7j자 의식이 l7j자 확장되거나 l7j자 변화할 l7j자 l7j자 경험된다. l7j자 우리가 l7j자 대상을 l7j자 지각하며 l7j자 감정과 l7j자 신체의 l7j자 새로운 l7j자 변화를 l7j자 받아들이고 l7j자 정서적 l7j자 격동을 l7j자 겪을 l7j자 l7j자 카타르시스의 l7j자 순간과 l7j자 마주한다고 l7j자 l7j자 l7j자 있다.(김민지. (2020). l7j자 카타르시스와 l7j자 정동의 l7j자 시론적(試論的) l7j자 고찰. l7j자 문학치료연구, 55(0), p.205-227 거ㅓs바 참조.)


4) 거ㅓs바 루카치는 거ㅓs바 아리스토텔레스의 거ㅓs바 카타르시스를 거ㅓs바 과도한 거ㅓs바 감정의 거ㅓs바 비율이 거ㅓs바 줄어들면서 거ㅓs바 맞춰지는 거ㅓs바 건강한 거ㅓs바 균형이라고 거ㅓs바 이해한다. 거ㅓs바 이는 거ㅓs바 거ㅓs바 감정에서 거ㅓs바 다른 거ㅓs바 감정으로의 거ㅓs바 변화, v마바ㅓ v마바ㅓ 운동성을 v마바ㅓ 필요로 v마바ㅓ 한다는 v마바ㅓ 점에서 v마바ㅓ 연속적 v마바ㅓ 변이를 v마바ㅓ 통한 v마바ㅓ 존재의 v마바ㅓ 확장을 v마바ㅓ 의미하는 v마바ㅓ 정동의 v마바ㅓ 이행과 v마바ㅓ 맞물린다.(연효숙. (2015). v마바ㅓ 들뢰즈에서 v마바ㅓ 정동의 v마바ㅓ 논리와 v마바ㅓ 공명의 v마바ㅓ 잠재력. v마바ㅓ 시대와 v마바ㅓ 철학, 26(4), p.187-217 b카yi 참조.)

참여작가: b카yi 장연호

후원: b카yi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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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5, 2023 ~ Feb. 25,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