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윤 개인전: 벌거벗은 눈으로

시드스페이스갤러리

2024년 9월 25일 ~ 2024년 10월 9일

벌거벗을 용기
기획 글: 이시호

고도근시를 체험해본 일이 있는가. 그것은 잠에서 깨 머리를 일으키면 곧 베개의 무늬를 모르게 되는 것, 고작 몇 cm 옆에 벗어둔 안경조차 한참을 더듬어 찾아야 하는 삶이다. 합하면 약 -17.00 디옵터에 달하는 초고도근시와 고도난시를 지닌 정가윤은 어쩌면 콤플렉스일지 모를 이 시력을 되려 작업의 키워드로 삼아왔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일부러 맨눈으로 작업하기를 택했다. 정가윤은 과거 찍었던 호수 사진을 크롭해 캔버스에 묘사한 다음, 안경을 벗은 채 다른 천에 이 그림을 따라 그렸다. 아울러 기억이나 테크닉에 의존한 인위적 재현을 바라는 대신, 흐릿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옮겼다. 

그릴 때는 모두 유사한 색 번짐으로 보이던 화면은, 안경을 쓰는 순간 제각기 다른 추상화로 태어난다. 오롯이 벌거벗은 눈으로 그린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완성을 기대하던 설렘은 자신이 원하던 화풍이나 완성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다소 초라한 작품을 마주하며 숨고 싶은 감정으로 바뀐다. 

정가윤은 그럼에도 이 벌거벗은 눈을 긍정하고자 한다. 선명한 시야를, 의도적 개입을 포기한 회화가 끝내 고유한 것으로 탄생한 까닭이다. 선명한 시야로는 익숙한 세계의 기준을 쫓게 되는 반면, 맨눈으로는 아무리 원본을 복제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세계의 흔적은 제멋대로 흘러내린 색 사이로 희미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벌거벗고 태어난다는 것을 떠올린다. 타인과 같은 옷, 같은 직업은 가질 수 있으나 본연의 모습은 결코 남과 같아질 수 없다. 이처럼 정가윤의 회화는 우리를 완벽한 복제품으로 만드려는 듯한 세계 안에서 도리어 벗음으로 존재의 본연을 되찾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익숙한 사고에서 벗어나 타고난 ‘존재’를 발견하려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작업노트

안경을 벗는 순간, 세상은 초점이 나간 카메라처럼 흐릿해진다. 근시 –14.00D에 난시 –2.75D를 가진 나에게 렌즈 없는 세상은 그저 흐릿한 꿈 같다. 렌즈(안경)는 내가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다. 나의 손은 그 창을 통해 선명한 세계를 그려나갔다. 

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 눈이 원하는 것을 손이 이루어 주는 작업이다. 사진 속 물결이 가진 섬세함을 나만의 결로 만들어 갔다. 작은 붓으로 부드럽게 쌓아 올려 내 감각을 새기듯이 그린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나의 취향을 드러낸다. 이 모든 건 안경이 있기에 가능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진짜 나의 눈은 안경을 쓴 눈이 아니다. ‘진짜 나의 눈(Naked Eyes)’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늘 눈과 함께 환상의 호흡을 맞춰왔던 손에게 미안한 일이다. 고작 손만 뻗은 거리인 그림 화면조차 흐릿하게 보인다. 붓끝이 흐리멍덩해서 붓질이 마음대로 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통제되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붓질에, 완성된 순간을 상상하며 기대하게 한다. 묘한 설렘이 얽혀있는 듯하다. 그리고 안경을 다시 쓰는 순간,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마주하는 듯한 이질감이 나를 감싼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안경을 벗고 원본 그림(My Lake)을 가까이서 보면 내가 선택한 색과 형태들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지만, 뒷걸음질을 칠수록 마치 녹아내리듯 희미해진다. 잡히지 않는 초점 속에서, 나는 그토록 의지해 왔던 선명함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더 뒤로 물러날수록, 화면은 점차 추상적으로 변해간다. 나의 진짜 눈이 보는 세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나는 일부러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며, 점차 안경에 의존하지 않는 나의 진짜 눈을 받아들이려 한다.


참여작가: 정가윤
기획•글: 이시호
디자인: 김혜은
주최•주관: 시드스페이스 갤러리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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