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연 : Lost Corner

아트스페이스그로브

2018년 4월 5일 ~ 2018년 4월 26일

기억의 망실(亡失)과 반-기억의 수복(收復)

정재연이 구사하는 일상의 화법과 그간의 작업들을 떠올려보면 애초에 정답이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 복수로 존재하거나, 혹은 질문의 논조에 따라 매번 그 답이 달라지는 이 세계의 울퉁불퉁한 질서와 온도를 무심하게 반영하는 것 같다. 그가 관심을 두는 지점은 대체로 정언적 세계를 둘러싼 여집합, 확고해 보이는 것을 떠받치는 연약한 근거들, 기억해 내지 못하는 대과거로부터 현재의 미시사를 잇는 보이지 않는 사슬 같은 것들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물리적 실체로서 견고하게 존재해왔던 ‘장소’와 그것을 사변적으로 구성하고 재편해 내는 개인의 ‘기억’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번 전시 <로스트 코너>에서 그가 꺼내든 이야기와 펼쳐낸 풍경들 역시 명징한 정답 없는 모순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 

초기의 작업들(2009-2014)로 구분된 이전의 작업들은 공공의 장소에서의 작가적 개입과 수행을 통해 특정 사회집단 안에서 의심없이 구축되어 온 장소성의 문제와 소비 방식에 부드러운 균열을 가함으로써 일종의 조건과 질문을 생성하고 복수의 반응과 해석을 불러 일으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종종 갤러리나 레지던스 공간을 가붓하게 벗어나 작가는 작품과 관객이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일종의 상황으로서의 공공장소를 적극적으로 배회하며, 상황주의자로서 스스로 실험해 보고자 했던 소통의 효력과 실패에 대한 서사를 써내려 왔다. 

2016년 이후 작가 정재연은 눈 앞에 현전하는 장소에 대한 관찰과 개입의 방식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 차원 속에 존재했던 기억 구성체를 소환하고, 과거의 기억궁전mind palace 에서 길 잃어버린 상념들과 그 속에서 묻어두었던 장소의 기억들을 다양한 매체로 복원하거나 되짚어가는 방식으로 이행해 나가고 있다. 최근 이 삼년 간 전개해 온 실천들의 궤적들을 살펴보면, 태도와 매체에 있어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감지된다. 2017년 선보였던 작업 <Retrace>에서 정재연은 지금은 사라진 식민지 건축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판화작업으로 복원한 바 있다.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작가에게 이 건축물은 조선총독부가 상징하는 엄혹한 시대의 냉기보다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이 발산하는 위엄과 고딕적 고아함, 화려한 실내 정경으로 아름답고 안온한 느낌으로 뇌리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민족 정서에 의해 지워야 할 오욕의 잔재로 규정된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공식 철거되었다. 약 70여간 시대의 효용과 가치 부여에 따라 그 이름표를 바꿔 달며 줄곧 한 자리에 서 있었던 식민의 파사드와 컴플렉스는 이제 저마다의 분열적 기억과 새로운 시대의 기억상실이 교차하는 옛터로, 오직 사진과 문헌, 철거 영상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옛 중앙박물관 건축은 작가에게 있어 일종의 <로스트 코너>, 사라져 버린 어떤 지대일 것이다. 물론 물리적 파괴 혹은 비-존재가 심리적 ‘망실’ 亡失 상태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망실의 상태란, 말 그대로 “잃어버려 없어졌다”는 의미로, 거기에는 규명하기 어려운 비자발적 의도와 불분명한 과정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는 작가에게 있어 유년기의 결정적 장면으로 남아 있는 장소의 기억과 자아의 심연에 각인된 풍경들은 제도화된 집단의 기억체계에 편입되면서, 스스로에 의해서 지워지고 침묵되어 의식의 저편으로 침잠되었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수사다. 

한편, 역사를 대상으로 한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의 사변적 추억과 취향은 상호 부정을 통해야만 존립이 가능한 대립항이 아니라, 기실 별개의 차원이며 때로 모순적일 수 있다. 장소에 대하여 개인이 품는 감정과 애착을 이르는 토포필리아Topophilia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때때로 합의된 기억을 배반하는 ‘반기억’counter-memory의 형태로 잔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반의 장소 맥락과 개인의 특수한 수용이 어긋나 있는 전선에서 기억 창고가 닫혀져 버렸음을, 그러나 이윽고 기억의 궁전을 재건하고 스스로 억압했던 반-기억들을 수복하려는 작가의 시도들을 전시장에서 목격하게 된다. 식민지-노스탤지어에 가까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웅장함과 세부를 이루는 장식적 디테일들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대신, 정재연은 정성스레 에칭으로 본뜬 옛 건축 이미지의 편린들과 섬광들로 구성된 일그러진 풍경으로, 타임라인이 어긋나버린 시청각적 서사로, 진지하지만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신체적 수행들로 우회하며 발설한다. 그렇게 기억이 수복되는 과정과 희미한 단서들은 미로 속에서 흩어진 채 놓여 있다.  

작가가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기억 수행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그러나 단지 한 개인에게서 달아나버린 대과거의 기억들을 재현해 내거나, 침묵했던 어떤 내용에 대해서 뒤늦게 발언하려는 데에 있는 것 같지만은 않다. 정성스레 반복되는 판화 작업과 스스로가 퍼포머로 등장한 영상과 화면과의 싱크가 어긋난 사운드는 각기 다른 결로 자신이 겪어왔거나 여전히 미결 상태에 있는 모순과 역설의 어떤 중간 지점들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곳에 명쾌한 가설과 주제, 방법론, 귀납적으로 추출된 결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고 생각되어지는 주체적 나 자신과 사회문화적으로 주조된 나, 자아의 내-외면, 개인과 집단, 정치적 올바름과 개인의 이끌림, 장소성의 각인과 붕괴와 같은 각양의 이항 구도 위에서 작가는 여전히 좌표를 수정해 나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 가까웠던 망각과 해리의 순간들을 끄집어 내고 회복하는 과정의 단면으로서, 특정한 미감과 취향의 원형을 거슬러가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메모리의 기각 역에 밀어 두었던 모호하고 불편한 정서들을 되짚어 보려는 시도로서 작가의 예술적 시도와 일상의 실천들이 독해될 때, 로스트 코너가 단지 구석진 장소나 시간과 함께 상실된 건축 만을 지시하지 않음을 비로소 수긍하게 된다. / 조주리

작가와의 대화: 2018.4.26 3:00 PM 

출처 : 아트스페이스 그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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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정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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