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 리 개인전: Wish You All the Best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21년 5월 16일 ~ 2021년 8월 15일

제이미 리가 제시하는 장면에는 다양한 연결망이 존재한다. 한눈에 봐도 형상이 명확한 대상이 있는가 하면, 세심하게 살피게 하는 추상적인 부분이 혼재한다. 한 화면에서 넘실거리고, 굽이치고, 부유하는 구상과 추상의 결합은 치밀한 연출보다는 우연과 즉흥에 의한 자연스러움에 가깝다. 작품명의 수사적 표현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유추해보는 것은 제이미 리가 제시하는 복합적 장면의 해석을 돕는다. 이번 전시는 크게 ‘꿈’, ‘희망’, ‘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먼저, ‘꿈’은 작가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소재다. 몽상적 측면과 간절한 바람을 모두 아우르는 의미로서의 ‘꿈’ 시리즈에서는 별, 달과 같은 밤의 도상과 반짝이는 재료가 돋보이며, 무의식의 기억이나 미래의 희망을 유추하게 한다. (<나의 기적을 찾아서>, <별똥별 아래, 소원을 빌다>, <꿈으로의 여행>)

그런데 최근에는 떠다니는 심상보다 실존하는 감각에 보다 귀를 기울인다. 작가는 많은 것과 ‘거리를 두며’ 잠시 쉬었다 가는 이 시간을 낯설게 감각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며, 창밖 사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지켜본 시간들. 한밤중 쏟아진 눈 ‘덕분에’ 유난히 반짝이던 아침의 설경, 꽃샘추위가 지나며 반가운 꽃을 피워내고, 또 지게 하던 자연을 그 어느 때보다 차분히 지켜봤다. 새로 선보이는 ‘봄’ 시리즈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정적인 이 시간을 보내고 찾아올 활기찬 날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꽃샘추위>와 <4월의 소나기>는 겨울의 시련과 낙화(落花)의 비애가 지닌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통해 추위가 물러가고 봄이 오는 순간, 소나기로 지는 꽃잎이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는 순간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여느 때 보다 고요하지만, 마냥 안주할 수는 없어 불안하기도, 막막하기도 한 오묘한 날들을 작가는 차분히 견뎌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전시명이자 동명의 시리즈이기도 한 문장, “Wish you all the best” 가 자아내는 말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오고 가는 인연에 건네던 기본적인 인사말이었지만, 움직임 없이 잔잔한 요즈음에 주고받는 이 말에는 모종의 묵직함이 담겨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메시지뿐만 아니라 작업의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에서는 이전보다 밀도가 높아진 것이 돋보인다. 특히 점의 집합이 눈에 띈다. 느리고 치밀한 과정이 엿보이는 점들은 각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크기와 색, 점성과 농도로 저마다의 질서를 이룬다. 붓으로 찍어 올린 점이 있는가 하면, 잉크 펜촉으로 드로잉하듯 그려낸 더 세밀한 점이 있다. ‘한땀 한땀’이라는 수식어가 단번에 떠오르며, 점을 하나씩 새기는 동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품었을지 유추해보게 한다. 점들이 모여 조직을 구성하는 형상은 결코 계획해서 연출할 수 없는, 유연하고 즉흥적인 모습이다. 점 외에도 그림 속 여타 형태 요소(form elements)들을 찬찬히 살펴보자. 미세한 개별 요소들이 조직적 구조로 뻗어 나가는 것은 굴곡이 심한 해안선, 나뭇가지, 번개 등의 기하학적 유기체 패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살아있음’을 직관하게 하는 이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씩 따라가 보면 분열, 복제, 확장 등의 각각의 질서가 내재한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즉흥적이고도 조직적인 구성체들이 얽히고 흩어지며 리듬을 이루는 것은 평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메시지를 공감각적으로 확장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설치작품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Over the Rainbow)>는 각 구성체를 더 심미적으로 파악하도록 이끈다. 마지막 3층의 전시장에는 회화 속 개별 요소를 아크릴판에 옮겨와 자르고, 이를 겹겹이 매달아 구현했다. 평면 위에서 칼로 새겨지고, 글리터와 만나 반짝이고, 에어 브러쉬의 분사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각 요소를 3차원으로 옮겨와 빛과 만나게 하니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꿈을 현실로”¹  이끄는 판타지 세계를 상상할 법한 이 작품은 제이미 리가 건네는 안부의 말(Wish you all the best)과도 맞물린다.

지금까지 제이미 리의 작업에서는 여러 기법을 중시하는 창작 과정과 다양한 매체의 물성, 질감이 빈틈없이 중요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정과 재료를 강조하기보다 재료와 기법의 조화로 인해 표상하는 이미지를 조화롭게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회화의 요소가 제 자리를 차분히 지키며, 인접한 다른 요소와 유대를 맺어 형상하는 장면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평면 배경에 평소 찾던 강렬한 색 대신 따뜻한 파스텔색을 입힌 것에서도 작가가 세상에 건네는 심미적 연대감을 유추해볼 수 있다. 잠시 멈춘 시기를 나름의 방법으로 견디는 작가의 태도로부터 ‘우리’의 경향을 비추어본다. 작업 속 낱낱의 요소들이 저마다의 규칙으로 조직을 이루며 서로 연대하는 모습처럼, 우리도 모종의 감정을 무의식에 공유해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작가가 건넨 안부에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¹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E. Y. Harburg, Over The Rainbow, 1939.

글: 김유빈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큐레이터)

참여작가: 제이미 리 (Jamie M. Lee)
주최 및 주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후원: 파주시

출처: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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