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일 개인전 : From Here To There (37°33'53.2"N 126°57'21.9"E, Jan. 2015 - 37°33'59.2"N 126°59'22.9”E, Sep. 2015)

공간형

2018년 7월 8일 ~ 2018년 7월 29일

당신이 디딘 0°0’0.2”N 0°0’0.5”E 의 깊이
장혜정 (독립 큐레이터) 

마치 우리가 보는 모든 이미지가, 어쩌면 그것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이 납작해져버린 듯 느껴지는 지금, 당신은 여전히 전시장이라는 3차원의 공간에 서 있다. 만약 당신이 ‘공간형’이라는 전시 장소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찾아오기 위해 아마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켰을 것이다. 그 장치의 안내/지시에 따라 나의 현 위치와 움직이는 화살표의 머리 방향을 번갈아 확인하며 오다가 마침내 목적지 앞에 도착하면 애플리케이션을 종료한다. 그리고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더이상 지도 애플리케이션은 접근할 수 없는 전시장으로 입장한다.

가상과 실재가 지금처럼 혼재되어있던 때가 있었을까. 나만의 시선, 나만의 경험이라는 것에 확신을 잃어가고 오히려 내 손에 들린 디지털 디바이스에 더 의지하게 되는 오늘날, 작가들 역시 모니터(혹은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예술과 전시장에서 일어나는 예술 사이를 오고 간다.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지용일은 가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틈을 강조하고, 모니터/스크린 너머 존재하는 깊이를 찾아내려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 환경이 인간의 인지 및 경험 방식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며, 나아가 시각예술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우리는 온종일 쉼 없이 디지털 미디어 기기의 표면을 손끝으로 만지며 정보를 수용하고 송출하며, 마치 나의 제2의 감각체계인 듯 내가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과정과 방식을 공유한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을 대체해버릴 듯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디지털의 가상 세계를 과연 ‘납작함’으로 일축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계속해서 그 세계를 탐험하려는 이유는 어쩌면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표면 아래 숨겨진 깊이의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은 포스트 모더니즘 문화와 문화적 생산물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 의미와 단절된 ‘깊이 없는 피상적 표현’을 발산하며, 이렇게 표면이나 표피에만 집중하는 ‘깊이없음(Depthlessness)’이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와 예술의 대표적인 특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임슨이 말하는 ‘깊이없음’은 내면이 제거된 상태로, 표피에 보이는 것 이면에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물론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새도 없이 ‘납작함’에 매료되거나 지배된 이미지들은 오늘날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하지만 ‘깊이없음’과 ‘확인할 수 없는 깊이’는 분명 다르다. 우리가 쉴새 없이 터치하는 표면은 비록 납작한 이미지로 출력되지만, 그 너머의 잠재적 깊이가 부정될 수는 없다.

지용일의 이번 전시 ≪From Here To There (37°33'53.2"N 126°57'21.9"E, Jan. 2015 - 37°33'59.2"N 126°59'22.9”E, Sep. 2015)≫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지만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그 세상의 깊이를 제시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전시 제목에 포함된 37°33’59.2”N 126°59’22.9”E는 공간형으로 들어오는 건물의 입구의 좌표로 구글 스트리트뷰(Google Street View)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뷰(view)는 이 좌표까지이다. 그리고 전시를 보고 있는 당신은 지금 0°0’0.2”N 0°0’0.5”E 값이 이동된 37°33’59.0”N 126°59’22.4”E에 서 있다. 좌표로는 존재하지만, 지도 애플리케이션은 닿을 수 없는 지점, 0°0’0.2”N 0°0’0.5”E 만큼의 깊이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왠지 반갑지 않은가, 다만 숫자 1이라도 나의 신체적 감각으로 오롯이 점유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

하지만 막상 마주하는 이미지는 납작하기 그지없고, 어긋난 해상도로 뿌옇게 흐려진 채 벽면을 메우고 있다. 지용일은 아현동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 책상에 앉아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출발지와 도착지를 작업실과 공간형으로 입력하고, 그 경로를 마우스 스크롤 행위를 통해 이동했다. 그 여정에서 10번 스크롤 단위로 정면과 측면의 뷰는 각 37번씩 캡쳐되고, 어도비 포토샵에서 다시 그려진다. 작가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흑연의 질감과 유화 붓질의 느낌을 참조하여 자신만의 6개의 브러시 툴(Brush Tool)을 만들어 냈다. 제공되는 툴 대신 지용일 본인만의 ‘포토샵’ 흑연 터치와 브러시 스트로크로 그려진 37장의 드로잉은 원근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크기와 해상도가 재조정된다.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노트북 모니터를 기준으로 작업실과 가장 가까운 곳을 100%로 조정하고, 나머지를 36개의 단계로 점차 줄여나가며 공간을 그리기에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되는 원근법을 흉내 낸다. 작가의 노트북 화면에서 100%의 해상도를 갖도록 설정되어 완성된 드로잉은 시트지에 UV 프린트되며 모니터 속 디지털 질감과 가장 유사한 재현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니터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고정적 캔버스가 아닌 전시장의 환경에 따라 크기와 비율이 변주되어 출력된 이미지는, 벽의 요철을 드러낼 만큼 최대한 얇게 가능한 한 납작한 상태로 달라붙으며 작가의 컴퓨터 모니터 안에서 성취되었던 이상적인 비율과 해상도는 하릴없이 무너져버린다. 

뚜렷함과 선명함이 무너진 이미지 옆에, 그나마 객관적 증거로 여겨지는 숫자(좌표)는 벽에 붙지도 바닥을 딛고 서 있지도 않은 모호한 상태로 놓여있다. 그리고 벽면과 같은 물질(석고보드)성을 가진 전시 도면만이 여기에 서 있는 당신처럼 벽과 바닥을 지지대로 삼으며 유일하게 이 공간과 전시를 보는 당신의 경험이 실재임을 증명해주는 존재로 제시된다. 마치 시간 여행자의 주머니에 있던 물건이 과거나 미래로 우연히 동행하며 그 이동의 실재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지용일은 작업을 통해 현실과 가상 사이를 오고 가면서, 현실이 가상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다시 물리적 상황이 겹치듯 맞물리는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고 둔감해진 우리의 인식을 자극한다. 

‘측정할 수 없지만 감각되는 깊이’에 대한 탐구는 지용일의 기존 작업 <2017년 3월 1일 바이칼 호수의 저녁>(2018)이나 <2017년 7월 28일 배핀 만의 저녁>(2018)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실제로 방문해 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을 구글 스트리트뷰를 통해 손끝으로 밀고 당기고 360°로 회전시키며 채집하고 이를 다양한 크기의 투명아크릴판에 UV 프린트했다. 각 아크릴판은 고정적으로 닫힌 상자가 아닌, 일부는 맞물리고 맞물린 부분들이 서로에 의지하고 겹치면서 세워진 반쯤 열린 조각 작업 형태로 제시되었다. 본래 투명한 물성을 지녔지만 가상의 이미지와 만나며 반투명해진 아크릴판은 서로 겹쳐지면서 밀도를 획득하지만, 우상적으로 공간을 점유할 만큼 단단해지지 못한 채 놓이게 되는 주변 공간과 다시 오버랩 된다. 이렇게 반쯤 열린 반투명한 조각은 실재와 가상의 중간 어디쯤 홀로그램처럼 세워졌다.

지난 3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는 증강현실(AR)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MoMAR)을 새롭게 런칭했다. 미술관에서 제시하는 새로운 플랫폼의 목적은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고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변화는 디지털 사회의 인식, 표현, 정보 공유 등의 방식이 오랜 시간 견고하게 존재해오던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환경을 바꾸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 진정 모든 것이 납작해지고 증강현실처럼 부유하는 순간이라면, 그 순간에서만 가능하고 필요한 예술의 시도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한 맥락에서 지용일은 단순히 디지털 이미지의 납작함과 가벼움에 매료되어 차용하거나 실재와 가상의 전환 오류 속에서 파생된 파편들을 나열한다기보단, 그 특성이 시각 예술과 접촉하면서 만들어지는 변곡점에 집중하며 표면 아래 분명 있을 어떠한 깊이를 찾아가는 신중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1 Frede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2)
2 https://momar.gallery



전시 전경, 공간 형, 촬영: 김익현



전시 전경, 공간 형, 촬영: 김익현



From Here To There (37°33'53.2"N 126°57'21.9"E, Jan. 2015 - 37°33'59.2"N 126°59'22.9"E, Sep. 2015), UV print and water paint on plaster board, 59.4 × 42cm, 2018, 촬영: 김익현


엽서 디자인: 양상미
후원: 서울문화재단(2018 민간창작공간운영 지원사업)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참여 작가

  • 지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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