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오해의 터전이다. 그것은 분명 환영이기에 앞서 사물이기에 어느 그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이 그림을 그린 자는 틀림없이 삶이라 불리는 것을 살았고, 자신의 궤적에 따른 물적 시공간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따라서 회화는 본래적으로 리얼리티를 조준할 수밖에 없다. 모든 회화는 운명적으로 정치적 발언이며 사회적 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회화는 그리는 주체의 진술을 변질시켜놓은 소산임에도 틀림없다. 그림의 원료가 되었던 물질세계의 사건들은 재차 누락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공정이 놓친 놓아버린 이야기들의 부피는 측정이 불가능하므로. 나아가 주체는 스스로의 몸으로 원료를 누르고, 섞고, 흘리고, 지우고, 잡아당기는 과정에서 단지 몸과 물질의 반응으로 조직된 임의의 형상들을 파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본래의 동인과 무관한 변상증을 자아내게 되며 형상들을 이따금 어긋난 환영으로 둔갑시키곤 하므로.
설령 이 모든 말썽을 총체적 징후로서 받아들이더라도,(...) 회화로 세계를 진술하는 일과 그 회화를 재진술하는일, 더 나아가 그 진술에 말미암은 소통에는 운명적 부정확성이 깃들어있다. 어떤 실체와 연루해있는 회화는, 간파하려 들수록 기필코 분해되어갈 테다. 신체를 작동시켜 현실을 증언할수록 환영을 자아내는 그림들, 객관적 현실을 증언한다고 믿지만 결국 사담을 시작하고야 마는 자들이 휘말린 패러독스. 마침내 이곳의 방문자들은 마치 지금부터 내 코는 길어질 것 이라 말하는 피노키오 앞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참여작가: 진예리, 정주원
글: 장순원
설치: Lepsy label, 변신 스튜디오
사진: 백승환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출처: Hal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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