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희 개인전 : 빛을 세는 밤

이목화랑

2018년 4월 18일 ~ 2018년 5월 12일

밤에 관한 기록 : 《빛을 세는 밤》에 관한 소고
글. 추성아(독립큐레이터)

“눈의 기능을 빼앗아가는 어두운 밤
귀는 더 빨리 알아 차리네. 
어둠이 보는 감각을 손상시킨다면 
두 배의 듣는 힘으로 보상하네”
- 윌리엄 셰익스피어,『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에서

해가 지고 나서야 양초나 램프로 빛을 밝히던 시대에는 인공적인 빛이라는 것이 사람과 시간, 장소에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뒤에야 촛불을 붙이는 시간이 시작되었고 속담에 “인간 최고의 촛불은 신중함”이라는 말처럼, 밤에는 공간과 장소를 가늠하기 위해 사람들은 칠흑같은 어둠이 보이게 청각, 촉각, 후각을 포함한 이차적인 감각에 크게 의존했다. 빛에 대한 제약이 존재했을 때 인간에게는 밤이라는 시간이 보이지 않은 어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존재하는 낮의 관행과는 다른 밤에 관한 믿음과 행동에 의존하여 달리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적인 빛이라는 다른 한 쪽에의 세계의 리듬이나 의식과 구분되는 행동 방식을 포용하고 어둠을 보기 시작하는 시공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최윤희의 이번 개인전 《빛을 세는 밤》은, 회화라는 시각적인 재현에 대한 사적인 기록에서 시작되었지만 일차적인 감각보다 자신의 신체가 경험한 그 주변의 감각들에 대한 충돌을 화면 안에 빠른 속도로 기록하는 것에 주목한다. 고요함과 침묵이 흐르는 “밤”에는 우리 눈으로 보는 감각보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더 예민하게 감지된다. 어둠 속에 오래 서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충분한 빛을 받아 들이면서 보이기 시작하지만 사실상, 사물과 풍경의 색채와 질감을 인식하는 능력은 상실되고 윤곽에 대한 지각은 오히려 예리해 진다. 이처럼, 우리에게 밤은 모든 것이 한 층 더 간헐적이고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시간일 것이다. 맹인이 바위를 더듬어 나가듯이 밤에 존재하는 대상과 풍경은 분명 작가의 시야 안에서 사실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외적인 감각들이 아주 미묘하게 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감지하는 시간이다. 어둠이 보이는 순간에 귀에 걸리는 바람 소리와 발 밑에 밟히는 모래와 나뭇가지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 혹은 빗소리가 경관의 윤곽을 드러내주는 것처럼.

매일 늦은 밤, 작가는 무심코 지나치는 동선 안에 머무는 장소와 늘 같은 자리에 있었던 폐허의 흔적들을 반복적으로 포착한다. 화면에 담긴 어둠 속에 숨은 쓰러진 나무, 무성한 덤불, 뚫린 구덩이 같은 형태와 공사 현장에서 버려진 대상들은 같은 자리에 있지만 항상 동일한 사물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밤에는 어둠의 종류가 다양해서 하룻밤에도 여러 차례 바뀌어 매 순간 다르게 다가온다. 그렇게 밤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나 소나무의 그을린 검은 송진처럼 어두운 밤, 보름달의 환한 빛까지 다양한 어둠이 존재하며 때로 어떤 것은 우리 눈으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빛과 공기가 감도는 어둠과 함께 한다. 시각적인 자료를 일체 배제하여 작가가 감당한 그 순간은 “기억”이라는 감각으로 당시의 빛과 대상을 추적하면서 화면 안에 묵직하게 담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물감 냄새가 진동하는 끈적한 화면은 당시에 철 냄새가 습한 밤 공기가 맴도는 음침한 밤과 노란 빛의 가로등 그리고 그 아래 살짝 젖은 진흙을 연상케 한다. 

최윤희는 모호한 형태 위에 또렷하게 물감을 올리고 다시 뭉개고 또 한번 올리는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페인팅을 해나가는 방식보다 매일 사적으로 밤을 기록하는 것처럼, 스케치하듯이 빠른 속도로 색을 쌓고 소거해 나가는 태도를 취한다. 흥미롭게도, 그가 기록한 대상들이 대부분 어느 날부터인가 제거되어 그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빛과 어둠이라는 요소 안에서 실재했던 잔해들을 지워가는 과정이 재현의 방식으로 낱낱이 사건화 시키는 태도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그 자리>, <가장자리>, <어젯밤>, <흐르는 시간>(2018) 등 작품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작가는 무명의 장소에서 외면된 아주 사소한 시간들을 개별 개별의 장면으로 소환하며 그것을 기록한다. 더불어, 서른여섯 개 가량 되는 작은 크기의 종이 위에 단편적인 회화들은 사물 위에 내리치는 인공의 빛과 그것이 담고 있는 본연의 색이 뒤섞여 둔탁하게 얹혀지는 등 소소한 기록에 관한 회화적 실험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실험은 “검푸른” 색이 중심을 이루었던 지난 작업들과 달리 호박색과 회갈색의 화면 위에 짓이겨진 색의 변화 또한, 밤의 시간에 체화된 미묘한 빛의 감각들이 더욱 다양해진 층위에서 긴 시간 동안 관찰되어졌음을 볼 수 있다.

기록된 밤의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무심코, 때로는 주의 깊이 밤의 감각들을 건든 빛과 그림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 외면당한 흔적 속에 뿌려졌을 것이다. 우리는 “밤”이라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한없이 깊은 수렁 안에서 상실된 시간들을 찾아 예민하게 파고들어 이를 기록한다. 그렇게 밤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 헤매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 다다를 것이다. 정령들이 밤에 나타나 소란스럽게 머물다가 깊은 밤이 되면 날아가 버리듯이 그곳에 남겨진 시간과 장소는 우리의 시선으로 그 윤곽을 가늠하게 된다. 작가는 캄캄한 어둠 속에 숨 죽이고 사진으로 그 장면을 빠르게 포착하는 것과 달리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초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아가, 보이는 긴긴 시간의 어둠 속에서 빛을 하나 둘 세어 밤의 풍경과 대상을 바라보는 지침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한다. 이 지침은 처음에 지극히 모호하고 어떤 추진제에 지나지 않다가 강박적인 어떤 관념 같은 것, 혹은 막연한 열망이나 뒤섞인 기억 같은 것으로 변화한다.

이처럼, 최윤희는 잃어버린 밤이라는 드라마틱하면서 동시에 제약이 따른 특정한 시공간에 함축된 기억의 한 순간들을 재현한다. 그는 쉽게 포착될 수도 있지만 반면에 그 어느 누구의 시선으로부터 존재감 없이 외면당할 수 있는 대상을 회화의 평면성이나 재현의 문제로 끌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시간이라는 요소와 미묘한 주변의 감각들을 물감이 지니고 있는 물성 그 본연의 질감과 색채를 통해 그 한 순간을 기록하여 보존하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에게 밤은 하루의 길고도 작은 부분으로써 빛에서 어둠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시간을 지나 그것을 헤아리고 그 순간을 간절하게 붙잡고자 하는 한시적인 기억으로 머문다.

출처 : 이목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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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최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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