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시대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2019년 5월 17일 ~ 2019년 6월 4일

안개 낀 부두, 적막한 거리, 비에 젖은 새벽 도로, 과묵한 남자와 지친 여자의 무거운 발걸음, 인물들의 낮은 목소리와 물기 어린 눈, 애조의 음악... 프랑스 영화 하면 많은 분들은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립니다. 짐작컨대, 이런 서정적이고 우수 어린 이미지들이 프랑스 영화의 특징으로 부각된 것은 ‘시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유파의 영화들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은, 미학적 경향과 구성원의 외연이 비교적 분명한 독일 표현주의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에 비해 얼마간 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후대에 미친 영향이라는 점에서도 계보의 선이 그리 선명하지 않은 편입니다. 영화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는, 프랑스의 좌파 연합이 지배한 인민 전선 시절(1936~1939)이 시적 리얼리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권 초기의 전례 없는 낙관, 곧바로 찾아온 비관, 그리고 긴 우울과 체념이 지배한 이 시대의 정조가 독립적인 제작사들이 주도하던 당대 프랑스의 주요 영화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이 경향이 시적 리얼리즘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조류에 대한 시대상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 이례적 설명 방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게 망설여지긴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시적 리얼리즘의 영화들에는 공통의 의제나 기법의 미학적 경향만큼, 정서적 분위기나 감정적 흐름이 주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적’이라는 형용사는 이 유파의 영화들이 지닌 멜랑콜릭한 무드와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강렬한 무드가 당대의 프랑스 관객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객을 매혹시켰고, 이를 통해 1차 대전 이후에 국제 시장을 장악한 할리우드의 위세 속에서도, 쇠퇴기를 걷던 프랑스 영화가 일시적으로나마 부흥기를 맞게 됩니다. 거칠게 도식화하면, 시적 리얼리즘의 전성기 동안, 할리우드의 아메리칸 드림 맞은편에 시적 리얼리즘의 프렌치 무드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시대를 이끈 다섯 거장의 작품이 상영됩니다. 이 중 세 명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다른 두 명은 아직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영화를 한데 모아 놓고 보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부대끼며 같은 사회적 기후를 겪고 살았음이,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 안에 공기처럼 깊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대상과 비교적 독립적으로 자신의 시스템과 미학을 구축했던 할리우드의 고전적 리얼리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프랑스의 예민한 리얼리즘일 것입니다. 이것이 시적이라는 형용사의 또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크 페데와 장 그레미용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독 르네 클레르는 만년에 “페데와 페데의 영화는 마땅히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다.”라고 탄식했고, 평론가 리처드 라우드는 “페데가 생전에 과대평가 받았다면, 사후엔 시계추가 반대 방향으로 지나치게 가 버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지와 이야기, 세트와 로케이션, 연기와 미장센을 결합하고 조율하는 고전적인 균형 감각의 면에서 페데를 능가하는 감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최근에 성가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는 장 그레미용(<아사코>를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가 그의 <하얀 발톱>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역시 우리에겐 아직 낯선 감독입니다만, 지난 4월에 상영된 <여름의 빛>이 보여 주듯,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을 완벽히, 하지만 부드럽게 통제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감정의 결을 표현해 내는 걸출한 장인입니다. 장 마리 스트라웁은 사운드 사용에 대해 그레미용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두 감독의 작품 8편에서 우리는 새로운 만신전의 감독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르셀 카르네는 자크 페데의 조감독을 지냈고, 페데의 뒤를 이어 시적 리얼리즘을 꽃피운 감독으로 평가됩니다. 이번에는 그의 작품 중 시적 리얼리즘의 정점에 해당되는 <안개 낀 부두>, 시적 리얼리즘의 가장 감상적인 면을 보여 주는 <북호텔>을 만납니다. 카르네와 함께 시적 리얼리즘의 전성기를 이끈 쥘리앙 뒤비비에의 영화 네 편은 앞서 말한 프렌치 무드의 정수를 보여 주는 영화들로 선정되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장 르누아르는 어떤 사조에도 배타적으로 속하지 않은 거장이지만, 특히 이 시대에 탁월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화사의 정전 목록에 올라 있는 세 편의 영화를 이번에 만날 수 있습니다. 

20세기 관객에게 프랑스 영화 자체와 동의어가 된 시적 리얼리즘의 걸작들과 해후하면서, 부당하게 잊힌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영화의전당 프로그램디렉터 허문영


상영작
자크 페데: 외인부대(1934) / 미모사의 집(1935) / 플랑드르의 사육제(1935) / 투구 없는 기사(1937)
장 그레미용: 애욕(1937) / 폭풍우(1941) / 창공은 당신의 것(1944) / 하얀 발톱(1949)
쥘리앙 뒤비비에: 아름다운 승무원(1936) / 망향(1937) / 무도회의 수첩(1937) / 하루의 끝(1939)
마르셀 카르네: 안개 낀 부두(1938) / 북호텔(1938)
장 르누아르: 랑주 씨의 범죄(1936) / 거대한 환상(1937) / 인간 야수(1938)
http://www.dureraum.org


출처: 영화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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