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훤 개인전 : 마지막 밤(들) Last nights

스페이스오뉴월

2015년 5월 29일 ~ 2015년 6월 20일



‘선생, 거북이를 두려워하지 마시오*

김현주(독립기획자)


‘마지막 밤(들)’을 준비하며 그곳,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보내는 조난신호에 대해 진훤은 얘기했다. 허무는 전염이 강했다. 어느새 나도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프기 시작했다. 무력감에 웅크리다 방법이 없어 허무와 무력에 대해, 가득 차서 비어버리고 만 곳을 마주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에 나는 그곳에서, 그리고 진훤의 사진에서 조난신호를 보고 듣지 못했다. 그가 조난신호를 생각할 때 나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신호는 타전인데, 나는 누구인가. 송신자인가, 수신자인가. 조난자인가, 구조자인가. 진훤이 수신자이자 구조자의 처지에 이입했다면 나는 내가 송신자이자 조난자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송신자도 아니었던 것이, 내겐 타전을 보낼 대상이 없고 나는 조난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휴게소 틈을 메우는 비너스, 기린, 탱크, 공룡, 무덤, 목각인형, 고인돌은 내게 타자가 아니라 나와 나란하여 못나 미련하기만 하였다. 쉼 없는, 쉼이 있다는 그곳에서 나는 쉬지도, 멈추지도 못한 채 이것들과 홀연히 머무르기만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한편 나는 진훤이 조난신호를 보고 들었음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사진을 허망한 표류에 대한 기억이라고 여겨 그것도 다행이었다. 부질없을지 모를 환상이 그를 살게 의욕하고 끝내 기록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는 모든 인간의 노력 뒤에 기다리고 있는 허무와 마주 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난삽하기 그지없고, 애초부터 쓸모가 없는 그런 작업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머무르기만 하는 나에 비해 조난 상태임을 잊거나 외면한 채 그런 작업에 몸을 던진 그와 그의 작업을 관찰하고 남기는 쓸모없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누군가 찾기 전까지는 진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밖에 없다. 유예된 상황에서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뿐이다.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밤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이제 내가 잠시 봤다고 믿었던 그 밤들을 잊기로 했다. 휴게소, 그곳엔 전리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보다 그곳들에 관심이 간다. 진훤은 낮의 휴게소를 안 믿는 눈치다. 몇 년 간 그는 사람을 찍지 않는다. 풍경이 되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사진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뒷모습만이 담겨 있기 일쑤다. 몇 장의 예외는 있다. 그가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에서 두 장의 사진이 내게 그가 담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 장은 바이칼 호수 알혼섬에서 이동할 때 탄 우아직을 운전해준 이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 너머 진훤까지 응시한다. 혹은 그의 시선에는 카메라라는 물건 따위는 관통하는 힘이 있다. 그때 나는 이 상황에 함께 있었고 그가 던지던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이방인의 방식대로 읽고 도려내는 행각에 대해 그는 흥분하지 않고 질책하고 있었다. 알혼섬의 사람들은 그곳의 영험함을 풍문으로 흘리지 않고 믿고 따른다. 불쑥 다가가서 보고 만지고 해석하고 흐트러트리는 우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런 마주함의 순간이 사진으로 남았다. 또 한 장의 사진 속 아이는 손님이 없을 땐 닫아두는 상점의 아이였다. 물건을 사겠다고, 어머니를 불러주겠냐는 요청에 어딘가로 가서 전한 듯은 했지만 우리의 시간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곳의 시간과 리듬에 재촉하는 무리가 성가셨을지 모른다. 그런 아이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을 거다. 아이에겐 흔히 보이는 호기심이 없다. 오히려 낯선 존재로서의 우리를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대면한다. 이런 마주함처럼 사진 찍음에 대한 묵계가 깨지고 오히려 피사체가 대상에서 본연의 존재로 자리할 때 그들이 사람으로 진훤에게 왔다. 이런 순간은 특별하다. 다시 휴게소로 돌아오면, 그곳엔 꾸짖는 이가 없다. 카메라와 마주할 이가 없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진훤이 낮의 휴게소의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구나 짐작한다.


밤의 휴게소에도 사람은 있다. 진훤은 밤의 휴게소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라고 말했는데 엄살이겠거니 생각했다가 관찰자로 동행한 하루만으로도 그 말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사람이 빠져나간 휴게소에는 야간 조명이 드문드문 비치는 가운데 시동 꺼진 화물차가 즐비하다. 밤의 휴게소의 주인은 화물차라고 해도 될 만큼 낮과 밤의 풍경은 다른 가운데 가끔 불 꺼진 차내에서 자던 이가 혼령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고된 잠을 청하던 그이들은 어느 출발지와 목적지에서는 노동자로 선명하게 살아가겠지만 밤의 휴게소에서는 유령이 된다. 나는 지금 그들의 존재만을 흐리는 게 아니다. 그 밤 나도 유령이 되었고 진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나와 같은 혼령이 그곳에 나직하게 깔릴 때 상대적으로 우뚝 서서 견고한 대상들이 존재감을 발휘한다. 오벨리스크처럼 위용을 자랑하는 노란색 기둥은 죽암휴게소 표지판이다. 휴게소 표지판과 전선줄이 휘감긴 고목은 실제 이 대상들의 크기나 용도와는 별개로 사진에 담길 때 수직성의 기표가 된다. 혹은 대상들의 존재감은 인공조명의 간섭으로 파랗게, 빨갛게 도드라진다. 죽은 이 없는 무늬만 무덤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싶은 농구대가, 사람이 살고는 있구나 싶은 가건물 등이 난립하는 가운데 그런데 쉼이란 무얼까, 휴식이 이곳에 있나, 마치 처음 떠올리는 질문처럼 물음이 솟는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없다’는 베냐민의 언급을 비판적으로 거론하기에는 비판이 취하는 거리감이 도무지 생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조난 상태니까. 누군가 찾아주길 바라지만, 찾아오는 이들조차 이곳에 오는 것만으로 조난될지 모른다. 나는 난처하게만 느끼고 있을 때 진훤은 사진을 찍었다. 내가 보던 빛과 사진의 빛이 다르네요라고 얘기했을 때 그는 카메라는 빛을 쌓는 기계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카메라가 빛을 쌓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고 기록했다.


그가 ‘마지막 밤’이란 제목이 어떻겠냐며 보내준 황현산의 “경무대 앞에서 그 많은 학생들이 무얼 몰라서 총 맞아 죽은 것이 아니며, 거대한 폭력에 에워싸인 광주의 젊은이들이 그 마지막 밤에 세상을 만만하게 보아서 도청을 사수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라는 글귀를 보며 나는 마지막 밤에 복수형을 붙여보았다. 마지막 밤들 혹은 마지막 밤(들). 우리에게는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밤의 역사가 있고 그 밤의 기록자이자 증명자가 여기 존재한다. 진훤의 태도가 내겐 복수형으로 보였다. 내가 혹은 우리가 낙담할 때 그 밤을 밤들로 늘이고 감내하며 거듭 쓰는 이가 있는 것이다. 조난신호는 결국 모두 발견된 신호다. 흩어져버린 신호는 신호가 아니다. 그 갈급함에 화답이라도 했더라면. 구조가 늦었다면 타전을 보낸 이들의 생(生)에서는 공허하다. 수습 못한 주검 앞에 늦음을 통한하고 이제 그 삶을 등재해야 하는 과업이 남는다. 시차 발생에는 ‘순수’한 잘못과 잘못된 실행, 의도된 정치와 경제적 의도 등이 결부된다. 기획된 시차와 사진으로 기록되어 되살아오는 시차는 작가의 허무와 반성으로 갈무리될 대상이 분명 아니다. 그가 쓰는 어휘에 몇몇 허무와 회의의 단어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나는 내가 평소에 떠올리곤 하는 말을 나누고 싶다. 어쩜 누군가에게는 촌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옥중수고』에 남긴 말,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고. (김현주)


*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 보르헤스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 삐에르 메나르가 남긴 가시적인 작품 중 13번째에 항목으로 제시하는 『한 문제에 관한 문제들』의 제2판에 붙은 제사로, 라이프니츠의 조언이다. 제논의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문제>라는 명제에서 아킬레스가 거북이로 하여금 한 지점을 출발하도록 만든 다음 그를 따라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출발한 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거북이는 다른 지점에 가 있고, 아킬레스가 그 지점에 도착했을 때 거북이는 역시 또 다른 지점에 가 있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잡을 수 없다는 역설이다. 라이프니츠가 한 조언 <여보시오, 거북이를 두려워하지 마시오>는 그가 1692년 철학자 시몬 푸처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말로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단위는 무한하지만 그것의 총합계는 유한하기 때문에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논지이다.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픽션들』, 민음사, 1997, pp. 71-72.

** 메나르에 대해 소설의 화자가 썼다. 위의 책, p. 87.





출처 - 스페이스오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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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작가

  • 홍진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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