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래, 노지영 작가의 작업에 관한 대화는 2024년부터 지속적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뤄져왔다. 긴 시간 그들과 대화하며 비슷한 재료를 사용함에도 두 작가의 작업 방향성이 반대를 향한다는 점은 그들이 견고히 서로의 위치에서 조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노지영과 최고래 작가 모두 천, 두툼한 실, 나무 등의 비슷한 재료를 이따금씩 쓴다, 하지만 관객이 작품을 경험하게 만드는 단서를 작가 내면 혹은 외부 환경에서 발견한다는 점이 비교된다. 한 명은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바깥을 바라보고, 반대로 한 명은 바깥에서부터 내면을 향해 들어오는 구조였다. 이에 대해 최고래 작가는 ‘촉각’을 통해 관객과 자신의 접점을 만들며 감정을 건드린다고 표현하였고, 반대로 노지영 작가는 ‘촉각’을 작품 몰입을 위해 활용한다고 묘사하였다.
본 전시는 흘러버린 것, 그러니까 잘 사라지고, 유동적이고, 고정할 수 없는 어떠한 대상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잡아내는 과정을 담아낸다. 누군가에게는 이 흘러버린다는 것이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기억일 수도 혹은 자신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살면서 손으로 붙잡히지 않고 무수히 떠나가는 대상들 중 손으로 어느 것 하나를 잡아둘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두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며 보내온 시간에서 각각의 대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곳은 그들이 손으로 잡아서 뜨거나, 바느질하고, 그리고, 깎아낸 대상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또 해당 전시를 관람하러 온 누군가를 위한 아지트이기도 하다.
이 아지트를 위해 두 작가는 오랜 기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벽에 천을 붙여두고 각자의 무늬를 그려넣는 시간을 가졌다. 같은 방향을 보고 그리지만, 두 사람이 쓰는 색, 패턴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며, 여러번 함께 작업해도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않아 고유한 스타일이 더욱 대조되었다. 이토록 극명히 대비되는 스타일의 천들을 모두 바느질로 엮이고 섞여 잉크 내부에 최고래와 노지영의 아지트를 형성하고 있다.
이 ‘흘러버렸다’는 것과 관련해 덧붙이자면, 이는 단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더 큰 이유 때문에 흘러버렸다고 생각하게 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어느때보다도 깊은 불안과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해있다는 느낌을 반영한다.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넘어, 사회 조직의 근본적인 변화와 혹은 기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구조적 조건도 이 불안함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마치 스스로가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 내외부적으로 끊임없는 적응을 요구하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찾고, 인지 기능은 외부에 위탁되기 쉬워 ‘어떤 것이 나에게 의미있는가’를 계속 찾아야 했다. 과연 우리는 이러한 혼돈 속에서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거나, 스스로를 위한 대상을 직조한다.
최고래 작가는 그물처럼 떠진 두여자(2025)를 제작했다. 화려한 색실로 제작된 ‘두여자’ 작업은 작가의 기억이 저장된 ‘외장하드’와 같다. 실제로 그녀도 ‘두여자’를 외장하드처럼 이용한다고 말하는데, 기억이나 감정을 작업에 녹이면서 떠내기에 다시 작업을 보면 제작할 때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손으로 한땀한땀 뜨여진 ‘두여자’는 쉽게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매체들과 다르게 그 과정이 느리고 순차적이다. 미리 제작할 이미지를 도면으로 뽑아 각 칸을 채워나가듯 바느질해야 전체 작업이 완성된다. 또 전체 이미지를 빠르게 확인할 수도 없어 작가 본인도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틀리면 다시 실을 풀고 제작해야 전체 형태가 보이기 때문에 작업 과정에 많은 품과 정성이 든다. 관객이 처음 작업을 마주하게 되면 색색의 실을 보겠지만, 비슷하게 생긴 격자무늬는 어떤 형상을 품고 있다. 반대편 그림자까지도 작업으로 활용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노지영 작가는 80년대 우후죽순 세워진 ‘바르게 살자’ 돌비석을 현재로 끌어왔다. 전제주의 시대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폭력적 사회의 산물이었던 이 돌덩어리는 80년대 시대의 잔재물로 도시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마치 불량배의 팔에 적힌 ‘착하게 살자’ 문구처럼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기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작가는 이따금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잡혀 있는 삶을 그리워한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선택한 ‘바르게 살자’ 돌비석은 무척이나 가볍다. 스티로폼으로 깎여 비슷한 모습을 하는 이 돌은 세워져있기도, 누워있기도 하며, 실제로 크레인을 사용해야만 직립하는 돌이 마치 사람처럼 눕거나 기대어져 있다. 작가는 이 돌을 계속 움직여 본다. 그는 바르게 살자를 밖으로 꺼내보기도 하고, 밀고 다른 곳에 놓고 돌려본다. 또 비석 위로 흐르는 물을 정성스레 닦아주기도 한다.
우리는 흘러가는 것들 중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대상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 또 내가 흘려보내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살아가는 동안 무수한 질문이 떠오르고 이에 대한 대답을 모두들 각자 찾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덜 흔들리고 더 단단해지게 중심을 손으로 단단히 잡아보자.
기획: 오지형
작가: 노지영, 최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