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허구적 작품 속에서 독자는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들은 버리게 됩니다. 취팽의 소설 속에서 독자는 모든 것을 - 동시에 -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들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들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증식하게 됩니다…"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 보르헤스 전집2 『픽션들』, 민음사)
이 전시는 서로 연관되지 않은 두 지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속해 있는 갤러리의 독특한 구성은 그 자체로 이 전시의 형식이 되었다. 과거 오수 처리용으로 축조되었고,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건립과 함께 보수되어 빈 공간으로 거듭난 갤러리는 거의 완벽하게 대칭적 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독립된 원형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대칭 구조는 곧 전시의 첫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는 우열없이 병립 가능하거나, 병립 불가능하지만 병존하므로 상충할 수 있는 한 쌍의 것들을 고안하도록 했다. 또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라는, 구체적 광경을 즉시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전시명은 널리 알려진 보르헤스의 1941년 단편소설의 제목에서 변형해 온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에서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는 다양한 층위의 시간의 구조를 시사한다. 이에 참여 작가들은 각자 이율배반적이거나, 반복되거나, 병렬하거나, 상보하거나, 상충하거나, 탈구하거나, 다면적이거나, 분열하거나, 공존하는 한 쌍의 - 대칭적 - 작품을 기획했다. 여기에서 대칭은 형식적 대칭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사고에서 분리되어 나온 동일한 무게의 두 가지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들은 완벽한 합리성에서 비껴 나가는 오류 가능성을 끌어 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달아나기도 하고 상관하기도 하는 형식과 내용을 지지하기로 했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관객은 두 공간을 능동적으로 오가며 전시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두 공간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공간의 성격으로 인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줄곧 분절되고 파편화된 조망을 얻게 된다. 이를 조합하는 행위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시차를 두고 발생한다. 이는 마치 두 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을 제시하는 것과도 같은 바라보기의 가능성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한 모든 결말을 능동적으로 도출할 수 있게 한다. 이를 통해 동시간대에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평행우주의 가능성처럼, 동시에 다른 서사와 시간의 흐름이 펼쳐지게 된다.
우리는 조화로이 매끄러운 삶 가운데 불가피하게 떠오르는 권태를 잘 알고 있다. 전시는 이보다, 이질적 요소들의 혼재에서 나오는 불화와 반목에의 경험이, 과거의 무엇이 실현하지 못했던 영역으로 사고를 옮겨 놓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 혹은 다면성은, 21세기를 살고 있음에도 모더니티의 확산으로 인한 반목과 흡수, 또는 탈구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삶이 겪어야 하는 기본적 조건들 중 하나가 아닌가?
전시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 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양가성, 병립 가능성, 모순과 충돌을 지지한다. 직선 위로 삶이 가속하고 있을 때 그 언저리, 위 혹은 아래에 존재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으나 함께 내달리는 다른 선들을 상상한다.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고 단절되기도 하는 시간의 촘촘한 그물 안에서 선들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이 전시에서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원형 공간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내달리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 두며, 또 나아가 가시적이지 않으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동시적 힘들을 매개하는 처소가 된다. 여기에서 또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7기 입주작가의 기획전시 『2013 NANJI ART SHOW』로서 세 번째 전시입니다. 전시는 현재 입주활동을 하는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입주기간이 끝나는 10월 말까지 9회에 걸쳐 지속해서 진행됩니다.
출처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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