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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은 어떻게 시작될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충동적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복되고 지속되는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거기에서 질서와 체계가 생겨난다. 수집가가 어떠한 대상을 모을 때에는 그것의 일반적이고 통념적인 가치, 성격, 의미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그 대상에게 부여된다. 그래서 그만의 수집의 범위와 분류의 기준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모여지고 분류된 자료들은 어쩌면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과 감각을 대변하는 시각적인 지도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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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난쟁이’는 라틴어 호문쿨루스(Homunculus)를 번역한 것이다. 신경해부학에서 대뇌피질이 담당하는 비율을 각각의 신체기관의 크기에 반영하여 그리면 머리와 손이 큰 난쟁이의 형태가 된다. 감각 호문쿨루스에서는 눈이 몸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에 이것을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눈과 손이 거대한 뇌난쟁이의 모습은 남들이 굳이 신경쓰지 않는 것을 시간을 들여 바라보고 관찰하고, 자신을 매료시킨 것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이 전시의 기획은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작가로서, 다른 사람의 작업을 대할 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왜 그것을 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을 지금까지 해오도록 하는가’이다. 나는 이 질문의 단서를 작업의 출발이 되는 자료나 재료에서 찾는다.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형상화하겠다는 충동은 바로 그 자료/재료/원본에서 온다. 이 순간은 호기심의 순간이며 순수하게 미적인 충동의 순간이다. 사람과 사람의 영혼이 마주치듯, 어떤 대상과 작가의 마음이 충돌하는 순간, 그리고 마치 연금술과 같이 A였던 것이 B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하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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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은 오페라를 감상하며 공연을 이루는 음악, 연기, 문학, 무대미술, 건축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한 작품별로 여러 버전의 공연들을 조사하고, 가사집이나 무대 디자이너의 인터뷰, 드로잉들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모은다. 총체예술로서의 오페라는 감상자인 작가의 몸을 매개로 하여 더욱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진다. 오페라의 내용뿐만 아니라, 현재라는 시공간에서의 작가의 감상이 포함되는 그의 드로잉 작업들은 하나의 공연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해석들을 아우른다. 그의 조각적 드로잉과 월드로잉 작품들은 이미지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스스로 팽창하는 느낌을 준다.
노상호는 수집가이자 화가이며 이야기꾼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다양한 용도의 사진들을 수집하고 수집한 사진들 위에 먹지를 대고 드로잉을 한다. 벽의 얼룩이나 구름에서 다른 무언가를 연상하듯, 그는 자신의 수집품들에서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의 상상이 추가된 먹지 드로잉은 원본과는 전혀 다른 낯선 이미지, 낯선 이야기를 갖게 된다. 그의 그림과 이야기는 서로를 왕복하며 서로를 닮아간다. 때로 여러 장의 그림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줄거리를 갖게 되는데, 출처가 전혀 다른 사진들과의 연결고리는 오직 그만이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이며, 사실상 사진을 매개로 하여 되돌아오는 그 자신의 상상력이다.
유쥬쥬는 <더 슈퍼 뮤지엄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여러 나라의 슈퍼마켓과 박물관을 수도 없이 방문한다. 탐사와 조사활동 이후 그는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으로 그 지역의 박물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물이나 민속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은박접시로 만든 갑옷이나 종이 냅킨으로 만든 드레스 등-은 가장 흔한 재료, 가장 전형적인 사물과 닮아 있음에도 어디에도 없는 낯선 것들이다. 박물관에 수집되는 유물들 또한 시공간의 차원에서 사물들을 낯설게 한다는 점, 외부의 시선이 개입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박물관에 대한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이보람은 전쟁이나 테러보도사진들을 수집한다. 수집된 사진들은 이미지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기독교 종교화의 주제별로 분류된다. 분류된 사진들이 그림으로 옮겨질 때, 원본이 가진 색채와 명암, 희생자를 둘러싼 배경이 제거된다. 그림 속 희생자들은 그 결과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떨어져나와 익명의 ‘희생자’, 전쟁과 비극의 은유이자 상징으로서의 ‘희생자’가 된다. 이 과정은 오늘날의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그들의 이미지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감정이 소비되는 방식과 닮아있다.
정문경은 헌 옷들을 수집한다. 새 옷이 아니라 헌 옷인 이유는 그가 수집하는 것이 사물로서의 옷이 아니라, 추억과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옷이기 때문인 듯 하다. 때문에 그가 옷으로 만든 오브제들은 어린시절의 놀이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놀이는 결코 가볍고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는 일부러 옷의 안과 밖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작업한다. 피부 위의 피부, ‘나’와 외부의 경계이자 보호막,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옷은 끊임없이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주세균의 <트레이싱 드로잉 시리즈>는 인터넷상에서 박물관의 도자기 사진들을 수집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는 수집한 사진들을 바탕으로 도자기를 제작하고 그 위에 연필로 무늬를 따라 그린다. 3차원의 입체에 2차원의 이미지를 옮겨 그리면서 발생하는 오차들 때문에 작가는 ‘선택’과 ‘양보’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러한 재배열을 통해 실제의 도자기와도, 그리고 사진과도 닮지 않은 새로운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은 한 사회에서 축적된 규범과 관습들에 따른 삶과 그로 인한 불안함을 상징한다. 고정된 사회적 조건들과 실제 삶과의 괴리는 재배열의 과정에서 생기는 도자기의 하얀 여백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 여백은 다른 가능성들을 함축한 긍정적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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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의 일상적 가치는 수집가/작가/뇌난쟁이들이 부여한 의미들로 대체되며, 그들의 상상이 함께 채워진다. 사실상 수집품들은 수집가들을 되돌려 비추는 거울이다.
(이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