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은 7월 26일부터 10월 16까지 노원구 중계동에 소재한 북서울미술관에서 한국미술계의 대표 원로작가와 21세기 차세대 작가를 한자리에 초대하여 세대 간의 상생적 소통을 모색하는 《타이틀매치》전을 개최한다.
북서울미술관을 대표하는 연례전으로 올해 3회째를 맞이한 《2016 타이틀매치》전은,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특유의 유머와 해학으로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업을 해 온 주재환(1941~ )과 빠르게 소비되고 폐기되는 현대사회의 시각물들에 집중하여 이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작업을 펼치는 김동규 (1978~ )를 참여작가로 초대하였다.
<빛나는 폭력, 눈감는 별빛>이라는 부제 하에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주제로 연령과 시대를 넘어선 예술적 대화를 도출한다. 세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두 작가에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방식을 통해 서로 다름 속에서 세대 간의 연대와 화합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폭력’이라는 공통의 주제 하에 새롭게 제작된 신작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두 작가의 세대 간 간극만큼 서로 다른 시각과 태도를 반영하는 작업들이 대조를 이루며 흥미롭게 펼쳐진다. 원로작가 주재환은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쉼 없이 계속되고 있는 지구상의 전쟁, 테러, 분쟁과 같은 거시적 폭력에 집중하였다면, 차세대 작가 김동규는 일상의 풍경 곳곳에 부지불식간 배어있는 미시적 폭력에 주목한다.
주재환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력 분쟁으로 인한 생명 경시와 살상, 죽음의 힘이 삶의 힘을 압도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분쟁과 살상을 상징하는 오브제와 이미지, 군축평화 운동 단체들의 최근 수년간의 활동 자료와 팔레스타인 현역 만화가의 시사만평 등으로 구성된 이번 작업은 날로 강도를 더해가는 폭력에 무감각해진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낸다.
김동규는 빠르게 효용가치를 다하고 버려지는 현대사회의 시각물들을 포착하여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끈질기게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온라인 매체, 거리의 애드벌룬 입간판, 학교 교실에 걸려있는 국기와 교훈, 반성문 등을 소재로 한 설치, 영상, 드로잉 작품들을 통해 이제는 우리사회의 환경으로 자리 잡아버려 미처 인지하지 못하게 된 일상 속의 폭력을 드러낸다.
세대가 확연히 다른 두 작가의 작업은 한 공간 안에서 대결하고 어우러지는 협업으로 완성된다.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그것을 대하는 태도나 작업화해 내는 방식은 작가 개개인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자 이들 작가가 속한 세대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들이 대변하는 세대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려 이제는 그것을 폭력이라고 인식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일상적인 폭력에서부터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까지를 살필 수 있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주변에 만연한 폭력을 인식할 수 있는 각성의 첫걸음을 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폭력, 그 씁쓸함에 대하여_미술평론가 이영욱
1.
이번 전시의 풀 네임은 길다. “2016 타이틀 매치: 주재환 vs. 김동규 (빛나는 폭력, 눈감는 별빛)”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전시의 두 주체는 원로작가 주재환과 청년작가 김동규다. “타이틀 매치”는 북서울 시립미술관이 원로/청년 작가 간의 상생(?)을 도모하여 기획한 연속전시의 명칭으로 매년 한 쌍씩 올해 세 번째 전시를 연다. 두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폭력’으로 정하고 통합된 한 공간에서 구성해 보기로 합의 보았다 한다. 개막 전 살펴본 전시에서 눈에 띤 것은 통상적인 미술관 전시들과 다른 느낌의 전시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훨씬 대중적이면서 또 계몽적이다. 나는 두 작가가 일종의 ‘예술적 계몽의 놀이터’ 같은 것을 구상하지 않았나 싶다. 작업들은 대부분 이미지와 텍스트, 일상용품들, 자료, 영상 등 온갖 매체들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흥미를 유발하도록 제작되었다. 전시공간은 마치 버라이어티 쇼처럼 다채로운 작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폭력이라는 심각한 주제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특별히 배려한 것일까? 게다가 작가들 각각이 특유의 해학, 위트, 과장, 대비, 놀이, 아이러니, 블랙코미디 등의 요소들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작업들은 자잘하게 흥미롭다. 물론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단순한 흥미로 끝나지는 않는다. 외관상으로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지만 두 작가가 폭력을 대하는 태도는 나이 차만큼 상이하다. 아마도 놀이터를 돌아다니며 하나씩 작업들에 빠져들면 어떤 절실함이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2.
예전에는 작건 크건 남북이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한국 슈퍼마켓에서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 있었다. 6.25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이 아직 활동 중이어서였을까? 하지만 이제 남한의 군인들은 북한에서 핵실험을 하고, 강화도에 포탄이 떨어지고, 함포사격으로 군인들이 죽고, ICBM(대륙간탄도탄)으로 전환 가능한 위성이 지구를 돌아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백화점도 할인점도 편의점도 평시와 다름이 없다. 2011년에 미국의 외교 전문 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관련 전문가들에게 “10년 안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을 묻는 설문지를 돌렸다. 결과는 중동에 이어 한반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전쟁위험이 큰 지역이라는 것. 하지만 이 외국의 전문가들과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 전쟁발발 가능성을 느끼는 감각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하다. 예전과 지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인은 왜 이렇듯 전쟁 위협을 홀대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양치기 효과’, 즉 ‘전쟁이 일어난다’는 거짓말이 반복되다 보니 그냥 거짓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채 버린 것을 들 수 있겠다(물론 양치기 우화는 결국 진짜 늑대가 쳐들어 왔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마찬가지 상황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좀 더 현명해 진 것이라고. 전쟁 위협이 반복되면서 그리고 그 위협을 실제 가능성과 대조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전쟁이 쉽게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 채 버린 것일지 모른다. 일종의 학습효과를 통한 깨달음. ‘전쟁이 쉽게 일어나겠어?’ 그렇다면 이런 답변은 어떤가? 사는 게 전쟁이라서, 곧 눈앞의 전쟁으로 인해 미래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무감해진 것이라는 답변 말이다. 더 나간다면 ‘전쟁이 일어난대도 우리가 어쩔 것인가’라는 답변은 어떤가? 심지어 ‘전쟁이나 일어나라!’까지. 어쩐지 좀 씁쓸한 느낌이 든다.
3.
전시장을 들어서면 왼쪽 긴 벽 전면을 한 작품이 거의 꽉 채우고 있다. 가운데는 거대한 폭격기의 이미지. 폭격기 기체 밑으로는 수많은 미사일이 장착되어 있다. 신기하다. 그 거대한 이미지 아래쪽 밑에 아주 자그맣고 하얀 목각상(빈 라덴)이 놓여있다. 그리고 양 옆으로는 천장까지 쌓아올린 금빛 포장으로 싸여진 박스들... 거대한 박스 덩어리 아래쪽 가운데 부분에는 마치 벽감 같은 굴이 파여 있고 그 안에 있는 것은 프로판가스통이다(어버이연합이 사용했던?). 게다가 그 가스통 아래쪽에는 불이 붙어 불꽃이 올라온다. 순간! 공포스럽다. 이 설치 작업의 가운데 부분은 <크기의 비교: B-52 vs. 빈 라덴>이라는 제목의 작품이고, 양 옆의 박스와 프로판가스통이 엮인 작품은 <폭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앞의 작품은 강하고 거대한 힘과 작고 미소한 한 인간의 싸움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복잡한 세계 정치의 맥락 속에서 작건 거대하건 크기와는 별도로 아니 크기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지속된다. 뒤의 작품 박스 속에는 박스 하나에 10만 달러씩 모두 1조 6천 800만 달러(2015년 세계 총 군사비)가 채워져 있다. 이 박스들을 프로판가스통으로 날려버린다. 테러! 하지만 상상을 통한 테러다. 주재환은 몽상가인가? 아니면 아나키스트인가?
이 작업은 고희를 훨씬 넘어선 작가 주재환의 메시지 혹은 아포리아를 담고 있다. 어찌 보면 그의 이번 전시는 이 작업에 담긴 메시지와 아포리아를 변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싸움을 우주의 시점에서 내려다보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가하면(<부처, 예수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시인의 마음으로 오늘날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들에 대해 묻고 질문한다(<지킬 vs 하이드>). 그런가 하면 전시장 반대편 벽에서 그는 내놓고 계몽을 시도한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20여개 이상의 군축평화행동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활동자료를 선별해서 보여주기도 하고(<무기로 평화를 살 수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알리기 위해 시사 만평가 무함마드 사바네흐M. Sabaaneh의 카툰을 전시하며(<팔레스타인의 눈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워 놓은 기막힌 장벽의 영상을 제시하기도 한다(<분리장벽과 9,11테러 이후>). 그렇다. 우리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으며, 무지가 인류발전에 기여할 일은 없다. 주재환에게 예술이란 사람들이 세계를 포착하는 감성의 체계를 바꾸는 일이며, 그 수단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앞 쪽 긴 벽에는 그의 소품들이 줄지어 놓여있다. 관우, 장비, 여포 등의 피규어를 활용한 <삼국지 농담> 연작들, 일련의 배낭을 활용한 작품들, 그리고 <야전병원>.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의 구성방법론의 주조는 대비효과에 있다. 유난히 작품의 제목에 vs.가 활용된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그가 제시하려는 메시지와 아포리아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 자체가 극적 대비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규어와 텍스트, 여러 가지 기물들을 활용한 이 일련의 작품들은 이야기가 겹쳐지고, 질문이 제기되는 가하면, 상상력을 유발하는 가운데 훨씬 더 다채롭다. 해학과 위트 재미가 마치 양념처럼 첨가된 것과 함께... ‘초전 박살’ 구호가 붙은 배낭 위 권정생의 시구절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은 그냥 그 자체로 절실하고 심각한 울림이 있다. 위용을 자랑하는 항공모함 옆으로 부착된 관우와 장비의 위풍당당한 화려함 뒤쪽으로는 꼬리표처럼 질문이 매달려 생각을 이끈다. <야전병원>은 총알 자국으로 구멍이 숭숭한 달력을 배경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환자(좀비)들의 침울함과 악사들의 서정적 음악으로 이야기와 상상력을 자극한다, <어린이 vs. 국제정치>에는 잠언 한 구절이 적혀있다. “이 세상은 역사적으로 깨진 게 아니라 본질이 깨져 있기에 수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천장 위로는 타겟Taget들이 돌아간다. 이런 타겟, 저런 타겟. 이 타겟들은 비행기 계기판, 레이더, 혹은 미사일 조종판 위의 타겟들이다. 이 타겟들은 우리가 쏘아야할 타겟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목표로 하는 우리를 향한 타겟 아니 바로 우리들 자신, 집, 도시, 삶이다(<타겟 쇼>). 그래선가? <도망가는 임산부>에서 임산부들은 어디론가 달린다. 커다란 전지全紙속 오려지고 잘려지고 뒤집혀 진 그 임산부들은 종이 밖 어디론가 도망친다. 표정은 없고 형태로 남아 행위만이 극대화된 형상들... 한 임산부가 도망치고 또 다른 임산부가 도망친다. 그 옆, 그 위, 그 아래. 임산부들 모두가 도망친다. 함께 혹은 뿔뿔이 도망친다. 도대체 이들을 되돌아 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4.
‘문명화가 진행되면 폭력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이 있었다. 근대 문명의 신화가 아직 설득력을 잃지 않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근대 문명은 폭력을 제도적으로 규제되지 않는 충동과 열정의 산물로 이해했다. 진화론적 사고에 침윤된 이 문명의 옹호자들은 ‘중세의 폭력으로부터 근대의 평화로’와 같은 명제를 부르짖곤 했다. 근대의 법과 제도가 당대의 군사주의 에토스를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같은 착각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교한 반론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반증이 차고 넘친다. 라틴아메리카의 근대성/식민성 연구그룹의 학자인 두셀Enrique Dussel은 근대성이 그 내부에 해방의 합리성과 더불어 타자에 대한 종족학살의 폭력성을 내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도착이 타자의 ‘발견’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학살의 은폐’가 시작된 것을 뜻한다. 지그프리드 바우만 Z. Bauman은 홀로코스트를 ‘우리의 합리적인 근대사회에서,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태어나 실행’된 ‘전형적인 근대적 현상’이라고 천명한다. 그가 보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 가장 체계적이며 가장 조직적으로 자행된 이 폭력 메커니즘의 핵심에는 다름 아닌 ‘폭력수단을 독점한 국가’가 있었다.
오늘날 폭력은 법에 의해 그것이 합법인지 불법인지가 규정된다. 동시에 법은 승인된 폭력으로 법의 정의를 실행, 정립한다. 이렇게 승인의 주체이자 정의의 원천인 법은, 모든 폭력을 법적 주체인 개인에게서 빼앗아, 이들의 폭력을 ‘승인되지 않은 폭력’으로 낙인찍고, ‘승인된 폭력’을 독점한다. 이 승인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다름 아닌 국가다.
5.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육체적 폭력이 행사되는 현장을 목격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았다. 옆집에서, 아래 위 골목 혹은 길가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 물리적 힘을 자랑하는 폭력과 심심치 않게 조우할 수 있었다. 학교는 이제나 저제나 다양한 유형의 폭력을 경험하고 나름의 대처 방식을 배워가는 배움의 장소지만, 예전에는 폭력이 훨씬 가시적이었다. 체벌은 빈번한 일상이었고, 가끔은 폭발적 양상을 보였다. 선생/학생, 학생/학생, 선배/후배들 사이에서 폭력은 교육이라는 과업 수행을 위해 매우 긴요하고 효율적인 관계 맺기의 한 절차였다. 육체적 폭력은 친근한 일상에 가까웠다. 친구건 동료건 아니면 낯선 사람이건 수틀리면 불문곡직不問曲直 근육의 힘을 자랑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모두들 말리는 듯 둘러싸고 그 싸움을 구경하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적으로 공개리에 행사되는 육체적 폭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 장면이 떠오른다. 두 사람이 있다. 서로 멱살을 잡고 ‘쳐봐’, ‘쳐봐’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은 않고 시간만 끈다. 결국 싸움은 그냥 말싸움으로 끝나 버린다. 아마 폭력이 확실한 대가(금전적 손실, 법적 제재)를 지불해야 하는 사안이 되어버린 후부터였을 것이다. 아니 사회의 시스템과 공적 감시의 체계가 개인의 영역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기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감정 폭발이나 완력 과시는 부족하거나 우스꽝스러운 행위의 징표가 되었고, 직접적인 폭력은 점차 이 시스템의 경계 바깥이나 틈새에서만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육체적 폭력은 따라서 점점 더 은밀한 장소에서 비밀스럽게 행해지거나(학교폭력, 가정폭력).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행사했을 때의 이득이 지불해야 할 대가보다 크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행사되기 시작했다(범죄). 그리고 평범한 일상에서 폭력은 이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만일 폭력 총량 보존의 법칙이 관철된다고 한다면 그 양은 줄어들지 않은 채 형질변화를 겪었을 뿐이다. 냉소, 무관심, 계산, 갑질, 왕따, 박대, 윤리의식의 실종 같은 것들... 폭력은 이제 압도적으로 비가시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역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
청년(?)작가 김동규가 ‘폭력’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원로작가의 그것과 퍽이나 다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그가 감지한 폭력이며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이 폭력은 물리적, 육체적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것을 폭력으로 느끼는, 때문에 그로인해 고통 받는, 그러한 폭력들이다. 이 폭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 닿아있는 것일까?
<각개전투>에서 폭력은 ‘사는 게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접근된다. 지금 이곳을 살아내려면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받아내는 일이 불가피하다. 언제는 생존이 그리 쉬웠겠냐마는 지금 이곳에서 생존은 그저 건전하고 성실하다고 될 일이 아니다. 생존하려면 인간의 훼손이 필요하다. 기계와 같은 멘탈과 전투력이 필요하고, 공격무기와 방패를 갖춰야 한다. 작업은 가게 앞에 흔히 광고용으로 설치되던 비닐풍선 입간판을 변형한 것이다. 풍선입간판들은 각각 평화, 행복, 희망, 기쁨, 나눔, 믿음, 사랑과 같은 공허하나 애처로운 상호를 단 이발소, 독서실, 철물점, 노래방, 핸드폰, 부동산, 편의점 같은 가게 것들이다. 이 작품의 요체는, 바람이 통과해 비닐풍선이 떨 때 그 떨림의 생경함과 황당함에 자신의 육체가 공명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시대정신>의 포인트는 인터넷 화면상의 폭력에 관한 기사 제목과 그 주위의 광고 문구를 결합하여 구성한 문장들에 있다. 작가는 족자형식을 빌린 양면 패널의 앞면에 이 문장들을 서예체로 써내려갔다. 총 12개로 구성된 의 패널 작업의 후면에는 작가가 그 문장들을 뽑아낸 인터넷 화면이 캡쳐 되어 있다. 문장의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하자.
“국내 자살자 / 침소에서 대출승인 / 선생님 특별히 모심”
“밀린 임금과 / 바람난 코뿔소가 / 포르노 주인공”
“압도적 성추행 / 방귀를 한 손으로 / 집어던지는 수술”
이 문장들은 와해된 언어를 통해 ‘깨진 세상’을 재현한다. 분열을 강요하는 삶 속에서 분열을 감내해야 하는 주체(라고도 할 수 없는 주체)에게 출현하는 압도적인 비현실의 세계가 이 세계다. 여기서 폭력은 주체와 대상을 관통한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의미사슬이 붕괴된 채 나뒹구는 이 기표 덩어리들을 어떻게 재구성해 낼 수 있을지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있는 듯하다.
<Be cool> 역시 이 같이 ‘깨진 세상’의 폭력을 다룬다. 화면 속 인물은 아마 심각한 정서적 침잠(슬픔)의 상태에 있는 듯하다. 이 작업은 만일 이 장면이 오늘날의 쌍방향 매체 환경 속에 노출될 경우 어떤 일이 생겨날까라는 가정 아래 제작되었다. 댓글을 통해 감지되는 소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소통의 완벽한 단절과 언어의 폭력은, 익명에 가린 냉소와 무심함의 네트웍 세계 속에서 폭력성 자체가 흘러 떠다니는 무형의 실체 같은 것이 되어버렸음을 실감하게 한다.
<슥슥 뱅글뱅글>과 <경련>은 지금 이곳의 교육 환경 속에서 작동하는 폭력에 주목한다. 초점은 규율권력이 야기하는 신체적 작동(어지럼증과 떨림)에 있다. 뱅글뱅글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공허한 규율권력의 순환 체계는 그것이 공허하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그 위력으로 학생을 떨게 만든다. 그 떨림은 공허함이 유발하는 공포를 피교육자의 무의식과 육체 속에 깊이 심어 놓는 절차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떠올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 경우 평화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것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일까? 작업의 화면 속 강가에서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화면으로부터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평화를 노래하는 목소리들은 평화롭지 않다. 거의 악을 쓰듯 불리어지는 노래는 평화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들이 그 가치와 반하는 방식으로 추구될 수밖에 없는 이곳 현실에 대한 일종의 반어다.
청년작가가 바라보는 폭력은 정신과 몸체의 깊은 속 어딘가 심연에 닿아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이 만연된 어떤 힘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수많은 기원을 가진 불확정적인 흐름으로 감지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 시대 지금 이곳의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과 내면을 갉아먹는 일종의 유령 같은 것 아닐까?

주재환, 지킬 vs. 하이드, 혼합매체, 가변크기, 2016
선과 악의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거꾸로 댄 군화
밑창에 베트남 시인 휴틴의 <사람에게 묻는다>를 새겨 넣어 지킬을 표현하였다. 하이드는?

주재환, 야전병원, 들것 위에 종이 및 오브제, 가변크기, 2016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교회는 야전병원처럼 보인다. 위로가 필요한 상처들이 너무 많다.”라는 말을 남겼다. 세계각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분쟁으로 인한 무수한 희생과 고통의 현실은 상처받은 가장 절박한 이들이 모이는 야전병원과 같아 보인다.

주재환, 폭력, 가스통, 불꽃, 꽃다발, 가변크기, 2016
희망이 아닌 절망에 투자하는 천문학적 돈뭉치를 불태워버리는 심리적 테러로서, 쌓아올린 박스 더미의 빈자리에 불꽃과 가스통을 설치하였다. 꽃다발은 이루어질리 없는 희망을 상징한다.

김동규, 검은 개나리, 종이에 볼펜, 153 X 430cm, 2014
광화문의 세월호 추모 광장에서 진행한 퍼포먼스의 부산물들이다. 보도블럭 위에 앉아 A4용지를 볼펜으로 반복적으로 긋는 내용의 퍼포먼스였다. 4월은 아프고 슬픈 달. 추모의 마음에 노랑색을 양보한 개나리는 이제 까맣게 타버렸다.

김동규, 각개전투, 혼합재료, 지름 30cm 길이 400cm, 애드벌룬 7점, 10분에 한 번_30초씩 기립, 2016
한 때 유행했던, 가게들 앞의 춤추는 입간판을 변주한 작품이다. 평화, 행복, 희망 등의 아름다운 상호명을 한 다양한 가게들이 미사일 춤을 춘다.
먹고 사는 게 전쟁 같다는 생각으로 고안하였다. 우리가 매일 치르고 있는
이 일상의 전쟁은 ‘공통의 적’을 상정할 수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다.
전통사회의 장승이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다면, 현대의 간판은 끊임없이 ‘나의 안녕’만을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춤추는 입간판들은 현대적인 장승인지도 모른다.
개막식
2016.8.2.(화) 오후 5시
전시연계 프로그램
작가와의 대화
일시 : 9월 중(2회 예정) 14시 - 16시
대상 : 일반인(50명)
장소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스튜디오 3
※ 프로그램은 미술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으며, 상세 내용은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안내 예정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담당 큐레이터: 전소록 (학예과)
출처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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