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아트랩대전: 노형규

이응노미술관

2022년 5월 3일 ~ 2022년 5월 24일

나를 태워 버리다
이선영(미술평론가)

타원형 화면 안에 파도가 치고 있고 그 한가운데 불 모양의 실루엣을 한 인간이 서 있다. 크기는 작지만 마치 씨앗처럼 노형규의 작품을 이해하는 시작으로 적절하다. 신화 속 미의 여신이 파도의 거품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났다면, 서사성이 강한 작품들을 이끌어가는 이 남성 주인공은 파도와 맞선 불의 인간이다. 싸움이라고 하기에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외력도 막강하고 직립한 존재의 의지도 강고해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구도다. 아래를 향하는 물이나 위를 향하는 불은 그 물리적 양태 만큼이다 상극이다. 노형규의 작품에서 물과 불은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외부의 힘과 이에 맞서는 주체로, 짝패를 이룬다. 또 다른 작품에서 인간과 파도의 만남은 파국적이다. 여기에서 인간에 비해 압도적인 파도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나를 덮는 무언가’이다. 화면을 4개로 분할한 작품에서 푸른 파도는 빛을 받거나 타오르는 상징들과 나란히 하면서, 대조적인 상징군을 도해한다. 작가는 물질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바슐라르에 의해 유명해진 ‘물질적 상상력’은 상징이라는 관념을 시각화하기에 용이한 면이 있다.

노형규의 상징체계에서 파도는 그의 또 다른 중요한 도상인 소금 조각상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파도가 맡는 악역과 달리, 소금은 빛과 함께 꼭 필요한 요소로 간주 된다. 작품 속 소금기둥은 무엇인가를 둘러쓴 인간의 모습이 연상된다. 보호와 속박을 동시에 의미하는 전통의상처럼 소금기둥은 어떤 잠재성을 품은 수수께끼다. 이번 전시에서 그림 속 소금기둥은 조각 형태로도 구현되어 전시장에 설치된다. 불로 단련된 소금은 견고함을 획득한다. 그의 작품에서 불은 금기처럼 양면적이다. 불은 자신을 뒤덮는 외적 부자유스러움을 태우며 스스로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무기이자 물 못지않게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 있다. 하지만 노형규의 작품에 작동하는 상징체계에서 불은 자체 발생적이고 물은 외부의 힘에 가깝다. 그에 의하면 ‘물은 내 안의 뜨거운 것을 식히는 것’이자 ‘타협’이다. 유기체의 모든 생리적 과정은 일종의 연소이기도 하다.

모든 기호가 그렇듯이 기의와의 관계는 자의적이어서, 누군가는 물과 불의 관계를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에 대한 생각은 개인적 이력과 관련된다. 어릴 때 부친의 공장에 불이 나서 집안이 망할 지경이 되었는데, 화전(火田)농법을 통해 재기한 것이다. 작가에게 불은 큰 상처를 주었지만 극복도 가능하게 했다. 노형규의 작품에서 물/불의 상징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변주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주체의 드라마를 쓰게 했다. 불은 희생, 해방, 자유 등을 상징하며, 불이 개입돼야 하는 부정적 상황은 대개 막에 감싸여져 있다. 막은 진리를 감추는 방해물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새는 막에 둘러싸여 있거나 돌 속에 있어서 날아오르지 못한 상태로 나타나곤 한다. 조각가가 돌 속에서 새의 형태를 꺼내줘야 새는 자유로울 수 있다. 바닥에 쓰러진 새는 ‘자유로워야 하나 무언가로 덮혀 그럴 수 없는 상황은 돌 속의 새와 같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대변’ 한다. 새는 다른 작품에서 자유롭게 날아가기도 한다. 종교적 맥락에서 자유는 자의나 방종이 아니라 해방의 서사와 관련 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가복음)라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믿음이란 온갖 종류의 자연법칙으로부터의 절대적인 해방을 의미하고, 결과적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자유, 우주의 존재론적인 규약에 개입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믿음은 탁월하게 창조적인 자유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자신의 원천과 보증과 근거를 신 안에서 발견하는 자유만이 현대인을 역사의 폭압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 인간은 신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한편으로는 자유(자유는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인간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준다. 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 안에 새롭고 독특한 존재 양태를 창시할 수 있게 해준다)를 획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모든 비극에 초역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막이 태워지면 그 내용물도 사라질 수 있으나 불새의 신화처럼 부활할 수도 있다.

막은 인간도 덮는다. 특히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한다. 작가에 의하면 ‘덮인 것은 마치 의복과 같은 역할을 하여 본래의 자신을 가리는 동시에 획일화 시킨다’ 사회에 의해 획일화된 부자유스러운 주체와 해방된 주체의 대립이다. 분신처럼 둘이 함께 등장하여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이들은 빛과 그림자처럼 분열적 상황을 나타낸다. 노형규의 작품에는 태우는 자와 타는 자가 있으며 이들은 동일인이다. 야곱과 싸우는 천사라는 기독교적 도상이 있는 작품도 그러하듯, 해방과 자유를 위한 주체의 싸움은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싸움은 얼마나 치열한지 화장 후 남은 사리에서 영감을 받은 한 작품은 괴물같이 울뚝불뚝한 모습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그의 고집스러운 의지는 그 흔적을 남긴다. 사리 또는 불을 암시하는 소재이다. 새, 떨기나무 같은 자연물은 물론 그 자신까지 구속을 상징하는 막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행위가 바로 태우는 것이다.

작은 드로잉도 포함되어 있는 이번 전시에서 대작에 해당하는 떨기나무는 성경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으로, 나뭇가지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방해하는 막이 가지 끝으로부터 타오르는 중이다. 나무가 타면서 아래에 떨어뜨리는 둥근 반영은 마치 무대 조명처럼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태우기에는 오래된 신화 종교적 관념에 내재하는 정화의 의식은 물론 만능의 힘을 갖춘 대중문화의 슈퍼 히어로를 닮았다. 작가는 ‘스스로 태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 나를 태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다시 탄생한 영웅은 다른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와 예술, 그리고 대중문화, 때로는 정치에 관통하는 서사다. ‘창작 혼을 불사른다’는 관용적 표현이 있을 만큼, 예술적 작업 또한 자신을 불태운다. 작업은 작가의 변신을 닦달하는 과정이다. 작업을 통해서 의미심장한 변신할 수 있는 이가 바로 작가다. 죽음을 통한 재탄생은 작가의 종교에서 면면히 흐르는 메시지다. 젊은 작가다 보니 초월적인 승화보다는 치열한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둠은 빛의 조건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작가의 종교관에 내재한 부분일 수도 있다.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은 고대의 종교관과 비교하여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고통이 지닌 구원의 능력 덕분에 기독교가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고 나아가 고통을 추구하기까지 한다. 엘리아데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역사상의 재난이 닥칠 때마다 이를 선택받은 민족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에 진노한 야훼의 징벌이라고 생각한다. 유대민족의 신은 원형적인 행위들을 창조한 동방의 신과는 달리, 끊임없이 역사에 개입하고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노형규의 작업은 개인사의 차원에 존재하는 신의 현현 또는 현존과 비교할 수 있다.  재생과 부활에 대한 관념도 비슷하다. 불태워버리는 것은 ‘시간을 폐기함으로서 주기적으로 갱신될 필요성’(엘리아데)을 내포한다.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가 통과해야 했던 의례, 즉 통과제의는 ‘제의적인 죽음과 부활을 내포하는 새로운 탄생’(엘리아데)이다. 이를 통한 쇄신은 주체뿐 아니라 예술의 조건이다. 원초적 혼돈을 표상하는 궂은 날씨의 하늘과 바다는 싸움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를 둘러싸고 있다. 물과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불타오르는 주체는 초인이다. 니체가 초인의 모델로 삼은 ‘자라투스트라’가 불을 숭배하는 고대의 종교를 창시한 존재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대 이란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배화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제도로서는 지배적 위치를 상실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것이 종교적 관념이다. 그것은 소박한 기복 신앙부터 대안의 세계관까지 걸쳐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투사하는 소원성취의 장’(프로이트)으로서의 면모가 있는 노형규의 작품은 예술이 종교의 계승자임을 알려준다. 비닐로 꼬아 만든 인형이 불타는 작품은 작가의 ‘고민을 가지고 대신 사라져줄’ 주술적 대상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분신을 화형 시켜버리는 섬뜩한 설정이다. 촛불이 켜진 조각 케잌 앞에 고깔을 쓴 자화상은 유쾌한 파티라기보다는 소수의 희생이 있어야 다수의 안녕이 완성되는 고대 축제의 원리를 내포한다. 작가에 의하면 고깔은 중세시대 종교 재판 때 이단자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고깔과 촛불은 비슷한 형태로 그려졌다. 작가는 스스로를 이단자로 간주하며 초처럼 사라질 것을 예감한다. 타오르는 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다. 껌껌한 우주를 밝히는 유일한 빛이다. 절대적 타자와 대화적 관계를 이루는 고독한 주체 또한 타자이다. 현대미술은 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근대적 주체의 중심 상실과 함께 한다. 하지만 노형규의 작품은 부질없는 희망 사항에 머물기보다는 희망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고난, 고뇌의 과정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작가가 마주한 현실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작품들은 또 다른 차원을 상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관념주의로 굳어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명암의 낙폭이 큰 표현에서 온다. 이러한 낙폭은 형식뿐 아니라 정신이나 정서적인 면도 그렇다. 작가의 영혼을 도해하는 듯한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이 함께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노형규는 자신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인류 문화의 무의식적 상상과 깊이 접속한다. 그것은 일상의 현실을 상대화시키는 또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상상계에 깊숙이 자리한 기독교 이전의 상징들, 가령 토테미즘, 배화교, 불교, 무속적 전통 등 지배적 종교로 제도화되기 이전의 다양한 상상력들이 두루 연구되고 활용하는 작품들은 기괴와 신비 사이에 있다. 특정 종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또는 종교를 연구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강렬하게 욕망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교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개인을 구속하는 현실은 파도와도 같은 압도적인 힘으로 덮쳐온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가 최소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한 말이다. 노형규의 작품에서 현실은 변형을 위해서만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차원의 확보를 통해서 현실과 그 안에 좌표화 된 주체의 위상이 자유롭게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대가는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죽음이다. 하지만 죽음을 통한 또 다른 탄생 또한 예견된다는 점에서 비극은 아니다. 자신의 작업에서 ‘불은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도 있다. 코로나 국면에서 인간 사회는 많은 것을 태웠다. 다행히도 회복의 시기가 점차 다가오는 듯하다. 하지만 작가는 유학을 위해 어떤 시기, 어떤 장소에서의 많은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시간을 맞고 있다. 상징적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별을 겪기도 했다. 사랑하는 것들과의 영원한 이별에 직면하여 작가는 불이 ‘상징이 아닌 현실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불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걸린 연기를 그린 작품은 ‘태워 날라간 것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나뭇가지에 살짝 걸쳐 있는, 그에게서 떠나가는 무엇은 잡히기 보다는 잠깐의 인사를 위해 머물러 있는 듯하다. 새로운 만남을 위한 믿음만이 부정을 긍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참여작가: 노형규

출처: 이응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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