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아트스페이스 한남
2016년 6월 23일 ~ 2016년 7월 21일
음모론자, 공상가, 비주류 과학자, 그리고 적지 않은 일반인들이 책자와 온라인 상에서 끊임없이 회자하는 외계생명체의 출현이나 관련 국가기밀에 관한 이야기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끈질긴 현상이다. 이러한 관심의 이면에는 과학적 호기심이나 단순한 흥미를 넘어 인류의 문명이 처한 현실에 대한 강한 반작용이나 허무주의적 심리 등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 70년대 영국의 지상파 TV방송도중 몇 분 동안 해적방송이 침투한 사건은 외계생명체에 관한 흥미유발이 현재 우리의 문명에 대해 자조적인 반성과 동반되고 있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자신을 외계의 아스타 갤럭틱 사령부의 대변인으로 소개한 한 남성은 변조된 음성으로 그간 우리가 보고 들었던 공상과학물 속의 익숙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그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지구의 운명은 악마적 무기와 전쟁을 벗어나는데 달려있고, 인류의 번영을 위해서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한다는 등의 교훈적인 내용들을 심각하게 들려준다. 해적방송의 전형, 왜곡된 TV영상, 익숙하게 변조된 음성, 공상과학물을 연상시키는 상상적 이야기들의 조합은 그것이 있을 법한 누군가의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시니컬한 반응에만 그치지 않는다. 우습게도 현실과 미스터리한 상상의 경계에서 우리는 이 장난스러운 사기극이 오히려 실재이기를 기대하거나, 혹은 실재일수도 있음을 은근히 믿어보는 뻔뻔한 공상가들로 잠시 변화시켜주기도 한다.
현실을 전환시켜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을 제공하는 장치와 그것을 고안해내는 방법론을 찾는 것이 예술적 행위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구지 외계인이 출현하는 해프닝이 아니더라도 현실에 흠집이 나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UFO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상상과 기대감을 준다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강력한 사회적 이슈, 엽기적 살인사건, 대형 금융사기나 대기업의 전횡, 심각한 자연재난이나 인재 등은 돌연 우리는 안개 속에 있던 현실의 진면목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는 쓰라린 경험에 가깝다.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좌절, 스트레스, 욕망, 박탈감, 무관심과 소외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핵심적 요소인데 이것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조건 속에서 외형적으로 파생된 질서, 자율, 타협, 발전 등의 개념들은 결국 무너지기 쉬운 바벨탑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관습적 태도를 떠나 제3의 눈으로 우리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면, 이미 이상한 것으로 가득하다. 인류가 동굴에서 살아가던 때부터 맞이해 온 희소성의 원칙은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새로운 논리와 정당화를 통해 모습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지속되는데, 인류가 수십 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지성이나 테크놀러지와 상관없이 이 원칙은 공포와 투쟁이라는 현재에도 강력하고 유효한 삶의 굴레를 유지하는 기초를 이루며, 유아기의 교육에서부터 금융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정치가에서부터 현자들의 명언에 이르기까지 견고한 도덕적 믿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희소성의 원리가 결국 권력, 왜곡된 욕망, 사회와 정치문제, 전쟁과 같은 대량살상, 그리고 예술의 동기로까지 작용하고 있다는 명확한 사실과 그로인한 멜로드라마 같은 뻔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 이외의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관습화된 희소성과 권력투쟁의 원리 위에 세워진 이 이상한 세계가 가끔 보여주는 예술적(?) 난장판은 센세이션 하지만 또 쉽게 잊혀 진다. 대형 참사와 금융비리로 잠시 떠들썩해지는 신문의 사회면 기사처럼 우리의 실체를 잠시 일깨워 주는 중요한 순간이 예기치 않게 다가오지만 그마저 어느새 익숙한 것이 되어 사라져버리곤 한다. 일부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는 현실의 장막에 예술적 틈을 만들어 냄으로써 시스템에 함몰되어가는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자극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각 예술가들은 서로 다른 인문학적 접근이나 예술적 전략을 선택하고 특화시킨다. 그런데, 새로움이나 특수성 같은 결과중심적 개념은 결국 희소성이나 권력과 같은 관습화된 틀로 회귀되는 모순을 가질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엘리트주의가 그러했듯 미술과 삶의 경계, 혹은 미술이라는 그 틀 자체가 결정되어 있다는 일방적 사고는 속세만큼이나 모순적이다. 그렇다고 일요화가나 히피문화를 유토피아적 예술의 유형으로 연결 짓는 것은 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하는 단순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착된 억압적 관계성과 배치를 들뢰즈적 역동성과 유연성으로 대체하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가속도를 높이는 장치로서의 예술을 설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주는 한계를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서 보다 명료한 시각을 확보하고, 우리를 둘러싼 기호적 체계화를 거부하거나 단일화된 주체성을 뒤집고 확장시키는 것은 고착화된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찾기 위한 예술적 시도라 할 수 있다.
<특수한 블루마블>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기대에 찬 상상의 결과물이나 문학적 감성의 산물도 아니고, 희소성의 원칙을 뒤집을 만한 대안적 제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리얼리티의 재등장을 통해 주변의 생산물/소비방식과 같은 사물과 현상의 인과관계, 관습/변화 같은 대립적 상태, 인간사회 속의 역할관계, 취미/예술의 경계 등 실재적 대상들의 연결고리를 다르게 뒤틀어 보려는 간단한 게임 같은 것이다. 이 게임이 무척 단순하고 효과적인데, 외형적으로 다양해 보이는 우리의 일반적 삶의 형태와 구성물은 현재의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지극히 일방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약간 다른 의미관계를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무척 엉뚱한 결과로 전환될 수 있다. 사물이나 현상들 상호간 관계 맺음으로 인해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는 그 경우의 수가 무한한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의 관계절편 들은 커다란 구조, 특히 자본주의적 장 안에 묶여있음으로 해서 결국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직업의 다양성, 커뮤니케이션의 확장, 개인의 자율성 보장, 개인소득의 증가 등등 매력적인 수식어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트레스와 경제적 위기의식 같은 것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극단화된 일방향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에게는 다양하고 지속적인 예술적 변조 작업의 소재들로 삶의 주변에서 언제든 찾아볼 수 있다.
많은 동시대의 예술작품이 의례적이고 관습화된 내적구조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예술가를 중심에 둔 창작과정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예술이 주어진 억압적 경계와 약속된 원칙의 파기 사이에서 벌이는 줄다리기는 예술의 가치를 확인시키는 동시에 예술가의 독창성과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바로미터로 작동한다. 이 같은 경계의 미학은 개별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과 작품, 작품과 공간, 작품과 전시테마, 작품과 작가의 의식 같은 확장된 관계 안에서도 시도되는데, 흔히 말하는 시리즈 작업, 대상화와 현전성, 전시의 구성,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 등은 개별적 창작물을 확장된 관계성을 통해 종합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제스처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술이라는 특정한 라벨을 달고 있는 한 장르의 경계, 작가의 주체성, 고착된 시점과 시간성 등 고질적인 모순들과 여전히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인 문제는 삶과 예술의 구분에 있는데, 현재의 조건 안에서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작품의 파편화, 개념적 실패, 탈중심적 창작태도, 지속성, 지역성, 가변성 등 유동적인 의미관계의 생산과 지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 문제가 자연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 보인다. 작가의 변화되는 삶과 함께 드러나는 단편적 사례들이라 할 수 있는 예술적 아이디어와 창작행위를 결정된 의미체계 속으로 편입시키거나, 창작을 변화나 새로움 같은 결과론적 시각에서 가치부여하거나, 예술이 예측가능한 인과적 논리의 한계에 머물 이유도 없게 된다. 개별 작업들은 서로 반응하여 다이나믹하게 이합집산될 수 있어야 하고, 다양한 의미로 재생될 수 있는 틈을 제공하는 장치이며, 끊임없는 게임의 파편들로서 지속되고 확장될 때 비로소 장르의 근원적 모순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특수한 블루마블>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사물과 현상에 관한 예술적 반응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자본주의 중심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움이자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때로는 과장된 것으로서 때로는 냉소와 경멸의 반응으로, 때로는 유희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이며, 자조적인 태도와 무관심한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구성물을 보면, 사용자의 자율적 표현 공간을 표방했던 유튜브와 같은 UCC(User Created Contents)에서 인기몰이와 조회수 공략을 위해 등장하기 시작한 리뷰어들을 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게임중독>은 같은 사회현상에 대한 표피적 비판을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풀릴 수 없는 굴레로 확장하여 해석한다. 퍼포먼스 <블루마블-1만광녕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교육과 사회제반 문제를 제3의 시선에서 풍자적으로 들려주는 시적 표현이며, <3.5미터의 스트레스>는 전시공간의 변형을 통해 미술의 공간성, 삶의 공간성에 관련된 심리적 스트레스의 시각화라 할 수 있다. 무거운 철제 텍스트가 수조 바닥으로 배를 짓누르고 있는 <나의 잘못은 아니다>에서는 사회구조와 구성원을 이원화시키는 데서 비롯된 대형인명사고의 문제를 풍자하며, 아동교육과 사회경제적 관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개별 작품들은 때로는 직접적인 내용으로, 그리고 때로는 은유와 상징의 장치를 통하여 서로 링크되거나, 혼란스러워지기도 하며나, 때로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확장된다. 오브제, 입체물, 텍스트, 영상, 사운드,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형식만큼이나 장황한 내용이 보편적인 정보와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들과 뒤섞여 혼란스럽게 제시되는 이번 전시는 외계인의 해적방송처럼 의심스럽지만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그럴싸한 해프닝 같은 것이다. / 강영민
출처 - LIG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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