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사진미술관
2015년 8월 29일 ~ 2015년 11월 25일
©John Chervinsky, Oranges, Box and Painting on Doo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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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의 이야기다. 상징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들만 진입할 수 있는 이 세상에는 초능력을 지닌 생명체와 사람들이 공존한다. 소설은 분명 판타지인데, 자기만의 달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은 현실에서도 적지 않다. 뜻밖의 계기로 어떤 대상이나 장소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할 때, 그것을 지각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은 시계가 측정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떠나 버린 이가 영원히 사라진 것만은 아니며, 내 마음이 사는 풍경은 지금 이곳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전시 제목 <두 개의 달>은 이런 고민에서 붙여졌다.
이번 전시는 고은사진미술관이 동시대 사진을 좀 더 가까이 소개하기 위해 기획한 ‘고은의 눈’프로젝트의 시작이다. 그 첫 전시는 그동안 한국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써 온 휴스턴 포토페스트와의 교류를 겸해 꾸렸다. 참여 작가들은 모두 2014 포토페스트 포트폴리오 리뷰 참가자들이다.
전시는 크게 두 축에서 이뤄진다. 현실 세계가 온전치 않음을 예민하게 인식한 작가들이 포착한 세상과, 카메라를 통해 우리의 지각 영역 바깥을 경험해 보고자 하는 시각 실험을 곁들인 작업이다. 물론 두 갈래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전시의 한 축은 죽음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 공교롭게도 시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죽음은 삶의 끝이자 바깥이라는 점에서 가장 익숙하고 흔하게 경험하는 또 다른 세상이다. 문제는 이 사건이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처럼 대립항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이애나 마타는 시아버지 자발라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살았을 수도 있고 숨을 거뒀을 수도 있는 실종 상태다. 카타피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자발라는 20여 년 전 비밀 경찰에 납치되었다. 그 뒤 그가 수용소에서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끝으로 생사도 소재지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증거>는 리비아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실종되었거나 희생당한 이들의 흔적을 쫓아간 6년 동안의 프로젝트다. 일기에서 발췌한 짧은 글을 곁들인 이 작품은 일상에서 접하는 리비아 소식과 시아버지를 향한 가족들의 그리움으로 시작해, 카다피 정권이 무너진 뒤 마침내 방문한 리비아에서 시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진행된다. 마타는 리비아 곳곳에서 시아버지의 처형을 암시하는 상황들을 목격하지만, 그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의 죽음을 확인할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사진이 존재한 것들의 흔적이라면, 다이애나 마타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부재의 흔적을 묻는다. 존재의 흔적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부재의 흔적은 그가 어딘가에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도 하다. 자발라는 부재의 흔적조차 없이 존재와 부재의 공백 사이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리엘라 산카리는 다른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모세로 알고 있는 작가의 아버지 ‘모이세스’는 마리엘라가 어렸을 때 스스로 생을 마쳤다. 쌍둥이인 그녀 자매는 아버지의 시신과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없었는데, 어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별 의식을 생략한 채 아버지에 대한 상실감을 견뎌 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쌍둥이 자매는 긴 혼란과 방황을 겪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현실 세계에서는 사라졌지만, 마리엘라의 마음 속에서는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길거리나 카페에서 혹시 아버지와 마주칠지 모른다는 강박에 빠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속 아버지도 같이 늙어 갔다. 결국 작가는 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아버지 대역을 해 줄 70대 노인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그 나이였다. 그렇게 만난 가상의 아버지들은 실제 ‘모세’가 입었던 점퍼나 스웨터를 입고 작가의 카메라 앞에서 진짜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이 치유 의식을 통해 작가는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아버지가 아니라, 말 못 할 괴로움 때문에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되찾는다. 영원한 공백 속에서 시아버지와 만나지 못하는 마타와 달리 산카리는 가짜 아버지를 통해 진짜 아버지를 소환시켜 끝내 조우한다.
반면 리디아 골드블라트의 아버지는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스물네 살 연하의 아내를 맞이해 예순에 작가를 얻은 아버지는 이제 죽음 앞에서 한없이 연약하다. 물리적으로는 생명이 다한 이의 희미한 미소와 느린 움직임은 생의 경계, 육신의 한계에 대해 질문케 한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지만 곧 숨을 거두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상을 비롯해 집 안의 평범한 대상들을 번갈아 가며 주목한다. 마치 존재하는 것들은 한없이 약하고, 그래서 숭고하다고 말하려는 듯이. 아버지가 정신분석가였다는 것도, 어머니가 나치에게 추방당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도 사진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모든 굴곡진 사건들을 거쳐 사람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이 일생 동안 이룩한 모든 것, 이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행하는 어리석은 폭력은 죽음 앞에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다. 인간을 그들이 왔던 태초의 상태로 돌려보내려는 보이지 않는 기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자연의 의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경험을 통과해 온 이들이 접하는 풍경이란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다이애나 마타가 텅 비어 버린 학살 현장에서 나무들을 목격자로 지목하는 것도, 마리엘라 산카리가 거리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마주하는 것도, 리디아 골드블라트가 아버지의 죽음 후의 세계를 감지하는 것도 우리의 내면이 풍경 너머와 교감을 시작한 탓이다. 눈 앞의 풍경은 내면의 상처와 기억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한다. 서울에서 자라 지금은 뉴욕에 살고 있는 민혜령에게 서울과 뉴욕은 두 개의 고향이다. 어느 곳에 있어도 익숙하고, 언제나 반대편이 그립다. 때로는 어느 도시에 있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뉴욕 주택가 길모퉁이를 돌다가 문득 어렸을 적 들락거리던 가게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단순한 착각이라 하기에는 몸에 새겨진 기억의 본능적 반응에 가깝다. 그렇게 서울에서는 뉴욕의 달을 보고, 뉴욕에서는 서울의 달을 본다. <개인적 풍경>은 이렇듯 두 장소의 기억이 엉킨 작가가 뉴욕과 한국의 풍경을 뒤섞어 만들어 낸 그만의 장소다. 아주 꼼꼼하게 들여다보지 않는 한 상상 속의 풍경이라는 것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붉은 벽돌 건물은 나지막한 잿빛 지붕을 만나 묘한 익숙함을 풍긴다.
다른 참여 작가들이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면, 피터 레이튼과 존 세르빈스키는 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의심을 실험적 작업으로 표현해 낸다. 사진가이면서 하버드대학의 응용물리학자인 존 세르빈스키에게도 시간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물리학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살면서 느끼는 시간은 일종의 기다림 같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한 장면에 다기는 방법을 고민했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머나먼 중국, 이름 모를 화가의 손길을 빌린다. 스튜디오를 만들어 사진을 찍고, 다시 그 사진 속 장면 하나를 오려낸 뒤 중국으로 보내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요청한다. 현상소에서 사진을 뽑듯이, 이름 모를 화가가 고객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려 주는 그 공장은 작가가 사는 곳에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다. 요청한 사진이 그곳으로 갔다가 그림이 되어 돌아오기까지 정확히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상징적인 시간 동안 스튜디오에서 모든 사물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시간을 버틴다. 그 시간의 흐름은 스튜디오 안의 시들어 썩어가는 과일, 바람이 빠져 쭈글거리는 풍선이 증거할 뿐이다. 마침내 그림이 도착해 애초의 스튜디오 안에 걸리면, 과거의 시간에 현재의 시간이 중첩된다. 자신의 그림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짐작하지 못하는 무명 화가도 그 속에서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렇듯 <스튜디오 물리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숱한 변수와 우연까지를 건드린다.
물론 그 우연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피터 레이튼은 기억의 파편이나 사건을 재구성함으로써 상상보다 더 극적인 현실을 만들어 낸다. <플루토늄 폭발에서 살아남은 남자>는 먼 미래의 신인류가 발견한 과거의 사진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신인류의 눈에서 볼 때 과거의 인류, 즉 현재의 사람들은 진보적인 과학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폭발로 멸망할 만큼 어리석고 야만적이다. 이런 설정 속에서 작가는 버려진 옛날 사진을 합성하여 내용을 재구성한다. 엉뚱한 상황, 우스꽝스러운 포즈 등을 나열한 사진은 가볍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풍자가 들어 있다.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해 모호함을 일으키며 사진이 단순한 선행적 사건의 기록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번 전시가 은유하는 두 개의 달 사이에는 존재와 부재의 경계 지점, 시간과 시간 사이의 침묵, 기억 속 풍경과 실제 공간의 오차 등이 존재한다. 그 사이는 텅 비어 있지만 두 달의 인력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역학 관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달과 태양은 음양이자 흑백이지만, 달과 달은 결국 한 몸에서 태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 버린 모든 존재의 이면을 상징한다. 그 사이의 공백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감지된다. 세르빈스키 스튜디오의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 같이 머물듯이, 마타의 사진 속 나무들은 사라져 버린 아버지의 기억을 감지하듯이…. 사진이 더 이상 존재의 흔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보이지 않는 틈을 연결하는 일은 사진의 또 다른 몫일지도 모른다. / 송수정 (기획자)






출처 - 고은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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