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블루갤러리
2023년 9월 4일 ~ 2023년 9월 9일
먼 길을 돌아 어느 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용인된 '예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일전 나의 평범하고도 진부한 삶의 염증을 작가 또한 느꼈던 바, 그 어린 마음은 예술을 일종의 대피소로 삼기에 이르렀다. 아니, 오히려 작가는 일찍이 그랬다. 발매한 음악을 알리고자 어떻게든 노력한 수년의 모습이 내겐 있다. 당시 나는 그게 싫었다. 남모르게 써 온 글과 시는 나의 서랍 안짝에, 어떨 땐 그마저도 누가 볼까 항상 내 품에 안았던 그때, 나의 오랜 친구이자 작가는 학교 정문에서 자기 앨범을 사달라며 호소했다. 우리는 20 여 년의 대화에도 좁혀지지 않은 각자의 고집이 있었고, 이를 안줏거리 삼아 술을 마시며 침을 튀겼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실천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미끄러졌고, 작가는 있는 힘껏 매달렸다. 그리고 2 편의 영화는 이러한 대립각을 견디다 못해 전시되고 말았다. 나는 이 필름을 감추고 싶었고, 작가는 어떻게든 결실을 보려 했다. 섬을 다녀온 후 나는 갖은 핑계로 (우리만의 서툰) 포스트 프로덕션을 미뤘고 사막으로의 여행은 함께 할 자신조차 없었다. 그 사이 작가는 현상과 편집, 내레이션과 사운드를 홀로 끝마쳤다. 그리고 결국, 오지로의 탐험을 비롯한 필름 작업에의 해소는 다시금 공허함이 되어 그를 새로이 추진케 했다.
1964 년,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현실 세계(real world)를 비틀어 필름 세계(reel world)로의 당대를 진단했다. 하지만 또 한 번 비틀린 바야흐로 릴스(Instagram reels)의 시대에, 필름의 역할은 무엇인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형식상의 매체로서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사료가 오늘에 이르러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일 프레임은 오늘날 무빙 이미지의 찰나에서 벗어나 종(縱) 스크롤로 무한히 증식하는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으니, 꺼내든 8mm 필름은 현상된 무엇이기보다 잠상(latent image)1에 가까웠다. 불편하고도 고단한 필름의 프로세스를 입과 빛바랜 활자로 되짚어가는 이토록 무용(無用)한 작업은 얼음덩어리가 녹고 불타는 공의 화염이 사그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도시를 헤매는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s)의 모순처럼, 아무것도 아닌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작업은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거나 인물의 연대기를 톺아보려는 다큐멘터리적 시도가 아닌 지극히 자전적인 여행 일기로, 어떠한 기술적⋅영상 미학적 가능성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이의 계기는 충동이며 목적의식조차 없는 매체를 향한 작가의 호기심뿐인 투박한 영상에 다름 없다. 그리고 이는 아마추어라는 혹은 과거 홈 비디오와 8mm 필름의 상용화로부터 이름 매겨진 에이트 맨(8mm man)을 단순 복기할 따름이다. 나아가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때의 실천을 그저 나를 수식하기 위한 무용담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방식으로 소비하고 장식했다. 그 흔적을 유의미한 순간으로 둔갑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처음 카메라의 트리거를 당기며 들려온 낯선 기계음은 우리를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현상을 위해 무턱대고 전화를 돌렸던, 조언을 구하고자 영화인이 산다는 구기동의 한 작업실을 찾았던, 수입이 중단된 슈퍼 8mm 필름2을 구하기 위해 풍물시장에 들러 먼지가 켜켜이 쌓인 필름 더미를 헤집고 사장님의 오랜 꿈을 들었던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이 또한 적어도 내겐) 또렷하다. 짐작건대 우리는 함께 눈꺼풀마저 얼어붙을 북극의 한복판에서 얼음덩어리를 끌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건조한 사막에서 타오르는 공을 굴리고자 했던 것 같다. 더 세차게 얼기를, 더 거세게 불타오르길 바랐던 것 같다.
“아마추어리즘은 질적 판단을 폐기하려는 개념이 아니다.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바로 여기에서부터 구축할 방법을 제시하는 개념이다.”3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적어도 '아마추어'라는 애매한 개념은 작가에게 있어 자신의 한계를 꿰맞추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 무엇이 '전문적'인들, 작가는 '아마추어' 혹은 '아마추어리즘' 등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매체 그 자체에 한정된 까닭이며, 마치 작업을 개인 삶 전반의 대리물로 앞세워 어설픈 자기 능력을 방어하려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할 수 없기에 빛에 가닿지 아니하고픈 나의 마음은 잠상이요, 그 무엇도 완전할 수 없기에 직접 눈으로 보고픈 작가의 실천은 현상이 되었다.
판단의 기준을 자기 자신으로 두지 못한 나를 반추하며, 앞서 동의한 구절과는 모순적인 나의 태도를 느낀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에는 작가의 영향이 미치는 듯하다. 간직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것.
아홉 살 혹은 열 살 무렵, 작가가 마련한 생일 선물을 아직 나는 간직하고 있다. 군것질거리를 사준다는 쿠폰이었다. 거기엔 “700 원짜리 아이스크림은 비싸니 웬만하면 500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고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것을 언제 쓸지 곰곰이 생각만 하다 20 년이 흘렀다. 금색 백화점 상품권 봉투를 쿠폰 크기에 맞춰 얼기설기 자르고 접은 흔적, 삐뚤지만 힘 있게 눌러 쓴 잉크의 번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때를 놓친 오랜 쿠폰을 나는 언제야 사용할 수 있을까? 필름에 갇힌 기억을 꺼내기에 나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1 현상에 의해 흑화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상, 필름이 빛에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상을 의미한다.
2 슈퍼 8mm 필름은 1965 년 코닥에서 발표한 것으로, 기존 8mm 필름의 화면을 50% 넓게, 초당 16 프레임에서 18 프레임, 연속 50 피트 촬영 또한 가능하게 했다. 이는 가족 중심의 홈 무비, 다큐멘터리 등의 일반화에 크게 공헌했다.
3 이여로.(2021).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문학과사회,34(3),115-116.
글 전세운
참여작가: 공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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