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2021년 9월 24일 ~ 2021년 10월 17일
그래서 낯설게, 나는 읽어나간다
글 임보람
“우리의 삶보다도 더 우리 것인 것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느지막이 존재한다, 그리고 느지막이 우리의 것이다, 바로 우리이다.”1) 존재의 본질은 실존이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선택하고 존재에 물음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지금’(now), ‘여기서’(here), 살아가는 현존재(dasein)가 된다. 현존재로서 인간은 각자의 삶의 형상으로 살아가고, 그 삶들은 자신의 고유한 실존이 타인과 맺는 관계를 이해한다. 너와 나, 타인과 타인이 맺는 관계가 있어야만 비로소 존재가 현실이 되는, 네가 있어야 내가 현실이 되는, 그러한 세계에 살면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도 특정한 법칙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프랙탈 도형처럼 반복된 형상으로 얽힌 관계의 그물망 속 어딘가의 지점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를, 타자의 서사를 읽는다.
‘그래서 낯설게’는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1935)의 싯구 한 부분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수많은 이명(異名)을 가지고 살았던 그는 이명들이 가진 각기 다른 삶과 정체성에 대하여 개인적 서사를 구축하고 그 서사에 숨을 불어 넣었다. 타인에게는 낯설고 얼핏 이 사회의 시의적 관심사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개인적 서사들은 자기 생의 체계 안에서만큼은 찬란히 빛나는 틈과 순간을 가지기도, 공허한 불안과 존재의 망각을 극복하려 애쓰기도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낯선 타자적 위로를 갈망하고, 또 스스로 타자를 위한 낯선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낯선 위로와 망각의 틈을 비집고 나온 서사의 목소리들은 더이상 개인의 서사가 아닌 이 사회를 구축해 온 우리의 서사가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전시에서, 그래서 낯설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지도 모를 타자의 서사를, 어떤 순간을, 내밀한 기억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정철규 작가는 지난 2020년부터 ‘전달 인터뷰’라는 기제하에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2020) 연작을 시작했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작가에게 들려주었고,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치 ‘맞춤옷 재단사’처럼 각각의 이야기로부터 이미지를 짓고 재단했다. 전체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을뿐더러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로부터 한 조각의 글과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한 조각의 이미지를 건네받았다. 작가는 충실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메신저’였으면서도, 동시에 충실히 이야기를 감추고 지워진 이름들의 그 은밀한 서사를 스스로 품은 ‘대나무숲’이었다. 이렇게 존재들의 그물망 어딘가를 차지할 개인적 서사들이 차곡차곡 쌓였을 즈음, 작가는 <브라더 양복점>(2021)을 열었다. 지난 5월 <브라더 양복점: 1호점>(2021)으로 시작된 이 연작 프로젝트는 이번 전시에서 <브라더 양복점: 팝업스토어>(2021)로 다시 문을 연다.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가 44명의 특정 인물들(물론 호명되길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의 서사였다면 <브라더 양복점>은 불특정한 인물들의 서사를 접한다. 양복점에 찾아온 이 ‘불특정’한 서사들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의 긴장된 상태에서 작가와 오목을 두기 시작하고, 이 오목을 두는 시간은 곧 은밀한 서사가 문을 여는 순간이 된다. ‘오목 두기’는 이미 정확한 수치로 그려진 그리드(틀) 위에 재단사(작가)와 고객(관객)이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 혹은 의도할 수 없는 형상을 생성하는 행위다. 오목을 두며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면, 양복천과 실을 고르거나(1호점), 마주 앉아 바느질을 하며(팝업스토어) 이야기를 지속하고, 작가는 비로소 마주 앉은 타인의 개인적 서사에 재량껏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재단사와 마주한 고객이 오목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양복천과 실을 고르면서,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 특정한 예술적 이미지의 ‘창조’에 관여함으로써 <브라더 양복점>은 수행(遂行, performance)적 관습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 불특정한 다수의 서사들을 수집한 작가는 다시 한 땀 한 땀, ‘바느질’의 수행(修行, practice)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이 두 가지 수행(遂行, 修行)적 행위는 타인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서사의 주인공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작가 자신을 중심에 두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며,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떠세요? 라는 물음을 던져보고자 한다”2)는 작업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수행을 거쳐 생성될 이미지는 나의 이야기이며 너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스스로를 ‘마음 맞춤 재단사’라고 칭한 작가가, 개인의 서사에 개입하고 관계 맺는 수행(遂行)의 과정을 수행(修行)하듯 실천하면서, 존재들의 그물망에서 부유하는 우리를 타자적 위로가 수반된 그 어딘가의 지점으로 이끌 부표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익명의 개인적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문세연 작가의 작업에서 이와 달리 좀 더 보편적인 범주로 펼쳐진다. <이름보다 짧은>(2021)의 10개의 캔버스 위에 전사된 이름들은 작가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여성 이름들로 선정한 것이다. 작가는 20대 여성의 자살률 증가라는 사회적 현실을 마주하고, 익명인 그들의 사연을 전유할 ‘이름’을 찾는다. 각기 다른 생을 얻고,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며,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다, 각기 다른 연유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들에게 ‘가장 흔한’ ‘20대 여성’의 이름들을 나열해주고, 장수의 기원으로서 명주실을 바느질한다. 명주실의 의미는 돌잡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첫 한 해를 무사히 보내면 돌잔치를 여는데, 돌잔치에서는 ‘돌잡이’를 통해 여러 가지 축복과 기원의 의미를 담는 의식을 치른다. 책이나 연필을 잡으면 학문에 정진할 것으로, 쌀이나 돈을 잡으면 부자가 될 것으로 기원하는 등 다양한 돌잡이 물품들 가운데에서도 명주실(실타래)은 ‘장수’를 기원한다. 작가는, ‘길고 튼튼한 명주실 같은 삶을 살아야 했을’ 그들이 각자의 숨겨진 사연이나 삶의 어떤 ‘결핍’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현실을 ‘이름보다 짧게’ 바느질된 명주실에 전의(轉義)한다. <축원들>(2021)은 마치 제단의 형상처럼 나열된 짧고 긴 ‘소원성취 양초’들과 함께 여러 개의 문장이 전사된 3개의 캔버스로 구성된다. 이 문장들은 수많은 ‘이름’들의 뜻풀이로서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주는 이름들에는 각기 뜻이 있고, 그 뜻 속에는 부모의 축원과 바람, 기원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生)을 얻는 순간 붙여지는 ‘이름’과 생을 살아가는 동안 ‘기원’이 될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 생의 유한한 시간, 타 들어가며 축적되는 그 비가시적 시간을 함축하는 양초가 종교 제단과 같은 형상으로 세워지면서, 녹아내리는 촛농이 축적된 시간과 함께 축적된 염원의 시간을 의미하고, 아직 ‘남아있는’ 생이 그 염원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인간의 생은 유한하며,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생(生)을 얻고, 젊음, 늙음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死)를 향해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과 사를 동시에 얻는 일이다. 젊음의 시간은 다가올 미지의 시간 때문에 불안하고, 늙음의 시간은 살아온 시간의 축적만큼이나 고독하다. 젊음과 늙음, 인간의 ‘생애주기’는 개인의 서사 위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불규칙한 길이로 재편되겠지만, 여전히 생은 유한하다. 전지인 작가는 세 개의 작품을 통해 개인의 생에 존재하는 각기 다른 생애주기의 ‘어떤 시간’을 언급한다. 전시장 입구 전면에 설치된 <White Shadow>(2020)의 이미지에는 익명의 신체 위에 흰 머리카락 한 가닥이 걸려있다. 정면에서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쉽게 연령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각적 정보들을 거두고 피부와 머리카락과 같이 제한된 소수의 기호만으로 관객에게 접근함으로써 ‘젊음’으로 치환되는 건강한 신체와 그에 상반되는 기표로서 ‘흰 머리카락’이 대비되며 신체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와 사회적 존중(혹은 대우)의 시기와의 대조와 결합이 기의로 작동한다. 젊은 신체와 흰 머리카락은 가시적 기표이며 관습과 보편의 기호다. 작가는 이 두 가지의 기표를 결합함으로써 관습적 시선을 넘어서서 존중받고 싶은 개인을 은유하고자 했다. 중층적 기표로서 결합된 이미지는 ‘개인의 서사에 따라 재편된 각기 다른 생애주기’로서 다시 두 개의 다른 시간을 결합한 기호가 된다. 이 두 개의 다른 시간은 무빙이미지에서 더욱 결속력을 가질 수 있는데, <White Shadow: Talisman>(2021)에서 흰 머리카락의 시간은 젊은 신체의 시간에 달라붙어 움직이는 ‘부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White Shadow>가 전시장 외부에서 벽을 향해 등을 돌린 신체 이미지의 스케일과 마술적 시각성으로 관객을 이끌면, 전시장 안으로 들어온 관객은 <White Shadow: Talisman>에서 움직이는 시간의 기호를 접하게 됨으로써 다시 기표의 시각적 변환을 경험한다. 전지인의 또 다른 작품 <Period>(2020)는 저마다 개인적 경험과 서사 속에 존재하는 조건 없는 환대의 기간, 어떤 특별한 ‘유예기간’으로 관객을 소환한다. 두 개의 채널에 등장하는 퍼포머들은 카메라 너머의 특정한 대상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그 대상을 향한 반응-표정과 언어-을 대본 없이 연기한다. 이들이 상상하는 대상이란 ‘어리거나 연약한’ 존재이며 이들의 반응이란 ‘환대’와 같다. 퍼포머들의 ‘환대’는 ‘유예 기간’을 위한 소격효과 장치다. 생애주기에서 생 이후의 일정 시기를 지나 사회적으로 ‘어른’이 된 퍼포머들(이자 우리들) 역시 과거 어느 시기에는 ‘어리거나 연약하기’ 때문에 어떤 사회적 기준이나 조건들-성별, 나이, 직업, 학력과 같은-에 무관하게 순수한 ‘환대’를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관습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시선이 향하는 그 친숙하고 익숙한 환대의 대상은 드러나지 않으며, 환대의 장치는 개인의 서사 속에 존재하는 ‘유예 기간’의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도록 유도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테의 수기』(1910)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아이들이나. 아이를 가진 채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서글프도록 아름다웠던가. 가녀린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살짝 올려놓은 그들의 부푼 몸속에는 두 개의 열매가 들어 있었으니, 하나는 아이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3) 인간이 생(生)과 동시에 사(死)를 얻을 때, 생과 사의 서사가 쓰여질 때, 유한한 생이 불안을 마주하여 불멸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너와 내가 타자가 되고 타자와 타자가 현존재의 위상을 얻을 때, 지금 여기 우리는 두 개의 열매를 이야기하며 서사를 쓰고 읽어나간다. “그래서 낯설게, 나는 읽어나간다, 마치 페이지처럼, 나 자신을, 다가올 것을 예상치 못하면서, 지나가버린 건 잊어가면서. 읽은 것을 귀퉁이에 적으면서 느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읽어보고는 말한다, ‘이게 나였어?’ 신은 안다, 그가 썼으니.”4)
1) <병보다 지독한 병이 있다>, 1935.11.19., 페르난두 페소아
2) 정철규 작가노트에서 발췌
3) 원문을 부분 발췌, 편집하여 인용하였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직접 보거나 들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다 똑같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을 갑옷 안쪽에 마치 포로처럼 지니고 다닌 남자들이나, 늙어서 자그마해졌다가 나중에 가서는 마치 무대에 올라온 것처럼 어마어마한 침상에서 온 가족과 하인들과 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중하고도 품격 있게 죽어간 여자들이나. 그래, 아이들, 아주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아이들의 죽음을 죽지 않았고, 온 정신을 다해서 이미 자신들이 가꾼 죽음과 더 살았으면 이루어냈을 죽음을 죽었다. 아이를 가진 채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서글프도록 아름다웠던가. 가녀린 두 손을 자기도 모르게 살짝 올려놓은 그들의 부푼 몸속에는 두 개의 열매가 들어 있었으니, 하나는 아이이고 또 하나는 죽음이다. 큼직해진 얼굴에 번지는 진한,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듯한 미소는 두 개의 열매가 자라고 있음을 가끔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4)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1930.8.24., 페르난두 페소아
참여작가: 문세연, 전지인, 정철규
주최/주관: 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
출처: 플랜비 프로젝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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