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창창작스튜디오
2015년 8월 21일 ~ 2015년 9월 2일
school uniform Digital Printing 2015

일상, '시간의 순연'과 우연적 필연
1. 작가 김은혜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일상, 흔적, 기록, 우연성 등이다. 그리고 그 텃밭은 지금 이 순간, 여명처럼 깨어 마주하는 현재-그 내부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 관한 자문자답에서 비롯된다. 이를 확장하면 작가의 작업은 본질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기저로 여러 평범한 사물들과 시공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표상화 된 의식과 침잠된 의식의 접점에서 어떤 비필연적 현상에 의해 잉태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상의 의미들이 '예술' 속에서 재해석되고 옹립되었다가 다시 해체하는 수순을 반복하는 과정 자체이며, 그의 작품들은 그것을 가시화하는 하나의 매개라 해도 그르지 않다. 물론 여기엔 작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한 (인과관계가 거의 없는)뜻밖의 파편들이 자연스럽게 똬리를 틀고, 그 파편들은 심리적이거나 일상의 단면 등, 각각의 의미로 치환되어 드러나게 된다.
허나 김은혜의 작업들은 지나치게 자기 안위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표현역량을 보더라도, 작업에 대한 고민을 보더라도 건설적인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음엔 틀림없지만 자신을 포함한 공감을 포박하며 확산되는 양태에 젖거나 어쩔 수 없이 연계되는 내밀한 사회적 맥락을 건드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도 크다. 특히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예술의 기본적인 존재이유를 말하지 않더라도)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로써의 기능, 확장성은 희미하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작가 김은혜의 몇몇 작품을 통해 짚어보기로 한다.
2. 먼저 그가 지난 2014년 선보인 작품 <세계지도 선들을 이용한 종이접기>는 겹겹이 쌓인 기존 지도 이미지를 2차원적인 평면에서 3차원 입체로 탈바꿈시킨 작업이다. 평면성에서 이탈해 실제에 대한 가상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 한 이 작업은 물리적, 시공의 거리감과 현재 및 과거 사이에 드리워진 간극을 종이접기라는 행위를 통해 구체화하고, 이를 특정한 공간에서의 재구현함으로써 일상 속 잠재태에 머물던 편린들이 이전과 또 다른 현실태로 견고히 고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작가의 일상적 오브제이며, 이는 현실과 조우하는 통로이면서 현실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증명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또 하나의 작업인 <필통을 물감에 묻혀 던진 드로잉>(2013)은 '시간의 순연'을 우연과 필연의 즉흥적인 협연 아래 재구성한 작업이다. 일종의 비물리적 연속성을 따르는 이 작품은 시간을 비인위적으로 분절(分節)시키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물질에 덧입히는 과정을 통해 우연의 찰나를 기록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인간의 삶에서 돌연 부상했다 사라지는 단상들을 일일이 채록하여 안착시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행위에 의해 사방으로 파편화된 흔적들(우연적인)은 작가의 주관적인 시도 아래 기억이라는 시간의 순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편이자 이탈을 증좌 한다.
여기서 다양하게 사용된 미디움은 일종의 시각적 규정에 함몰된 편린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개별적으로 깨지거나 흐트러진 조각들은 개인의 시각과 기억, 시간과 공간과 다층적 교차를 (비가공적으로)맺은 채 서로 다른 개폐 구조 체계를 완성하는 수순을 함유한다. 그런 점에선 불규칙한 퍼포먼스를 통해 '우연적 필연성'을 강조한 작업인 <마임 아티스트를 이용한 드로잉>도 같은 등선에 놓인다.
2013년 작업들이 일상의 오브제를 밑동으로 한 각각의 파편들을 시간의 순연에서 탈선해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를 규정하려 했다면, 2010년 <버려진 것들을 위한 드로잉>이나 <Plant Incubator>과 같은 설치 작업들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되 캔버스나 종이 등과 같은 재료의 한정성을 탈피하려는 의지가 엿볼 수 있는 작업이다. 반복되는 패턴 안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개인의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선 <필통을 물감에 묻혀 던진 드로잉>이나 <마임 아티스트를 이용한 드로잉>과 유사하지만 그 간극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연의 연쇄를 공동체와 개별성을 함축한 작업이라는 사실에선 다소의 차이를 둔다. 특히 내용에 따른 형식변화라는 일정한 방향선회를 통해 사물과 일상, 우연성과 필연성을 열린 체계 아래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보다 흥미로운 건 최근 작업(필자가 작업실을 방문했을 당시엔 실험적인 몇몇의 사진과 드로잉이 전부였지만)으로, '개인의 일상'이라는 공통분모는 유지되고 있지만 우연성은 낮아진 채 보다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어쩌면 쉽게 말하기 어려운, 왜곡된 시선과 편견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는 개인의 신체에 관한 사적 경험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존재 형식을 스스로 매듭짓는 형국을 내보인다. 즉, 자신의 신체조건을 시간 내부에 침잠시키지 않고 시간 밖으로 거둬냄으로써 기억의 이탈과 치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근작들은 일상을 토대로 '나'에 밀도 있게 천착하는 단계를 엿보게 하며, 기억과 시간의 감응을 오늘에 병립시킴으로써 자신에겐 여전히 무겁기만 한 '틀'을 깨뜨리려는 몸짓을 발견하게 한다.
3. 작가는 오늘날 기록의 나열이 아닌, 기억의 재생을 관통하는 새로운 시도에 다가서고 있다. 나를 둘러싼 일상의 얼룩, 비시에 비례해 흩뿌려진 기억들을 주관적 선택 하에 이입하여 타자로 하여금 간접적인 경험을 느끼게 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점진적인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비평적 응답은 온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김은혜의 경우 진지한 고민과 실험적인 자세로 다양한 조형언어들을 생성하는데 기꺼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실상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롯한 안식으로서의 공간이며 일상과 기억의 흔적들을 일깨우는 대리체로써의 예술을 개간하려 폭 넓은 장르를 수용하려는 태도 또한 상찬해야할 이유로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밥이 고래를 이기는 순간>(2014)과 같은 작품이 선보이거나 <전단지를 위한 콜라주>처럼 (개념과는 반대로)기초적 조형성에 머무는 작품들이 최신작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아직 명료한 예술관이나 조형언어를 습득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세계지도 선들을 이용한 종이접기>에서 읽히는 형식의 낯익음, <Plant Incubator>에서 발견되는 상투적 주제와 표현, 신체와 기억-경험을 다룬 근작에서의 소극적인 태도와 보편적 동감을 불러오지 못하는 형국은 진일보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듯한 여운마저 들게 한다. 특히 의도와는 달리 흔하디흔한 네오아프레게적인 주제가 지닌 비공감성, 미학적 토대의 희미함은 김은혜 작가의 작업방향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허나 마냥 부족하다고 타박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직은 예술가로써의 삶에 있어 문지방을 간신히 넘어섰음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기 때문이다. 작가 본인조차 습득하고 연구하는 단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에 문제의식 면에서도 미래의 어떤 변화는 얼마든지 담보될 수 있다. 특히 김은혜의 작업에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어쨌든 열린 자세로 기존 규칙을 분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물과 언어, 표상과 존재,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원론에서 이탈해 후기모더니즘에 걸맞은 다층적, 다원적 행태를 미약하게나마 읽게 한다는 것에 있다. 또한 타자와 화자 간 계층 없는 오감이 교차하는 장소로서의 예술, 현시적 관점에서 일상의 깨달음을 자신만의 언어로 변환시키려는 일련의 부딪치고 첨가하는 행위는 김은혜 작가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게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일정부분 서투르고 의도와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엿보이지만 상대적으로 온전한 스스로의 조형언어를 재창출하기 위한 그의 경주는 단정에 앞서 지켜봐야할 측면이 더 크다는 건 분명하다. 이 글도 그런 차원에서 작성됐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출처 -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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