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변크기
2017년 5월 11일 ~ 2017년 5월 25일
<제목없음> 불타지 않을 낙서들* _ 글. 박기현 / 독립큐레이터
(*소비에트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그리타」에서 작가협회에서 거절당한 원고를 악마 볼란드가 요청했을 때, 거장은 원고를 모두 불태웠다고 대답하지만 볼란드는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사라지지 않는 김영민의 낙서를 보며 떠오르는 문장이어서 제목으로 인용했다. )
실패를 추구함을 작업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의도적이지만 만들어진 실패를 향하는 것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길이다. 나는 많은 사람이 실패를 목적으로 그것을 원했으면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단정한 말을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주도해 기존의 관념을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실패를 향한 작업의 변’,김영민 (2015)
질문이 많은 사람이 있다. 김영민도 그런 사람이다. 질문이 많은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왜 걷고 있는가?’, ‘왜 이 길인가?’와 같은 행위의 주체인 자신에 대해 존재론적 물음부터 타자와 외부 세계로까지 질문의 대상을 넓힌다. 이들 중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방황하는 질문을 타인과 이야기 나누면서 방향을 가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 묵묵히 걷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 그의 질문과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세상과 소통한다. 반대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질문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질문과 그에 대한 어떤 계시 혹은 답변의 불가능성으로 하룻밤 사이에도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두 경우가 외롭고 고된 길이지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론에 따르면 각자가 얻는 내면의 보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견된 실패를 향하여
김영민을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가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고 눈에 띄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성이 없거나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타입은 아니다. 나는 그의 작업이 어떻게 변했는지 10년 동안 볼 수 있었다. 표현 방식과 재료가 어떻게 변했는지 여기서 자세한 묘사는 하지 않겠다. 이유는 김영민이 자신의 초기 작업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이다.
성에 차지 않는 것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 그의 성격은 성실함으로 용서된다. 그는 (모든 고통 받는 젊은 예술가들처럼) 역경 속에서도 예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런 그가 미대를 입학한 뒤, 예술의 길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여전히 예술과 그림이 무엇인지 답을 찾기 위해 속을 썩고 있다. 나는 여느 예술가처럼 그가 이 문제로 고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젊고 재능있는 작가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회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매달리는 것이 아무래도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사회학, 미학 그리고 미술사의 의미 있는 연구를 통해 예술의 실존과 그 가치를 증명했다. 덕분에, 물론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즉각적인 경제적 성과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지원금 신청서의 각 항목에 성실히 대답하고 자신의 효율성을 피력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더는 낭만주의 시대의 불운한 천재 내지는 보헤미안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21세기 대중은 잉여의 삶들이 품고 있던 진주 같은 예술 작품에 환호하지 않는다. 진주는 조개가 죽음으로써 세상에 드러난다. 예술가들은 이제 자의든 타의든 ‘생산적이며 효율적인 예술’로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 물질적 현존이 중요시되는 미술에서―물론 개념미술이 이를 타도하기 위한 시도를 해왔지만―이런 예술 환경은 창조를 ‘제작’으로 대체시키며 SNS로 사유하고 소통하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유통한다. 죽은 조개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예술은 투명함 속에서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불타지 않을 낙서들
이제 예술에서 ‘모든 것은 밝혀졌다.’ 예술을 하지만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이유는 없다. 이것은 비효율적이다. 우리가 던지는 예술에 대한 질문은 어떤 방식이든 앞서 제출된 수많은 답변 안에서 실패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찾아낸 이 명쾌한 공식을 그에게 호의로 제안하면 어떻게 될까?
분명히 그는 나에게 싸늘한 미소를 지은 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은 조금도 그런 공식을 따를 의향이 없음을 열정적으로 말할 것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대화를 몇 번 김영민과 한 적이 있다. 그를 설득 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돌이켜 보면 과거 나의 시도는 실패한 거 같다. 물론 제도 안에서 만들어낸 이 명쾌한 공식이 자연의 법칙이나 ‘2X2=4’같이 완벽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김영민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주인공처럼 ‘앞에 돌벽이 있는데,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것과 타협하기를 원치 않는다’를 그의 방식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그는 먼저 말하지 않지만, 해야 할 말을 참는 사람은 아니다.
김영민은 이미 자신의 예술이 쉽게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실패를 향하여> 전시를 위해 쓴 ‘실패를 향한 작업의 변’에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번 가변크기에서 열리는 전시 <제목없음>을 위해 작가 노트에 쓴 고백처럼, 내면에 간직해 온 질문을 감정의 고저를 담아 선과 조난당한 단어의 껍질을 사용해서 회화로 재현할 것이다. 이 과정은 비생산적인 소통을 통해 소통을 끌어내고 감각의 부재로 감각을 깨운다. 무의미한 형상과 안내자가 없는 낙서의 세계에서 감상자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가 ‘낙서’라고 일컫는 이 ‘실패를 향한 시도’들 혹은 ‘장난’으로 개인의 서사와 거대 담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오롯이 선과 면, 색을 통해 회화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그가 믿는 예술의 의미와 회화의 아름다움이 그들에게 전달되길 기다리고 있다. 이 한 장의 낙서 앞에서 말이다.
제목없음 _ 글. 김영민
내 작업은 의미내용의 표현이 아니다. 작업을 위해서, 이미지를 위한 의미내용을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회화에 집중할 수 있는 소재. 그것은 유희적 재현의 낙서이며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내 발에 걸려 넘어지는 자발적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여여如如한 조화調和를 그려내는 것이 내 작업이다.
의미내용이 없는 낙서의 유희적 재현
내 작업은 낙서 된 이미지를 컴퓨터로 재현하고 그것을 다시 페인팅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의 방식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 낙서들에는 내용도 의미도 없다. 작가는 동전 위에 놓인 종이를 연필로 색칠해 형상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유희성을 가지고 작업할 뿐이다. 정신적으로 *무아의 상태와 닮은 유희성일 수도 있다. 이런 상태를 여여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가변크기에 전시된 이미지는 종이에 낙서 된 것들을 스캔하여 컴퓨터 안에서 따라 그린 것들이다. 반복적인 재현방식의 1차 재현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있어, 화면구성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점과 같은 독재적 역할을 하는 것들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쓰임.)
미술의 목적
1. 오늘날 이미지의 포화상태에 진입한 회화에서 예술가의 창조성은 허구이다. 어떤 이미지도 개인의 창조적 결과물이 아니며, 단지 이미지 조합에 의해 태어난 경우의 수라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창조성, 창조적 회화라는 허구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정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정신의 해방은 예술가의 관념과 정신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최대한 배제 또는 하강시키는 것이다. 이때 예술은 유희성만 남을 것이다. 유희성은 재현, 정신, 실재, 내용 등과 같은 예술가의 창조성과 관련된 것들을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유희성은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자유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자유로움 자체도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무를 지는 바 창조성과 연결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희성은 과정이라는 결과만을 낳게 되고 나의 예술은 지속적이게 된다.
2. 내 작업은 재현의 반복이다. 완성과 결과가 목적이 아니다. 때로는 감각의 변덕으로 인해 결론지어진 작품이 존재한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재현의 반복이다. 따라 그리는 유희성으로 시작해 지속하는 재현은 방식의 엄격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재현에는 우연성이 존재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재현은 눈속임이라는 환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연성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우연성이 발견되더라고 그것은 작가에 의해 확정된 이미지의 구성요소이다. 내 작업의 이미지는 그럴싸하지 않은 낙서이다. 여기엔 어떤 환영이 없고 결과도 없다. 하지만 원본과 대조 시에는 대부분 우연으로 이루어졌다. (우연이 아닌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글의 논리를 흩트리지 않기 위해 일단 우연으로 퉁치겠다) 그냥 딱 봐서 따라는 그렸는데 이미지가 원본과 차이가 있는 우연의 조화이다. 나는 이 우연성을 긍정/극복하기 때문에 지속해서 유희적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다. 극복이라는 표현이 작업을 수행(修行) 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이 우연성이 화면에 절대적 위치와 이미지로 표현될 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 우연성이 싫으면 지우기도 한다. 그래서 수행적 작업은 아니다.
3. 내 작업은 관객을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 아니다. 작업의 유희성을 유지하고, 의미내용을 포함해 무언가 말해야만 하는 결과적인 작업의 권태를 깨고 싶다. 유희성을 유지한 재현의 방식은 회화에서 느끼는 권태를 충분히 깨뜨릴 수 있다.(물론 내 개인에 국한된 권태의 탈출이긴 하겠지만….) 그리고 항상 변화될 수밖에 없는 과정적 상태를 고수해 권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태를 유지하고 싶다.
나는 내 작업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유희성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데, 작업방식은 아이러니하게 행위적 측면에서(재현의 반복) 나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약이 나를 흥미롭게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를 틀에 박혔다고 생각하는 관상자에게 나는 언제나 내 작업방식을 배반할 수 있는 그런 지점을(즉흥성일 수도 있는 지점) 개방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일관성이 권태를 깰 수 있는 새로움이다. 이미 나는 내 방식과는 일관적이지 않은 어떤 이미지를 액자 안에 가두어버렸다. 또는 재현된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이것도 내 권태를 깰 수 있는 새로움이다.
출처 :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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