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프로젝트 서울
2024년 7월 9일 ~ 2024년 7월 20일
0: 빈 자리를 나타내는 수, 아무것도 없음, 시작점, 기준점.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쉴 새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이미지들이다. 이것들은 찌르듯이 닿지만, 충격은 빠르게 휘발된다. 머무르다 순간 사라지는 관계를 붙들거나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는 욕망은 흔적을 잡아내는 행위로 이어진다. ‘나’와 관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이미지들을 그려내는 것. 그리고 한 순간의 직관들은 그 이미지에 잔존하거나 이 역시 이미 휘발된 상태로 남는다. 따라서 0은 떠난 자리다. 이런 동시대적 관계의 틈에서 김지현과 석지아의 캔버스는 정서가 오가는 경계로서의 피부가 된다.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온 복잡하고 형용하기 어려운 맥락의 레이어가 쌓이고 그것이 ‘나’를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뜯겨 탈락할 수도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캔버스는 피부다. 혹은 타자와 접촉할 수 있는 나에게서 가장 외부의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두 작가의 작업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김지현은 긴밀한 무언가가 존재했던 자리를 포착한다. 작가는 수집한 이미지들을 붓질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플랫한 화면 위로 순간의 감정, 영감에 기반하여 변형시킨다. 구상 과정에서 감정과 밀착되었던 이미지는 캔버스로 떨어져 고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분리된 이미지들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사진에서 출발한 이미지들의 윤곽과 형상은 뭉개지고 흐려져 생명 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 상의 이미지에서부터 일상적인 사진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가지는 유머러스하고 ‘쿨’한 태도는, 수집한 이미지와의 일정한 거리감을 나타낸다. 이는 의미가 닿기도 전에 자신으로부터 떠난 것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을 모아 자신을 말하고자 하는 지난한 과정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쩌면 작업에 착수한 시점, 혹은 이미지를 선택하고 수집하 는 순간부터 작가가 처음 느꼈던 감상은 날아가 껍데기만 남는다.
석지아는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변형되는 것들을 다룬다. 여러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서로를 향한 비물질적 증명들은 온 전하게 남지 못해 덧붙여지고, 떨어진다. 캔버스 위에 두텁게 쌓인 모호한 형태의 껍질들은 자신과 주변부를 구성했던 관계들의 변화 과정에서 생성된 탈락들이다. 끈적한 형태로 붙은 두터운 피막은 미련 같기도, 혹은 일방적인 관계의 유지 같기도 하다. 남은 자리를 감쌌던 피막은 기억이 투사되었던, 잠시 투사되고 남은 흔적으로 그것이 떨어진 자리는 딱 그만큼의 흔적이 되어 캔버스에 남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결국 오랜 시간을 거쳐 썩고 부식되는 것들을 연상시킴으로써 다시금 관계에 대한 은유가 된다. 영원을 바라며 쌓아 올린 것들은 결국 다시 손쉽게 사라지고, 그 자리는 겹쳤다 떨어진 것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0의 껍데기(The Shells of 0)라는 것은 결국은 비어 버릴 수밖에 없는 작업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안한 제목이다. 스스로의 기억과 경험이 머무르는, 외부세계로 향하는 가장 바깥이라는 점에서 캔버스는 그들에게 피부가 된다. 이 (피부의) 표면은 ‘나 자신’과 세상의 ‘경계’가 된다.1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여러 부산물이 중첩된 이곳, 저곳, 어떤 곳이자 동시에 모든 의미가 휘발된 아무데도 아닌 곳이다. 세계와 알맹이를 경계 짓는 취약한 껍데기들인 것이다. 같은 듯 다른 자리와 덮개-피부는 그 자체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에 대한 두 작가의 태도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이기적이다.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바꾸어 버리는, 그리고 이미 발생한 탈락을 붙잡는 것은 지나간 관계 맺음에 대한 지극히 작가 본위의 행위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상기하 면서도. 그러나 0이 시작이자 기준이듯, 필연적이고 반복적인 상실의 상황을 새로운 의미로서 다시 생성하고자 한다.
손하늘
1 디디에 앙지외, 『피부 자아』, 권정아 외 역, 2008, 인간희극, p.14
참여작가: 김지현 석지아
출처: 레이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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