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가변크기
2018년 5월 24일 ~ 2018년 6월 7일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는 미지의 섬으로 간다. 알지 못하고 본 적 없는 땅덩어리에 식물이 도착한다면 뿌리내리기에 알맞은 땅이란 어떤 것일지 상상해 본다. 자리 잡기에 적당한 환경을 더듬어 입체드로잉을 한다. 내내 바라보며 관찰하고 수집한 이미지를 평면 드로잉으로 재구성해서 스크랩 북을 펼친 것처럼 한쪽 벽면을 채운다.식물의 모습이나 빛깔, 생장하는 방식, 끝없는 변화, 움트고 자라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가 관찰의 대상이자 작업의 소재가 된다. 전시장 전체를 가상의 환경으로 정하고 식물들이 ‘이상한 땅’을 만나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환경을 표현하고자 한다.”
- 김하림의 작가 노트(2018)에서 발췌
김하림의 개인전 《조금씩, 가만히》는 작가가 수년간 관찰하고 수집한 식물들을 모티브로, 식물의 생장 과정과 이를 위한 조건을 다룬 입체-드로잉 전시다. 김하림의 식물-연구는 개인의 서사를 담은 식물 이미지, 그리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에 관한 작가의 상상을 바탕으로 한 오브제 드로잉으로 구성된다. 이를 위해 전시 기간 동안 공간 가변크기는 작가가 옮겨온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는 가상의 환경으로 존재한다.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 식물들은 형형색색의 ‘이상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어디에서든 불쑥, 자라나거나(spring_up_nowhere, 2018), 식물에 관한 작가의 연구/관찰을 토대로 재구성된(BOTA(botanical)_study, 2018) 것으로, 특정 종이라 단정 지을 수 없는 형색의 줄기를 늘어뜨린 식물이 되어(Rain-Bow, 2018) 관객과 마주한다. 여기에는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아 어머니가 키우는 식물부터 작가가 운영하는 독립서점 앞의 작은 화단에 심긴 식물, 여러 사람에게서 건너와 시들기와 성장하기를 반복했던 다양한 식물에 관한 인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도시에서 식물을 매개로 한 예술의 가능성과 새로운 시각을 탐구하고자 했던 콜렉티브 ‘식물생활(강은영, 김하림, 유상희)’에서의 경험 일부도 함께 포함되어있다.
식물에게 환경과 조건은 주어지는 현실일 뿐,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종에 따라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뿌리내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작가가 주목한 이러한 환경은 어딘지 낯설지 않다. 김하림은 작가이자 독립서점 제로헌드레드의 운영자, 그리고 전시 공간 운영관계자로, 미술계의 이상한 지형 속에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 늘 생각해왔을 것이다. 안정적이고 오랜 기간 지속해서 머무를 수 있는 공간과 운영에 관한 고민에서부터 생존 그 자체를 위한 활동,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에 대한 모색까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은, 현재 어디에도 위치하지/속해있지 않은 상태임을 역설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상태가 포괄하는 감각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머물 자리, 둘 곳이 없어지는 것에서 오는 불안’을 일으킨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자라날 수 있으나 동시에 언제든 자리를 내어줘야 하는(동시에 찾아야 하는) 상태.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김하림의 관찰은 작가의 개인사가 녹아있는 식물-연구임과 동시에, 오늘날 상당수의 작가가 처한 현실을 대변한다. 이러한 현실은 미술계에서 작동하는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상황에 관한 것이며 김하림의 식물들이 ‘작고, 가벼운’ 형태로 자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손으로 빚은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땅덩어리와 거기서 자라나는 식물이 특정 서사를 지칭하기보다, 관객에게 개별의 형용사로 읽히길 바란다고 했다. 시처럼 형용되는, 자라나고 그려지는 이미지들로. 전시명 ‘조금씩, 가만히’는 움트고 생장하는 존재들을 생각하게 한다. 숱한 날 웅크리고 있지만, 뿌리를 내리는 데 망설임이 없고, 싹이 트면 때에 따라 자라며 뻗어 나가는 것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것들. 작가가 개별의 식물에 담긴 시간을 떠올리며 거기에 맞는 색을 고르고 만들었을 작업 과정을 상상하며, 나는 내가 아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어떤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이와 동시에, ‘소리도 없이 자란다’는 문장을 자주, 많이 생각했다.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이 눈에 띄는 계절이다. 생명력이란 어떻게 이다지도 강인한 것인지. 엉겨 붙은 먼지에조차 자리 잡은 풀은 해마다 생장하고 꽃을 피우고 지우길 반복한다. 앞으로도 작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유효한 문장이길 바란다. / 안성은 (성북문화재단 성북도원 큐레이터)
출처 : 공간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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