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히읗
2026년 8월 27일 ~ 2026년 9월 26일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김해미의 개인전 《검은 거미》는 2017년, 작가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담은 한 점의 미완성 드로잉 〈두 나무를 지나서 오른쪽〉에서 출발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곳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던 것은 살았던 집의 모습보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의 길이었다. 작가는 그 기억을 따라 점을 하나씩 쌓아 올리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게 했던 기대감은 차츰 소진되었고, 당시 촬영했던 사진마저 잃어버리면서 드로잉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는 그렇게 남겨진 미완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전시 제목인 《검은 거미》는 작가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마주한 작은 집거미에서 가져왔다. 사람이 한동안 손대지 않은 구석에 집을 짓는 거미들은 청소를 하거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어느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작가는 사람의 생활과 크게 부딪히지 않는 곳에 자리를 만들고 주변의 변화에 따라 다시 이동하는 이 작은 거미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반지하 전시장 역시 작가에게는 평소 쉽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구석과 그곳에 쌓인 시간을 꺼내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검은 거미》는 이처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특정한 과거를 복원하거나 하나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대신 기억과 경험을 집, 길, 몸과 같은 익숙한 형상과 사물로 옮기며,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조각과 설치를 통해 살펴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저마다 변화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집의 형태를 한 구조물 〈어디〉(2026)를 마주하게 된다. 벽지와 장판까지 마감된 내부에는 이사를 준비하는 작은 가구와 상자가 놓여 있다. 생활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그곳을 점유했던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비워진 집인지, 새로운 거주를 기다리는 집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떠남과 머묾이 교차하는 이 장면에서 집은 완결된 장소라기보다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에 놓인다. 이어지는 도자 작업 〈쪽지-8〉(2026)에는 작가가 현재 거주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마주한 풍경을 기록한 글이 옮겨져 있다. 일상의 이동 중 포착한 장면들은 글로 기록되고, 다시 도자라는 물성을 가진 사물로 전시장에 놓인다. 2017년의 드로잉이 어린 시절의 집으로 향하던 길을 담고 있다면, 〈쪽지-8〉은 현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라본다.
한편, 갤러리의 작은 방에는 양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인물 조각 〈두 번 닫은 문〉(2026)이 놓인다. 종종 사물을 통해 인간을 은유해온 김해미는 이번 전시에서 직접적인 인체의 형상을 등장시킨다. 몸을 둥글게 말아 스스로를 감싸 안은 인물은 자신을 보호하듯 움츠러져 있고, 얼굴은 그 안쪽으로 감춰져 있다. 작가는 ‘사람의 얼굴은 욕망을 드러낸다’는 문장에서 출발해, 오히려 욕망을 감추면서도 그 안의 취약함이 드러나는 형태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감춤은 작품을 제시하는 방식에서도 반복된다. 인물은 작은 방 안에서도 다시 가려져 있으며, 관람객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김해미는 이처럼 내밀한 상태를 꺼내놓으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기보다, 일부를 감춘 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남겨둔다.
릴케가 말한 ‘집’은 단순한 거주의 공간을 넘어 삶의 한 상태를 가리킨다. 《검은 거미》에서 집 역시 어린 시절의 집으로 향하던 길, 비워지는 집, 현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지나며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로 나타난다. 그렇게 김해미는 집이라는 장소를 중심에 두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과 사물에 따라 계속해서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참여작가: 김해미
출처: 상히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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