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풀
2019년 8월 1일 ~ 2019년 9월 1일
드로잉 룸: 풀 20년 다시 읽기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20년, 특별할 만한 시간이다. 십진법이 선사한 소소한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별한 시간을 기리는 익숙한 방법들이 있다. 기억을 되살리고, 의미를 되새기고, 사람들을 모으고, 널리 알리고,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참에 그런 등거리적 특별함 말고 변곡의 특이점을 만들 수는 없을까. 늘 끌어안고 살다 이삿짐을 정리하며 알게 된 집안 비밀처럼, 시끄럽지만 치르면 그만인 기념 말고 조용하지만 두고두고 뒤흔들 기억을.
미술에서는 기억을 모아놓은 것을 흔히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참 헐거운 유행어였다. 무엇을, 어떻게 구조화해서,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지, 보는 이는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깊이 고민하거나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카이브 병(mal d’archive)’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이 기억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리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카이브를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기관의 긴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누군가의 철저한 수집벽을 드러내기 위해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이런 파괴의 뉘앙스 소실은 어느 정도는 프랑스어 mal(병/악)을 영어의 fever(열병/열풍)으로,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타난 의미의 쏠림 때문인 것 같다)
죽음 충동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카이브는 늘 다시 읽고 새로 쓰기를 요구한다. 기억을 다시 꺼낼 수 있도록 저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 재구성을 전제로 하며, 언제나 동일성을 포기하면서 새로이 구축된다. 아카이브는 그렇게 ‘아나카이브(anarchive)’가 된다. 병력(anamnesis)을 살피듯 과거를 꼼꼼히 다시 읽는 것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병을 치료하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간에. 풀에도 아카이브를 재가공하는 프로젝트가 여럿 있었다. 인쇄물, 사운드, 만화, 미술비평, 사회적 미술 등 때로는 매체로, 때로는 주제로 아카이브를 재구성해왔다.
2019년의 풀은 어떤 ‘아나카이브’를 구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난 20년을 신화화하지 않으면서 현재를 살피게 하는 병력을 기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동일성을 무너뜨려 공간이 사라질 각오를 할 만큼 미래를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 먼저 너무 요란하지 않은 가볍고 자연스러운 아카이빙의 방식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요즘 자료를 모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역시 휴대 전화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좀 더 정교한 발췌를 원할 때는 확대 하거나 크롭 하고, 그 이미지/텍스트에 또 다른 글을 붙여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텍스트와 이미지의 경계는 점점 더 흐려졌다. 전시 리플렛에 실린 글부터 인터뷰, 책, 작품, 사진, 메모, 영상 등이 아무런 위계도, 계통도 없이 모여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의 20년을 크롭 하다보니 점점 도드라진 곳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을 분류하는 유일한 기준은 ‘생각’ 뿐이었다. 그 생각을 드러내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물을 때마다 매끈한 답을 얻지 못했다. 누군가는 종이 위의 선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밑그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습작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생각의 메모라고 했다. 결국 형식도 매체도 정해져 있지 않지만, 목적지에 대한 강박이 없는 모든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냥 만들어가다 보면 어떤 꼴이 나오고, 그 꼴이 마음에 들면 이름을 붙여 불러주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쪽에 남겨두는 그런 것이 드로잉이었다. 그런 애매함이 꼭 풀 같았다. 20년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풀을 그려왔다. 그것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드로잉 룸’은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드러난 일반적 공간에서 감춰진 특화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한 응접실 같은 곳을 가리켰다고 한다. 풀의 20년을 다시 읽으면서 특화하고 싶은 몇 개의 이야기들을 아카이브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풀이 앞으로 더 깊숙이, 신중하게 파고 들어갔으면 하는 주제를 제시해보려 했다. 여섯 작가가 그 주제들을 통일성 없는 연쇄성으로 이야기한다.
누군가 정서영은 풀에 잘 안 어울린다고 하면 주저 없이 수긍하겠지만, 풀의 미래를 고민할 때는 항상 정서영이 떠올랐다. 정치적 내용을 어떤 미적 형식에 담을 것이냐는 당의정 같은 질문 말고, 어떻게 미술이 관성, 트렌드, 권위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훈련이 될 수 있냐는 소금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서영이 풀의 개관전 초청 작가였다는 것은 의외지만 마땅했다. <쇼케이스 쇼케이스>(2015)는 전시의 프레임이 만든 관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역시 물살의 세기는 떠내려갈 때는 잘 모르고, 거스를 때 가장 크게 느껴진다.
풀의 크고 작은 전시와 일에 참여해온 김지평도 너무 익숙해서 간과했던 전시의 프레임을 비로소 보고 읽게 만들어서 보는 것을 교란한다. 우리의 굳은 머릿속 전시는 식민지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어서인지, 전통적인 ‘보여주기' 장치들은 좀처럼 섬세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김지평은 프레임 속 이미지를 단순화하거나 비워버림으로써 족자나 병풍 자체를 주인공으로 모신다(<모심>). 작가는 족자의 각 부분을 여성의 옷 명칭으로 부른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랫부분은 치마, 윗부분은 저고리, 양 쪽에 달린 띠는 소매라고 불린다. 그리고 각 족자에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을 붙여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레베카는 망령으로 떠도는 다중인격의 미녀이고, 검은 벨벳을 두른 카르밀라는 뱀파이어 소녀이며, 금발과 진홍색 드레스의 오들리는 이중혼을 감행하는 선정소설의 주인공이다. 세 족자는 규범을 우습게 아는 매혹적인 여자들의 초상화이다. 민족주의적 전통은 문을 닫아걸지만, 여성주의적 전통은 못 보던 세계를 향해 문을 연다.
2009년 풀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주황도 줄곧 여성들의 초상을 찍어왔다. 영상 <민요, 저곳에서 이곳에서>(2018-)에서는 프레임 안에 꽉 찬 여성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약간 다른 발음, 생경한 가사, 그러나 어딘지 익숙한 멜로디의 민요를 부른다. 민요는 구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사도, 리듬도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민요가 때로는 사랑 노래로, 때로는 혁명가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등에 사는 소위 ‘동포’들이 부르는 민요는 이주의 역사, 이데올로기, 정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요약 불가능한 정서들을 함축한 일종의 시적 다큐멘터리이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스펙터클한 화면, 드라마틱한 사연,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더할 나위 없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증언이 된다.
풀랩(풀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엄지은의 <줍는 배: 고리 밖에서>(2019)도 작가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믿으라고 외치지 않는데 ‘아’ 하며 빠져 들어가는 이상한 다큐멘터리이다. 이 영상은 육지가 바다에 잠겨버린 미래에, 역사의 흔적을 ‘줍는 배'가 길어 올린 것들이 마구 다가와 부딪히는 것을 기록한 처음 보는 종류의 항해일지이다. 배가 주워올린 흔적들 사이에는 인과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그야말로 초시간적이지만, 멀리 떨어진 사건들 사이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유사성을 읽어내는 엄지은의 시선을 밑도 끝도 없이 따라가게 된다. 더듬어보면 사실 다큐멘터리는 이미 그래왔다. 그 시제가 과거라는 이유로,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말과 이미지들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엄지은은 인과성도, 시간적 순서도, 상식적인 것도 없애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엮어낼 수밖에 없으며, 낯선 유사성은 현실을 더 날카롭게 노려보게 해준다.
시간을 자유롭게 부리면서 예측 못 할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은 남궁호석이 즐겨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2000년과 2004년 풀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열고 2006년 <미래일보>를 발행한 이후, 2007년부터 문신을 둘러싼 위반과 제도화의 흥미진진한 줄다리기에 매료되어 현재 타투이스트이자 미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남성적이고 과격한 이미지로 굳어진 문신을 새기는 동작이 전통적 여성의 이미지로 고착된 수를 놓는 동작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천에 사진을 프린트하고 그 위에 수를 놓았다. 1980년대 남성들이 열광했던 권투 선수들의 근육질 몸에 참하고 섬세하게 자수를 놓음으로써, 작가는 젠더적, 사회적 선입견들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남궁호석은 타투이스트로서의 일과 작가로서의 작업이 자신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태도는 신익균의 설치작업과 전시공간 디자인을 관통하는 생각과도 이어진다. 풀의 공간 매니저로 일했던 신익균은 낡고 오래된 갤러리를 매만지며 얻은 아이디어들을 작업으로 발전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에서부터 형태와 재료를 확장해 가면서 전시 디자인을 한다. 지붕에 빗물이 새고, 여기저기 물이 고이고, 마당에서 누군가 나무 태우는 것을 보면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고, 마당의 자갈과 남은 재료들로 이런저런 형태를 만든 과정에 대해 신익균은 정확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다음에 풀의 공간을 관리할 사람에게 남긴 ‘풀 소사'의 안내서는 업무 일지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섞여 있는 작가의 드로잉이기도 하다. 신익균도 정서영처럼 형태가 그 자체로 관성을 교란하고 그 교란이 읽히길 바라며 설치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스무 해의 기억은 또 다시 읽고, 다른 색을 입히고, 재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생각하기 싫은 것, 부족했던 것, 질긴 습관으로 남아있던 것을 더 읽어야 한다. 살 힘이 있고 그럴 가치가 있을 때 병력을 더 꼼꼼히 다시 읽는다. 그래서 아카이브는 자기 파괴적이면서 살아있다는 기록이 된다. 아직 풀에 읽을거리가 많다.
기획: 안소현
기획보조: 김선옥, 신지이, 한상은
그래픽디자인: 강경탁(a-g-k.kr)
프로그램 개발: 홍진훤
공간디자인: 신익균
공간디자인 보조: 안부, 정덕현, 조재홍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출처: 아트스페이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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