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2020년 11월 17일 ~ 2020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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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들의 왕국
전시기획 / 글 임보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전쟁이 몇 번이고 되풀이될 테고 그 사이에 전쟁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골고루 나누리라고. 나는 다만 재난의 분배를 일찍 받았을 뿐이라고.” 한국전쟁 직후, 1953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의 한 대목이다. 그렇다. 어떤 이는 먼저 재난을 겪고, 어떤 이는 나중에 재난을 겪을 것이다. 어차피 인류사에서 재난은 몇 번이고 되풀이될 것이다. 그것은 이권 다툼에서 비롯된 전쟁의 모습을 할 수도 있고, 인류가 스스로 자초한 환경 위기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각종 잘못된 관습의 사회적 폐해로 잔류할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념의 충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1993)’.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ers of Marx)』에서 ‘specters’를 차용하였지만, 여기서는 이를 유령이 아닌 ‘망령’으로 통칭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망령(亡靈)과 유령(幽靈)은 유사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뜻하면서도 ‘망령’의 사전적 의미에서는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망령’과 ‘살아 있는 망령’이 모두 가능한 것은 과거의 잔재가 현존(現存)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온 망령은 현재를 살아간다.
<망령들의 왕국>은 근대의 잔재와 탈근대의 이념이 공존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을 다룬다. 즉,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을 전제로 한 이 전시는 현대 사회를 배회하는 망령들에 관한 전시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적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현상으로, 전근대, 근대, 탈근대의 특징이 공존하는 현재의 이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역사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반복되는 사건들, 현상, 의식과 개념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유산이 공존하는 이 사회 속에 과거의 것이 단순히 유지되거나 잔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표명한다. 이러한 현상은 전시의 제목처럼 죽은 자의 망령이 소멸하지 않고 반복해서 돌아오는 것으로 비유된다.
개인과 국가, 이데올로기가 인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관하여 작업을 해온 신정균 작가가 <Dust, Wind & Fire>(2017)에서 암시하는 것은 일련의 위기와 사건들의 배후에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 조작된 사건들의 진위에 대한 의심, 그리고 ‘어긋난 시간’이다. 작가는 사전에 계획하여 촬영한 푸티지들이 아닌, 그동안 수집하고 기록했던 자료들을 재구성하는 파운드 푸티지 필름 방식으로 새로운 서사를 도출했다. 픽션과 논픽션의 모호한 뒤섞임,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애매한 경계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우리의 현재와 다름없다. <Dust, Wind & Fire>(2017)의 영상 언어가 은유하는 것은 평행한 시간의 축 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일 것이다. 영상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흐른다. “어차피 과거에 이미 일어났거나 / 미래에 일어날 일이 모두 지금 여기에 있는 거라면 / 평행하지 않은 단면으로 시간을 자르면 어때?”
비동시성은 불균등한 시간의 겹이며,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와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시간의 축은 결코 단절될 수 없다. 이 시간의 축을 단절시킬 수 없다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망령을 막을 수 있는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모더니즘적 잔재는 필연적인 것인가? 이재욱 작가는 <Red Line>(2018)과 <Cord-on>(2019)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축과 또 다른 장소의 축이 ‘붉은 선’이라는 어떤 상징으로서 교차함을 은유한다. 제주 4.3 사건 당시 강경진압시기인 1948년 10월 17일에 군은 ’10월 20일 이후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소개령(疎開令)을 내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강제 이주하도록 했다. 이재욱 작가가 표현한 붉은 선 ‘red line’은 이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다. 지배 권력에 의한 강제 진압과 폭력을 의미했던 이 붉은 선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광화문에 재현된다. 광화문 시위에서 공권력-경찰-에 의해 세워진 차벽으로 치환된 붉은 선은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같은 모습으로 출현한 과거로부터의 망령과 다름없다.
이러한 단절되지 않은 시간의 축, 불균등한 시간의 겹,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인간의 주체적 사고와 사회적 관념을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태극기 집회’라는 최근의 민족주의 현상을 다룬 안건형 작가의 <한국인을 관두는 법>(2018)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온 한국식 기회주의의 역사를 서술한다. 작가는 ‘특정 집단이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면, 예외적이라고 간주되는 그 집단 내의 사건은 사실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집단 전체의 지표가 된다’고 언급한다. 영상 속에서는 ‘출세의 소리’가 들린다. 처세의 속물과 위선자들과 함께 기회주의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반지성이나 분노와 폭력이 유토피아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정권 교체와 더불어 교체되는 우상-동상들이 등장하고,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등장하는 권력 친화적 무리들을 소개한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 구조가 바뀐 것 같지만 실상 매번 등장하는 새로운 우상은 현재의 탈을 쓴 과거의 망령들일 뿐이다. 이러한 콘텍스트는 옥정호 작가의 <국민교육헌장>(2018)에서도 읽을 수 있다. 대나무 숲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부르짖는 한 남자를 통해, 작가는 개인의 인식이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에서 그 심연에 작동하는 과거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에 무력함과 체념을 느끼고 있음을 암시한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정한 이후 새마을 운동과 함께 20여 년간 보급되었던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경 사실상 폐기되었지만, 그 시절 전체주의의 망령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이 사회에서 아직도 우리는 과거의 망령을 떨쳐낼 수 없다. 작가는 어린 시절 국민교육헌장 암기 시험의 경험으로부터, 체화된 관념과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는 순간을 겪는 자신을 깨닫는다. 과거의 국가 권력과 교육 시스템은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주체적 사고를 거두어가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주체적 자아와 비주체적 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체념과 무력함에 저항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끝까지 다 외워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더 이상 실존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이 그들과 관계가 끝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1993)’.
<망령들의 왕국>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경유하는 메타인지적(metacognitive) 장치를 통해 사회 문화적 콘텍스트를 이해할 때 결코 낙관적이지 않은 상태, 현재의 무력함을 어떻게 통감하고 이 모든 수사적 기호들과 시청각 언어들을 어떻게 융화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미지는 시각 경험 안에서 사회문화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은유와 코드, 기호와 암시, 재현체계, 스타일로서 이미지와 서사의 관계를 끌어내고, 그 서사의 근간이 되는 사회와 문화의 상을 반영함으로써 우리(관객)에게 합의된 이해를 도출하도록 한다. <망령들의 왕국>은 전시를 구성하는 각각의 작품이 가진 서사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현상들을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다시 평행한 시간의 축 위에 올려놓고, 이 불우한 시간의 평행 축을 결코 낙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참여작가: 신정균, 안건형, 옥정호, 이재욱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출처: 플랜비프로젝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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