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22
2018년 8월 17일 ~ 2018년 9월 5일
고승욱_말과 돌-수월봉-2015년-130x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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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술 대안공간 SPACE22는 ‘4·3 70주년’을 기념해 <△, □,○... 무한한 대화> 전시를 개최한다. 나고 자란 곳이 제주인 고승욱과 우연히 제주에 발을 디딘 후 10년 째 제주에서 사진작업을 하는 박정근, 두 작가의 사진과 영상 40여 점이 전시된다. 이 둘은 지난 10년 동안 사진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동지이자 선후배로 제주의 물, 숨, 결을 사진에 담아왔다. 제주 4.3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 있는 ‘비명을 새기지 않은 백비’에 응답한 고승욱의 <△의 풍경>은 기억투쟁의 심란한 상황을 이미지의 헐벗음으로 말한다. 제주 해녀의 초상을 촬영해 온 박정근은 거개의 해녀를 촬영한 초상과는 전혀 다른 말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떠오르는 해녀의 얼굴, 무엇으로도 환원이 불가능한 해녀의 현존에 응답하는 사진이다.
<△, □,○... 무한한 대화>전시는 규정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제주에 대한 두 작가의 ‘무한한 대화’를 옮기고, 제주라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며 사진을 찍는 것과 말하는 것, 사진에 담기는 것과 본다는 것, 사진이든 말이든 그 어떤 담론보다 앞서 존재한 제주와 제주사람들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작업노트
△의 풍경 △scape _ 고승욱
4.3 백비
제주 4.3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탁영
나는 4.3 백비를 보면서 탁본을 상상해 본다. 이름을 얻지 못한 비석의 탁본은 어떤 모습일까? 본이 없으니 글이 없고, 그래서 배경도 없이, 다만 이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침묵의 장인가? 아니면, 그러하기에 본이고자 하는, 글이고자 하는, 따라서 무언가는 배경으로 밀려나야 하는, 이름을 둘러싼 각축장인가?
탁본 위로 스치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가해자? 피해자? 행여 가해자와 피해자, 두 형제를 둔 어미일까? 오래도록 이름을 얻지 못해 무뎌진 원망들. 언젠가 이름을 얻은 뒤 작별해야 할 연민들
검은 탁본에 맴도는 검은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시도를 나는 ‘탁영’이라 부른다.
노근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후, 남한에서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희생자의 수는 대략 100만 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해 7월에 발생한 노근리사건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희생자 유족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유족들이 제시한 증거를 외면하였고, 노근리에 대해 침묵하였다. 한국에서 잊혀진 노근리를 주목한 나라는 오히려 미국이었다. 미국의 주요언론들이 자국의 만행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는 노근리를 비극으로 인정하였지만, 그것은 2001년 미국정부의 유감표명 이후의 일이었다.
유족들은 사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총알의 흔적을 ○로 표시를 해 두었고, 현재까지 총알이 박혀 있는 흔적에는 △표시를 하고 있다.
△의 풍경
내 앞에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 풍경을 담기 위해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하지만 사진은 초점을 잃는다.
풍경이 흔들린 탓일까? 내가 흔들린 탓일까?
서로의 흔들림이 어긋난 탓일까?
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 풍경 속 파고가 높다.
부표에 기댄 채, 나는 흔들림이 일치하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자리 잡은 풍경,
나는 노근리 △를 빌어 ‘△의 풍경’이라 부른다.
다시 탁영
검은 탁본에 맴도는 검은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
4.3 탁본은 풍경처럼 서 있다.
지우개 끝에 말려있던 것들이 제 몸을 푼다.
몸은 붓을 물고 제 이름을 하나씩 풍경 속에 적는다.
미군정의 명령에서 순이 삼촌의 목소리까지
노근리 ○에서 밤하늘의 별까지
파도에 쓸려 간 이름에서 바람이 실고 온 이름까지
늙은 집사의 수첩엔 이름들이 빼곡하다.
전투중인 이름들은 서로를 향한 녹슨 칼을 거두어
도래할 이름을 향해 겨누었고,
벼랑 끝 그림자는 낙오할 이름을 기다리며
오래도록 굽은 부리 벼르고 있다.
나는 붓질 두께만한 알량한 △로 뗏목을 얽고
수첩 속 풍경을 건너려 한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시도를 나는 탁영이라 부른다.
[물숨의 결] – 화석이 되어버린 해녀 불러내기 / 박정근
본 작업은 자본주의의 욕망의 universality와, 욕망의 다양한 사회적 발현을 제주 해녀의 물숨을 통해 제주의 자연 위에 풀어낸다. ‘물숨’이란 해녀들이 입수 전 들이마시는 깊은 숨을 이르며, 물숨 한 번을 머금은 해녀는 약 2분가량 잠수하여 해산물을 잡아 올린다. 물숨을 머금은 해녀의 얼굴을 수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여 그 ‘결’들을 기록함으로써 본 작업은 해녀를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한다.
지금껏 해녀는 이미지로 가공될라치면 흑백의 대비로 그려져 향수로 점철된 어머니상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숨 가쁘게 변해가는 제주에서 내가 만난 해녀는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역할을 살아내며, 자본주의 사회의 종종 이기적인 욕망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추구하고 실현하고 있었다. 다만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사회의 대다수보다 자연의 제약을 더 받으며, 그들의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이익추구라는 가치와 꽤나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이러한 욕망과 자연, 그리고 전통적 가치의 충돌을 나는 제주 해녀의 물숨이 빚어내는 결을 통해 읽었다.
개인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욕망은 제주 해녀들이 매번 물숨을 머금을 적마다 제정신이 아닐 만큼의 힘든 노동을 견뎌내는 근원적 동기이다. 그러나 욕망과 다른 곳에서 기원한 해녀의 몸은 물숨의 길이만큼의 욕망만 채우기를 그들에게 허락한다. 채워지는 욕망의 길이를 조금 더 연장하려는 해녀의 안간힘과 신이 인간의 육체에 지워놓은 한계가 충돌하는 접점에서 해녀의 얼굴에는 결이 하나, 둘 빚어진다.
이러한 해녀의 주름결 위로 또 다른 결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곳,바다에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형상과 깊이의 물결이 때로는 굵은 선으로, 때로는 세밀한 터치로, 해녀의 얼굴에 결이 되어 척척 드리워진다. 내게 이 물결은 인간의 육체라는 자연 너머 다른 범주의 자연에서 물숨을 머금은 인간의 욕망에 선을 긋는 또 다른 한 겹의 한계이다.
두려울 법도 하건만 그들은 저 배경으로 보이는 청빛 암흑의 바다 심연으로 물 속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자맥질한다. 해를 거듭하는 욕망을 향한 해녀의 자맥질을 받아내는 바닷물과 바다 속 밭 등의 자연은 고무재질로 된 해녀의 잠수복 (물옷)에 끊임없이 생채기를 낸다. 물옷은 또 다른 결로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충돌을 기록한다.
인간의 의지를 겹겹이 한계 짓는 자연에 도전, 순응, 타협하는 데는 개인의 욕망 일부를 희생하여 공동체 내 약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진화한 그들의 제도로 인함이 아닐까. 제주 해녀들이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욕망은 범사회적, 범문화적이다. 해녀가 물숨을 머금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얼굴의 주름결과 물옷에 조금씩 하지만 쉴 새 없이 음영이 깊어지며, ‘얼굴결’에 드리워진 물결이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러나 제주 해녀가 욕망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욕망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가치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제주 해녀들의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의 그것과 차별 짓는다.
출처 : 스페이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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