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보안여관
2026년 5월 29일 ~ 2026년 6월 21일
이수빈 (독립 큐레이터)
박승원 작가에게 작업은 거창한 담론을 증명하기 위한 설계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신체를 관통하는
궤적에 가깝다. 독일 유학 시절, 소통이 가로막힌 낯선 환경에서 원숭이의 몸짓을 따라 하며 시작되었던 퍼포먼스는 언어의 소외라는 절대적 고립감에서 기인했다. 그간 몰두해 온 ‘–되기(Becoming)’의 여정은 고정된 자아를 해체하고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동물, 사물, 죽음과 같은 이질적 대상과 접속하며 신체를 변용시키는 과정에서 그는 실제적인 변화를 체감해 왔다. 이는 단순한 표현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자기를 생성하며 삶의 양식으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삶의 양식 속에서 작가는 흥미와 즉흥성에 몸을 맡긴 채 유연한 행보를 이어간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완성해 내겠다는 강박보다는, 기꺼이 ‘딴짓’을 하고 ‘샛길’로 새어버리는 태도에 가깝다. 작업에서 거듭해 온 트릴로지 형식 역시 치밀한 계산이나 플롯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미신처럼, 이성적 근거보다 몸이 먼저 따르는 본능적 직관에 가까운 선택이다. 이처럼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흐름 속에 자신을 두면서도, 매 순간 돌출하는 생의 비일관성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수행(修行)해 왔다. 오랫동안 퍼포먼스를 통해 몸을 던져온 작가는, 이제 통증과 노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육체의 변화 앞에 서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솔직한 자각은 드로잉과 영상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이는 새로운 매체의 개척이라기보다, 이미 온몸을 통과하며 쌓아 올린 감각의 경험치들이 종이 위의 선과 화면의 리듬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된 결과다.
《트로피컬 로맨스》는 3막 구조로 무대가 열리고 닫히는 연극적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막’이란 선형적 내러티브를 강요하기보다 파편화된 감각들을 관객 스스로 엮어내게 만드는 구조이다. 동시에 무대의 불이 잠시 꺼졌다가 켜지며 배경이 바뀌어 있는 ‘암전’처럼, 사유를 환기하는 장치에 가깝다. 지난 2년간 다른 시공간에서 발표되었던 제1막과 제2막은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완결된 구조 안으로 수렴된다. 지난 두 개의 막은 작가의 그때그때 솟구치는 직관적 충동과 흥미를 가감 없이 발산해 낸 무대라면, 제3막은 현상들의 원인을 찾아가는 기원의 장이다. 이러한 역행의 끝에서, 초기 작업을 지탱해 온 언어의 문제와 다시 조우하게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객은 이야기의 결과인 현재를 보는 대신, 서사의 근원이 되는 가장 과거이자 최종 장인 제3막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 1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드로잉들은 신작 〈카츄〉의 원화들이다. 그 원화들을 나열하고 대사를 더한 영상 작업은 묵언의 몸짓을 고수해 온 작가가 스스로 말이라는 도구를 전면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난 작업 〈장황한 대화〉(2020)나 〈지극히 평범한 하루〉(2021) 등에서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낭독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이번 작업은 서사를 새로이 창작해 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궤를 달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의 묵언을 깨고 전례 없이 많은 말을 쏟아내는 이번 작업은 역설적으로 언어가 지닌 권위적 질서 자체를 해체하려는 시도이다.
영상 속에서는 언어가 절대적인 질서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말을 잃어가는 ‘밸’, 언어를 모른 채 태어나 이를 배워나가는 ‘가론’, 그리고 이들의 만남으로 생긴 사회의 균열을 다시 언어로 봉합하려는 ‘마루’가 등장한다. 이들의 서사는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세계와, 도구는 넘쳐나지만, 진실한 의미는 휘발된 오늘날을 차분히 교차시킨다.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극의 ‘현재’인 제1막과 제2막의 무대가 이어진다. 탁 트인 공간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제1막의 설치 작업들이 낯선 연극의 배경을 일러주는 프롤로그라면, 제2막의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은 본격적으로 앞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다루는 사건의 장이다. 인간도, 자연도, 인공물도 아닌 미끄럽고, 높고, 날카롭고, 흐물거리거나 무겁고 둔탁한 여섯 존재가 그림자 속에서 의미 없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ChatGPT가 이들을 분석해 쓴 원작을 작가가 각색한 희곡 〈영매〉(2025)는, 이 앞선 움직임들을 하나의 허구적인 이야기로 재해석해 낸다. 1)
그렇기에 작가가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을 통과하며 던지는 질문은, 기술의 매끈한 표면 아래 숨은 동시대적 불안을 건드린다. 최근 LLM이 불러온 근본적인 문제는, 알고리즘이 단어를 배열하여 겉보기에 논리적인 문장을 생성해 내지만 정작 그 문장의 의미와 진실을 보증할 ‘발화 주체’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2) LLM은 그저 통계적 확률에 따라 단어를 배열할 뿐이므로, 적어도 인간에게 적용되는 ‘안다(knowing)’라는 의미에서 자신이 만든 문장의 사실 여부를 알지 못한다.3) 이해 없이도 ‘그럴듯한’ 문장을 뱉어내는 알고리즘은 껍데기만 남은 기계적 존재에 가깝다.
이처럼 언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에, 작가는 비언어적 감각의 깊이로 나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간 작가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왔던 장난감 앵무새는 흥미로운 단서가 된다. 이번 전시의 제1막, 솟은 등대 위 홀로그램 앵무새는 원숭이의 노래를 뜻도 모른 채 따라 할 뿐, 그저 들리는 소리를 모방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프롬프트 한 줄로 그럴듯한 글 한 편과 이미지가 즉각 생성되는 초효율의 시대에, 사진이나 영상도 아닌 448여 장의 A4 용지 위에 콘테로 장면을 그렸다. 부재한 발화 주체들이 가득한 기계적 세계, 즉 인공지능의 문장과 활동으로 포화된 동시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오직 인간의 신체만이 남길 수 있는 실존적인 흔적이다.
시각예술에는 끊임없이 거창한 언어와 논리로 자신을 증명하고 타인을 설득해야만 하는 관성이 있다. 그 피로함 앞에서, 작가는 기꺼이 예측 불가능한 샛길을 택한다. 전시의 제목인 《트로피컬 로맨스》는 세계관의 선언이 아니다. ‘트로피컬’과 ‘로맨스’는 익숙한 단어들이지만, 나란히 붙으며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 마주했던 트로피컬 주스의 예측 불가능한 맛이나, 맑았다가 언제 갑자기 흐려질지 모르는 정글의 변덕스러운 날씨같이 자유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개의 막을 지나온 여정은 단순히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순진한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고한 문법과 권위로 작동해 온 언어의 그물망을 완전히 비껴나, 시스템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인간 고유의 감각 층위로 깊숙이 침투하려는 치열한 몸짓이다.
신작 영상에서 ‘가론’이 오랜 침묵 끝에 처음으로 뱉은 말은 정체불명의 단어 “카츄”다. 작가는 어느 날 아침 아들이 뱉어낸 엉뚱한 음성이자, 자신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이 단어를 가론의 대사로 선택했다. 통계적 확률로 매끄럽게 계산된 인공지능의 껍데기 문장들 사이에서, 이 비논리적인 첫 마디는 시스템의 견고한 규칙을 단번에 무력화하는 기분 좋은 배반이다. 모든 소통이 데이터화되는 세상 속에서, 오직 인간의 몸과 기억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이 가공되지 않은 발화는 작가가 시대에 맞서 던지는 가장 뜨거운 로맨스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카츄-!
1 박승원 작가 노트
2 마크 코켈버그·데이비드 J. 건컬, 『기계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 신동숙 옮김, 손화철 감수 (생각이음, 2026), p.162
3 같은 책, p.50.
주최 및 주관 : 박승원
협력 큐레이터: 박승연
공간 디자인 및 조성: 홍민희
서문: 이수빈
사진 : 고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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