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봄
2016년 9월 30일 ~ 2016년 10월 21일
박정혜 개인전 : Dear. Drops
아카이브 봄은 사간동에서 6년, 와룡동에서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다음 1년은 부동산 등기부등본 속에만 존재하는 상태로 육신 없이 몇 군데의 전시장과 미술관을 떠돌았다.
첫 번째 봄은 한옥이었다. 한때 ‘진짜 한옥’이던 그곳은 일제시대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개량을 거듭해, 가령 입식에 알맞은 높이의 창문과 시멘트 벽, 투명 우레탄이 발린 작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한옥마을에 가면 이런 이상한 집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이걸 어디까지 한옥이라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집은 여러 사람이 모여 워크숍을 열거나 공연을 하기에 적합했다. 건축이라 할만한 것이 완전히 무화된,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쁘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이 풍경은 그 속에 모인 이들을 둘러치는 괄호einklammerung 같았다.
두 번째 봄은 창덕궁 앞에 있는 현대식 빌딩의 4층에 자리잡았다. 소방법이 바뀌며 한쪽을 잘라내어 약간 작아진 건물이라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비어있는 벽과 평평한 바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비로소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에 사무실 천장의 석면을 뜯어내고 바닥에는 에폭시를 칠했다. 그것은 특정성이 아니라 그 반대를 위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것이 될 수 없다면 낯선 것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아카이브 봄의 세 번째 버전쯤 된다. 세 번째 봄이 (전시를 위한) ’공간’이라는 물질의 차원에서 구상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단일한 면적이 작아지더라도 층으로 여러 조건을 구획한다.
2. 전시는 지상층에서 이루어진다.
3. 건축물이 태생적으로 지닌 휴먼스케일을 보존하되 동선이나 기능은 마음대로 부순다.
4. 전시에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요소를 단정하게 정리한다.
5. 그러나 내부를 인공의 큐브로 만들지는 않는다.
요컨대 사간동 봄을 떠나며 가짜 한옥이 지겨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가짜 폐허가 지루해졌고, 이제는 조금 다른 걸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더 이상 유예적인 방식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유예’의 마지막 효용이 생명을 다했다는) 예감이 스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다섯 번째 조항을 하나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굳이 미술관 바깥에서 그것을 열화된 품질로 흉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정들은 많은 부분 그때그때의 현실과 우연에 기대었다. 좋은 결과란 언제나 좋은 직관과 함께 찾아지는 법이라 믿으며.
마지막으로, 나는 아카이브 봄이라는 물질이 염두하는 문제들과 가장 먼저 맞부딪힐 회화 작가를 물색했다. 회화는 어디에나 있어 왔고, 가장 오래된 미술이며, 그 전통의 첫 번째 배신자였다. 그런 점에서 회화는 한 방울의 요오드 용액이다. 미술관도 임대공간도, 큐브도 폐허도 아닌 이곳에서 회화는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스킨이 혼재된 어딘가에서, 패턴과 솔리드 사이의 평면 어디쯤에서, 박정혜라면 그의 작업을 통해 앞선 모든 질문을 전시라는 형태로 간결히 압축해 줄 것이다.
◆ 윤율리
오프닝 : 2016년 9월 30일 오후 6시
출처 : 아카이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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