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6년 8월 19일 ~ 2026년 9월 18일
1 / 10
이 글이 쓰이기 위해 사용된 시간보다, 쓰기에 앞서 생각을 고르고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읽기와 생각하기, 대화하기를 멈추고 언제 쓰기의 시간으로 접어들어야 할까?’를 어느 때보다 고심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결심하기도 전에 갑자기 찾아왔다. 그리고 찾아오자마자, 다시 생각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런 경험은 이번 전시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지 않은가 한다.
박지무의 작업은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곤 한다. 그것은 대개 자신에게서 나왔지만 아직 스스로도 알아차리는 중인 어떤 문장이다. 사물을 보듯 바라봄의 대상이 된 문장은 형상을 낳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형상은 어느 순간 또 다른 문장을 낳는다. 공간 전반의 긴장감을 형성하며 놓인 책장과 나뭇가지 조각은 그렇게 〈이건 불 켜둔 채 나온 숲이야 / 아니야, 이건 눈 뜨고 죽은 TV야〉라는 제목을 갖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작업이 시작될 즈음 작가는 ‘슬픔은 슬픔 모양으로 접어’라는 문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형체가 없는 상념을 두고 시작된 망상은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옮겨 가서 나무가 쓰러졌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은 생각으로, 그 소리의 광경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보고 들었던 모습을 재현하기보다는 비현실적인 가상 공간으로 다가오도록 두고자 하여, 주워 온 나뭇가지는 원목 책장의 틈새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졌다.
책장이 등장할 즈음 박지무의 작업은 무엇과 다른 무엇을 배치하기에 앞서, 재료를 선택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짚어 보고 싶다. 그는 ‘책장’이라는 명사 자체를 미술 재료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여겼다. 목재를 재료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책장이 재료가 된다는 생각은 조금 낯설다. 분명히 그는 시인이 단어 하나를 고르듯 이 재료를 신중하게 골랐다. 그리고 그 색과 모양은 우리가 전형적인 ‘책장’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책장은 마침 누군가가 오래 사용했던 물건으로, 책이 머물렀던 자리가 마치 그림자 같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책장에 드리운 시간의 그림자, 그리고 나뭇가지와의 만남은 우연적 효과에서 비롯했다. 나뭇가지의 잘린 단면, 틈 사이에 의지하여 대롱대롱 달려 있는 모양새를 살피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구획이 뒤틀린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이상한 긴장감이 든다. 숲에 불을 켜둔다는 것과 TV가 눈 뜨고 있다는 것, 그러고는 숲에서 나와버렸다는 것과 TV는 죽었다는 것, 이 불가능한 상태 혹은 말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우리는 지나가 버린 시간의 엇나간 어느 지점을 붙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연상 작용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이미지 하나와 글 하나를 완전히 포개어 놓는 해석이 아니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조각의 언어에서 글의 언어로, 혹은 반대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다.
작가가 연출한 장면에서 당혹스러움과 의아함을 느꼈다면, 그 기원은 아마도 소리나 망상, 질문처럼 흔히 형태적이라고 여기지 않는 대상들을 ‘형태’로 보려 하는 태도와 닿아 있을 것이다. 이는 박지무의 사유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방향성이다. 전시명과 같은 제목의 작업 〈절반은 밤〉은 형태를 가진 질문으로 이곳에 자리한다. 들여다볼 일 없었던 속을 드러낸 채 반으로 갈라진 나무 상자는 무엇을 질문하는 걸까. 잘린 상자 속에는 또다시 휘어진 나무판이, 절반과는 제법 달라 보이는 지점을 가로지르며 놓였다. 얼기설기 어긋난 모양새는 얼핏 보아도 수학적 질문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시간의 움직임이 사물의 기척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따라, “불분명한 밤의 한 지점이 / 소리도 없이 둘로 갈라”진 상태다. 그는 시간과 사물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기에, 여기서 ‘불분명한 밤의 한 지점’이란 사물의 경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오의 반대 지점, 즉 짙은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경계가 가장 모호해지는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시간이 존재하기는 하겠으나 아마도 그 지점은 매일 어딘가로 조금씩 이동할 것이며, 그때를 ‘밤의 절반’이라 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측량할 수 없을,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부피와 질량으로 가늠해 보고 인식해 보는 일”1)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허공에 매달아 뒀던 것〉은 시간에 관한 탐구의 또 다른 변주로, 단절된 시점을 제기하기보다 반복되는 시간을 겹쳐 두는 유연한 감각을 보여 준다. 한 겹 혹은 여러 겹의 종이를 물에 담가 두었다가 꺼내는 방식으로 염색을 하니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모양이 잡히고, 젖었던 종이가 마르면서 생긴 주름이 조각이 되었다. 이렇듯 반복되는 장면, 혹은 움직이는 심상의 리듬을 조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가볍고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과감한 결정을 통해 현재 모습으로 안착한 것이다. 이 과감함이란 “너무 일러도, 반대로 너무 방치해도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2) 조각이 그 사이에서 멈추어야 할 시점을 찾는 일이다. 이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 또한 이와 비슷한데, 바라볼 대상(들)과 멈추어 볼 자리를 찾아 한동안 앉아서 보는 편이 좋다. 너무 짧아도, 길어도 아쉬운 경험이 될지 모른다. 공간 안의 조각들이 그러했듯이 내게 알맞은 자리를 찾아가는 일, 머무는 시간의 길이를 결정해 보는 일은 이번 전시에서 최적의 감상을 위해 중요한 두 가지다.
마침 앉아서 바라보기 좋은 곳에 흥미로운 문장들이, 일종의 ‘시각시’라 부를 수 있을 형태로 놓여 있다. 한 문장은 ‘돌아’를 기점으로 나뉘는 듯 보인다. “너무 길어 돌아 돌아”에서 “돌아 가시던 유령까지 불러 세워”로 가는 길에, 반복되는 ‘돌’은 또 다른 리듬을 더하여 긴 시간을 돌돌 말아 올리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돌아 가시던 유령까지 불러 세워,”와 “허공을 꿰뚫는 꽃도 멈춰 세워,” 이 두 문장은 서로를 대체할 수 있을, 거의 같은 문장일 테지만 이들이 연이어 재생됨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심상은 배가된다. 전시장 한편에는 이 문장들과 같은 제목을 가진 작업, 카페트를 재료로 사용해 그 위에 드로잉을 새긴 〈오후의 무덤〉이 놓여 있어 상상을 더욱 길게 연결하여 볼 여지가 생긴다. 산수화 혹은 파도처럼 주름진 무덤은 바닥에서 조용히 굽이치고, 시선의 끝에는 이 작업의 시작점이 된 사진, 그리고 날짜들이 흐릿해진 달력 드로잉이 있어 날의 공백을 세어 보게 한다.
우리가 이 시공간에 머무는 것은 아마도 어떤 ‘잘 들리지 않는 말의 형식’3)을 오랫동안 씹고 맛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의 충족과는 상관없이, 이제까지 원하지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까지 기꺼이 가 볼 수 있는 유연함을 요구한다. 박지무의 작업을 바라보는 데 시간을 들여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채로 있던 무언가를 건져 올릴 수 있게 하는 맑음이 있다. 이 맑음의 정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정제하고 정제한 ‘자신의 문장으로 사고하는 힘’에 다름 아니다. 여기저기서 타인의 괜찮은 문장을 빌려 와 사고를 직조하는 데 익숙했던 내게는 특히나, 빌려 오지 않은 문장으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상쾌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기 문장을 얻으려면 오랫동안 사물을, 세계를 가만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비로소 알아차리게 한다.
김명진 / 사루비아 큐레이터
1) 이 문단에서 “” 안의 표현은 박지무의 작가 노트(2025)에서 발췌한 것이다.
2) 2026년 3월, 작가와 주고받은 메일에서 발췌하였다.
3) 강보원, 『아주 조금 있는 문학』, 워크룸프레스, 2026, p. 8. 이 책에서 강보원은 “잘 들리지는 않는 말의 형식 중 하나로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쩌면 미술 또한 그러한 형식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참여작가: 박지무
큐레이팅: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진행 및 글: 김명진 (사루비아 큐레이터)
그래픽 디자인: 조형석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출처: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 아트바바에 등록된 모든 이미지와 글의 저작권은 각 작가와 필자에게 있습니다.
운영시간
월요일 휴관
화요일 휴관
수요일 12:00 - 19:00
목요일 12:00 - 19:00
금요일 12:00 - 19:00
토요일 12:00 - 19:00
일요일 12:00 - 19:00
휴관: 월요일, 화요일
모든 프로그램은 주최측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