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프로젝트 서울
2025년 4월 8일 ~ 2025년 4월 19일
흔적을 남기는 것
상상해보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유령보다는 더 토속적인 감상을 전하는 ‘귀신’은 가위에 눌리거나 어둔 골목길에서 그림자를 보면 떠올리듯 어쩌면 일상적이다. 그러나 귀신을 ‘본다’는 것은 체험에 더 가까운 일일뿐더러 원치 않게 체감하고, 경험되고, 들리게 돼 버리는 것에 가깝다. 사람 사이의 관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강박감, 탈력감이나 정의되지 못한 신경의 이상 역시 개인으로 침투할 뿐 드러나지 못한다. 박희민, 배주현은 몸소 체험한 귀신의 흔적인 보이지 않는 기억과 주변 관계의 껍질을 작업으로 남긴다.
박희민은 관계 속에서 강제되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다룬다. 발전과 성장이 곧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고착된 신화 속에서 사회는 가속한다. 환경으로부터 독자적일 수 없는 개인이 그 사이에 멈춰 있을 때 남는 것은 퇴보한다는 감각이다. 정체되고 발전이 없는, (인간을 진화사의 종착점이라 본다면) 유인원의 상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비교적 초기작으로, 그 중 콘테로 그려진 평면회화인 <귀신의 집> 연작(2023)은 자아에 대한 은유로서 작가의 자화상으로 그려졌다. 화면에서 인물은 여러 거울을 덧댄 것처럼 중심으로부터 유리되어 다양한 각도로 존재한다. 작가에게 있어 사회적 자아는 필요에 맞게 주무른 페르소나를 빌려 쓰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성찰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데, 귀신의 집은 어딘가 음산한 폐가를 가리킬 때에도 흔히 쓰는 말이다. ‘귀신의 집’은 그렇게 여러 페르소나가 거쳐 간 장소로서 진정한 ‘자신’일 수 없는 상황을 제시한다. <사람원숭이> 연작(2021)은 세라믹 판재를 뒤틀어 보다 직접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나타낸다. 얼굴은 귀신이나 유인원의 외모를 닮아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형성된 페르소나로서 가면 같기도 하다. 근작에서 작가는 끈적이는 검은 물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초기작과 비교적 다른 스타일을 보이면서도 ‘홀’로 있는 ‘나’, 그리고 인간을 구성하는 관계에 대한 시선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이 같은 문제의식, 즉 사회적 자아를 연극한다는 것은 다면적이고 가변적인 개별 개체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안전한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희민의 작업은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이 성립할 수 있는가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결국 가면만 잠시 머무르는, 비어 있는 ‘귀신의 집’이 되고야 마는 것은 아닐까?
배주현의 이미지는 신경증을 앓던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다. 그것은 통증으로도, 시신경의 부분적 차단으로도 발현되었는데, 작가는 여러 과목으로 진료받았으나 병명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경험을 칭하는 것으로서 ‘이름 없는 병’은 의료 시스템 안에서 규정되지 못한 체계의 틈을 배회한다. 작가는 현실의 맥락을 직접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또한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병의 감각을 직접 떠올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떠올릴 수 없는, 재현할 수 없던 것이다. 차단된 감각을 재-감각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즉 귀신을 보려는 것과 같다. 잡을 수 없는 것 대신에 작가는 ‘차단시키는’ 제재를 찾는다. 예컨대 신작 <산수유 열매>(2025)를 비롯하여 이번 전시에서 나타나는 붉은 원의 형태들은 산수유 열매를 그린 것이다. 작가에게 “숨이 멎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이 ‘열매’는 대지에서 목도한 강렬한 충격을 담고 있다. 스스로 부도체라고 표현한 이 생명의 상징, 혹은 생명 그 자체는 작가의 감각 신호를 차단하며 페인팅을 불가능하게 했던 신경증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비교적 뚜렷한 원의 형상 뒤로 비정형으로 갈라진 질척하고 거친 흙의 물성이 보인다. 그 땅은 생명이 나는 대지이자 차단된 감각으로 작가가 서 있는 여기, 현실이다. 이처럼 실존(병명)으로 남지 못한 병의 흔적은 질감 내지 화면의 근거가 된다. 작가는 또한 의도적으로 확실한 완성의 상태를 피하면서 비정형, 미완성이라는 작업적 미완결성에 천착한다. 어쩌면 거친 필치, 그에 대조되는 여백은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증상’ 그 자체의 재현이다. 그 때의 증상은 신체적이고 즉물적인 것이지만, 실재하는 것으로 정의되지 못했던 그의 증상을 담은 화면은 귀신을 떠낸 껍질과 같다.
전시의 제목인 《귀신 껍질》은 부재하는 형상, 즉 귀신과 같은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두 작가의 작업 방식으로부터 고안되었다. 그들이 다루는 일종의 개인적 성찰은 더 나아가 사회의 일면을 부각한다. 가속하며 성장을 종용하는 관계 사이 가면으로서 연극적 자아, 그리고 신경의 차단이라는 (무)감각과 체계로부터 누락된 병. 가려 있던 환상 같은 것은 너무 강하게 남아 흔적으로 아로새겨진다. 일종의 트라우마, 상흔으로서 귀신은 덧그려지고, 이윽고 껍질로 남는다.
글: 손하늘
참여작가: 박희민, 배주현
출처: 레이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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