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공간
2024년 1월 10일 ~ 2024년 1월 28일
가슴을 파고드는 공 (In high ball)
변상환
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존은 대략 타자의 가슴을 상한선, 무릎을 하한선으로 하는 홈플레이트 상공의 입체 도형을 말한다. 이 존의 포수를 향해, 전방 18.44m 지점, 약38cm 높이의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공을 던짐으로 경기는 시작된다. 동시에 홈의 타자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배트를 휘둘러 날아오는 공을 쳐 내야 한다. 격렬한 몸싸움을 기본으로 하는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야구는 포지션 개개의 영역이 비교적 뚜렷이 존재한다. 홈의 포수가 그러하고, 타자의 경우 타순으로 타석에 올라 공을 쳐 낼 기회가 주어진다. 내∙외야의 수비수들도 본인의 영역에서 옆의 동료와 교집합을 이루며 날아오는 공을 잡아낸다. 특별히 투수가 오르는 내야 중심의 마운드는 그 영역이 더 뚜렷하다. 선발 투수의 경우 양질의 공을 홀로 100여 회 이상 던져야 하는 체력적 부담과 경기가 자신의 구위에 달려있다는 압박감으로부터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마운드를 인생에 비유한다면, 쉽사리 수긍이 가는 이유다.
경기의 흐름을 본인이 주도하기 위해 투수는 몇 가지 구종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일 패턴의 투구는 타자에게 읽히기 쉽고 이는 곧 실점으로 이어지기에, 최고의 투수라면 자신의 메인 구과 함께 그에 버금가는 양질의 다양한 구종을 섞어 타자의 타구 타이밍을 교란해야 한다. ‘몸쪽공’은 타자의 입장에서 스트라이크 존 상부 겨드랑이와 가슴 쪽으로 날아오는 까다로운 구를 칭하는데, 동체시력이 공을 쫓아간다 해도 스윙할 공간이 여의치 않으며 몸이 움츠러드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베터리(투수, 포수)와 타자 간 수 싸움에서, 마운드의 투수는 결정적인 순간 후- 한번 심호흡하고, 디디고 선 하체와 온몸의 탄력을 공에 담아 자신의 가장 매서운 구를 힘껏 던진다. 타자를 맞출 듯 가슴 깊숙이 파고들다 궤도의 끝에서 존으로 뚝 떨어지는 변화구.
“스트라이크, 나이스 피칭!”
오감도(烏監圖)
첫 개인전을 작가의 데뷔라 한다면 내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시리즈는 옥상방수 페인트와 플로랄 폼으로 만든 ‘초록 조각’이었다. 초기 초록 조각은 ‘노아의 방주’ 서사를 차용해 진행했었는데, 2016년 2월을 시작으로 두 번의 개인전과, 그해 12월 기획전을 통해 총 3부작으로 선보였다. 그 후 작업을 이끌던 내부의 동기(서사)가 일단락되고 부피를 담당하던 플로랄폼의 당위가 사라지면서 새로이 고안한 형식이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오감도(烏監圖)’이다.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초록 방수액이었다. 그렇다면 최초 작업의 영감이 되었던 한국의 특수한 풍경- 학습이라도 한 듯 주택 옥상을 모두 초록으로 칠한 기이한 풍경에서 작업의 구조를 재정립해보기로 한다. ‘까마귀가 굽어본 어느 구도심’ 아마도 주택의 초록은 국내 페인트 점유율 상위 4사 KCC, 삼화, 노루, 제비스코 중 하나를 바른 것이리라. 그리고 색약 테스트에 쓰이는 색신부의 형식을 차용하기로 한다. 작은 원들이 무수히 모인 그림 안에 숨겨둔 숫자가 보이는지 아닌지를 묻는 쓰임을 근거로, 새로이 고안한 내 초록 색신부는 관객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옥상의 초록이 보이시나요?’
초록 땡땡이 풍경화 속에도 보일 듯 말 듯한 형상들이 있다. 이는 내 기억에 아로새겨진 ‘경로’이다. 올 봄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산해야만 했던 설악산의 릿지 등반 루트와 2019년 여름 타이베이에 체류하며 하루가 멀다고 지하철 환승과 도보로 찾았던 베이터우 노천 온천. 태국 끄라비 원정에서 바다를 등지며 올랐던 아름다운 자유등반 길 <The marlin>과 무더운 여름, 전시 답사차 방문한 옹진군 소야도에서 원시림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반짝이던 에메랄드빛 죽노골 해변에 이르기까지. 타석에서 가장 까다로운 공을 눈보다 빠른 손으로 쫓는 타자의 스윙처럼- 뇌리에 각인된 기억들이다. 허나 색약 테스트 색신부에 숨겨놓은 개개 숫자들이 무슨 의미가 있던가? 초록 땡땡이 회화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균열도 마찬가지다. 이 균열이 관객들에게 초록을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함이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처럼, 차갑고 동시에 뜨겁다.
기획: 변상환, 안성은
그래픽: 변상환
운영: 김하림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예비전속작가제지원)
출처: 새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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