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예술공간
2020년 5월 8일 ~ 2020년 6월 4일
서평주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시각을 견지해 왔다. 비판과 부정은 작가가 일관되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었고 세계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마음의 동요였다. 초기 작업에서는 언론이 유포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실은 국가의 폭력, 지배계급의 위선, 자본의 불평등 등을 정당화하는 수단임을 알았기에 그것들에 딴죽을 걸었다. 그것은 신문 기사가 제공하는 사진과 기사의 방향을 기발하게 재가공함으로써 다른 현실이 드러나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일면적이고 직접적인 풍자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이에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현실의 여러 정치적 사안에 다가선다. 보도연맹, 민주화운동, 광주항쟁, 제주 해군지기, 밀양 송전탑, 촛불집회 등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이 표면화될 때 그의 유쾌함은 진지함과 연민, 슬픔의 정서도 끌어안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회화를 포함한 비디오, 오브제, 설치 등의 표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비판적 시각을 지속시키면서도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우리 세계를 전체적인 상으로 만든다. 여기에는 있었던, 있는, 있어야 할 여러 현실이 자리하는데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은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거쳐 충돌하고 대립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역사와 현실은 교호한다. 과거는 현실을 사유하는 거울이자 참조점이며 현재는 모순으로 꽉 차 있지만 또한 미래를 소망하는 자리가 된다.
작가는 근 과거의 두 인물인 영국 전 총리 대처, 미국 전 대통령 레이건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실상을 드러내 보인다. 1970년대 세계적 불황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을 해소해나가는 방법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앞장섰던 이들은 그 시대를 증언하는 인물이며 신자유주의의 화신(化身)으로서 작업의 소재가 된다. 이 둘이 맺고 있는 정신적 유대를 모티브로 한 설치물이 <검은 구멍으로 쌓은 탑>이다.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그레나다(Grenada) 침공 시 영국에 사전 통보하지 않은 것에 대해 대처 총리에게 “당신을 당황하게 하여 미안하다(I’m sorry for any embarras sment we caused you)”라는 등의 메시지를 보낸 기록이 2014년 공개됐다. 그들의 친연성은 자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탑이 실은 제국주의의 유산이자 식민지를 수탈함으로써 이룩된 것임을 암시한다.
신자유주의가 질주하던 시기 소비에트 연방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급작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이 두 시기가 대립하는 작업이 <열병의 시간들>이다. 먼저 1980년 10월 10일 보수당 전당 대회에서의 대처의 연설과 1982년 6월 8일 영국 의원을 향한 레이건의 연설은 그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자유 민주주의적 세계관으로 시대적 현실의 반영이면서도 현재와의 지속성을 담보한다. 대처의 연설은 재산 소유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자유경쟁, 민영화를 당연시하기 위한 보수적 정책들이 어떻게 옹호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레이건은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며 자유 민주주의의 세계 지배를 노래한다. 이 둘은 한 몸이 되어 한 목소리로 세계를 호령하려 한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연방 해체 발표에서 보이는 모종의 불안함, 연방의 깃발이 내려지는 장면과 연방 국가의 국기들이 올라가는 순간들은 환희와 비애를 교차시킨다.
거세게 부딪히던 두 세계는 이제 하나가 되었다. 자본주의자들은 자신의 대립물이 사라졌기에 최종 승리를 확신하며 “역사의 종말”을 주장했다. 그 종말을 선언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이 하나의 세계는 더 극명하게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는 중이다. 여전히 세계는 조화롭지 않으며 불균등한 것으로 꽉 차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포착한 현실 세계가 이상하더라도 놀랄 일이 못된다. <괴상한 춤>에서 허공의 매달린 천에는 “요술에 걸려 왜곡되고 전도된 세계이며, 그 속에서 자본 나리와 토지 마님이 사회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단순한 사물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진술이 적혀 있다. 그의 시대로부터 멀리 달려온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우리는 사물들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들의 관계를 맺고 있고 아직 인간적인 주체가 되지 못했다.
전도된 세계는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작가가 제시한 <뒤집힌 세계>, <믿음의 자리>, <환상을 동작하기>도 그런 것의 단면이다. 코로나 19 이후 드러난 서구권 국가들의 체제 취약성은 <뒤집힌 세계>를 통해 풍자된다. 자본주의의 발흥지로서의 서유럽, 그 발전의 최전선에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 등 그들 스스로가 부여한 선진국이라는 왕관은 서양 건축의 주두(capital)가 뒤집어진 채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으로 그 허상을 드러낸다. 또한 그들로부터 우리에게 전이된 투표는 대의 민주주의의 꽃이라 칭해지지만 <환상을 동작하기>에서 드러나듯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도 탐탁치가 않다.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손짓들, 그곳에서 잡은 권력도 단지 체제가 요구하는 한도 내에서 지도자만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우상이 등장할 때에 벽면에 걸릴 초상(<믿음의 자리>)이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작가의 속마음은 <사건에서 신화까지>를 통해 드러난다. 두 설치물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민중들의 주기적인 시위와 저항을 프레임 안에 가둔 형상이다. 또한 여러 시위에 사용된 화염병은 민중의 무기이지만 무수했던 실패를 떠안은 상징이기기도 하며, 시위가 진행되었던 소리의 진원지가 무엇을 향했는지를 따질 필요는 있다. 그렇지만 연기는 박스를 채우고 서서히 분출하며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돌이 괴어진 유리관 안 소리들은 혼합되어 바깥을 향한다. 작가는 그 모든 역사를 응축시키고 잠재된 힘으로 삼는다. 아직은 열망의 상태에 있는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운동 법칙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한 채 이 체제를 신비롭게 바라보며 또한 이 체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진리와는 무관하게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그 겉모습을 보고 있고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 겉모습과 매일 부딪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 세계가 요구하는 질서가 비진실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 세계로의 이행을 꿈꾼다. 물론 다음 세계에 대한 명확한 상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 현실 안에 배태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작가가 부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세계, 그 대상이 마냥 사랑스럽고 아름다울 수 없기에 그는 그것들이 스스로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이도록 함께 걷는 일을 자처한다.
글: 신양희 아마도예술공간 큐레이터
디자인: 박미옥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공간지원
출처: 아마도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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