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밈
2026년 6월 10일 ~ 2026년 7월 3일
손 끝의 포에마
-고현정, 이도경 작가에게
비밀이 담겨있을 듯한 편지 형식을 빌려 기획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세상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두 작가의 작업 방식이 편지라는 본질과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받는 사람에 가닿기 위한 말을 고르고 오래 망설이는 편지의 과정처럼, 두 작가는 무엇을 드러낼까보다 대상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먼저 질문합니다. 이 전시는 완성된 결론을 통보하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과 밀어를 나누어 가는 과정의 자리에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이기에 편지 형식을 빌려왔습니다. 두 작가의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손 끝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무수한 반복을 이어가는 손 끝을 통해 만들어진 궤적은 두 작가가 세상을 어떻게 마주해왔는지 보여줍니다. 그 시선의 방식이 그들의 형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영상 속의 손 때 묻은 천이 그저 특정 매체의 물성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미처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에 닿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 끝에 비로소 언어가 골라지는 시의 과정과 비슷한 여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손 끝의 움직임을 우리는 '포에마(Poiema)'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포이에오(Poieo, 만들다)'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오늘날 '시(Poem)'의 어원입니다. 사전적으로 포에마는 '만들어진 것', '장인의 창조물'을 뜻하지만, 이 전시에서 포에마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닙니다. 세계를 향한 태도가 시선이 되고, 그 시선이 손 끝을 거쳐 재료에 닿기까지의 행위 전체이자, 그 행위가 시간과 함께 겹겹이 쌓여가는 과정입니다. 작품 앞에 선다는 것은 두 작가가 세계와 마주해 온 시간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흔적들이 쌓일수록 포에마는 깊어집니다. 두 작가의 작업이 각기 다른 방향의 시선임에도 그 과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현정 작가의 시선은 작가의 내면에서 외부의 존재로 향합니다. 강아지, 고양이, 나비 등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뭇생명의 존재들을 향해 내면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흘러갑니다. 일상 속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밀려와도 그 시선을 거두지 않습니다. 캔버스 위에 두텁게 쌓인 마띠에르는 그 시선의 축적입니다. 붓터치의 집적은 시선의 반복이고, 시선이 쌓인 만큼 물감의 두께가 된 것입니다. 그 과정이 거듭될수록 작가와 대상 사이의 경계는 흐려집니다. 작가에게 특정 형태의 이미지를 표현해 나간다는 것은, 바라보는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가는 지점과 만나게 되는 까닭입니다. 나와 저 존재가 같은 조건 안에 있다는 것,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어쩔 수 없다는 감각, 그 취약함 앞에서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일종의 연대의 감정이 작은 위안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도경 작가의 시선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대상의 표면에서 출발해 그 안으로 파고듭니다. 손 때가 밴 낡고 오래된 천, 누군가의 시간이 묻어 있는 사물들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 해체하고 다시 붙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스톱모션 영상도 한 겹씩 시간을 열어가는 작가의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동물탈을 쓰고 등장하는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 탈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동물의 탈을 씌우는 순간 그 이야기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되고, 관람객은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도경 작가의 시선 속에서는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버려진 것 안에서도 새로운 의미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지름길이 아닌 돌아가는 길로 시선을 택하지만, 그 길이 결국 가장 깊은 곳까지 닿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뻗어나오는 시선과 밖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시선은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자리에서 만납니다. 손 끝의 흔적 앞에서 두 작가의 포에마는 완성이라는 목적지가 아닌 지금도 움직이는 손 끝의 흔적 안에 존재합니다. 좋은 날이 올지 묻지 않고, 오늘도 무언가를 다루고 그 흔적을 남기는 두 작가의 손 끝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손 끝이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참여작가: 고현정, 이도경
출처: 갤러리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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