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플래닛
2026년 8월 19일 ~ 2026년 9월 18일
스스로 그러한 Self-So
자연(自然)은 산천초목이라는 사물이기 이전에, 본래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었다. '도법자연(道法自然)'에서도 그것은 무엇을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끼어들지 않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결을 가리켰다. 그 결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의도에 앞서 도착한 형태다. 손을 거두는 자리에서 만물은 제 길을 따라 이루어진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언어가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 개미 한 마리는 군체의 설계도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군체는 스스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부분은 제 옆의 것에만 반응하며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주고받을 뿐이지만, 그 주고받음이 쌓이면 어느 부분도 지니고 있지 않던 질서가 전체에서 돋아난다.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이런 일이 서로 다른 분야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구조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창발(emergence)이라 불렀다.
이 전시는 두 언어를 굳이 하나로 포개지 않는다. 둘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한 사건의 서로 다른 국면을 비춘다. 자연이 손을 거두는 인간을 말한다면, 창발은 그 거둔 자리에서 스스로 정렬하는 사물을 말한다. 이 전시의 세 작가는 그 두 국면 위에 함께 서 있다. 그들은 형태를 부과하지 않고 조건을 세운 뒤 물러선다. 그리고 그 물러난 자리에서, 형태는 스스로 돋아나기 시작한다.
백경호는 표면 위에서 쌓임과 긁힘에 응답한다. 그는 한 형식이 제 손에 익어 더 이상 낯설지 않아지면 거기서 물러선다. 형식에서 물러서는 이 태도는 화면 안에서도 되풀이된다. 그는 작업 중에 캔버스의 방향을 수시로 바꾸고, 위아래가 정해지지 않는 동안 긴장과 리듬은 작가가 고르지 않은 자리에 맺힌다. 유화 물감은 두텁게 엉기고, 나이프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아래 층이 다시 올라온다. 같은 흔적은 두 번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가는 이 거동을 제 뜻대로 몰고 가는 대신, 화면이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음이 또렷해지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 순간이 오면 오랜 망설임을 접고 빠르고 과감하게 개입한다. 형태가 먼저 도착하고, 결정은 그 뒤에 온다. 표면에 도착하는 무늬는 작가가 그린 것도, 우연이 던진 것도 아닌, 물감이 먼저 내민 것을 작가가 받아 낸 자리에서 출현한 것이다.
서지우는 도시가 흘려보낸 재료를 모아 조립한다. 그러나 재료의 출처나 이력이 형태의 의미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낱낱의 단위는 그 자체로 고정된 뜻을 갖지 않으며, 의미는 단위들이 놓이는 관계와 자리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같은 조각이라도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다른 문장이 된다. 작가는 뜻을 확정하는 대신 그것을 배열에 넘기고 물러선다. 그래서 형태는 완결되지 않고 잠정으로 남는다. 조립된 구조는 언제든 해체되어 다르게 놓일 수 있고, 눈앞의 형태는 가능한 여러 배열 가운데 지금 성립해 있는 하나일 뿐이다.
고근호는 규칙 하나를 세우고, 그것이 재료 위에서 풀려 나가도록 둔다. 캔버스 뒤에 바른 크랙 매체가 마르며 수축하면, 앞면은 스스로 갈라진다. 작가가 손을 댄 면과 형태가 발생한 면은 끝내 다르다. 균열의 지도를 그린 것은 재료이고, 작가는 그 자리를 유화로 따라 메운다. 같은 규칙이 되풀이될 때마다 재료는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연쇄로 번져 나간다. 그렇게 남은 풍경 위로 이따금 신화의 형상이 떠오르지만, 그것 역시 불러낸 것이 아니라 도착한 것이다.
세 사람의 작업은 서로 닮지 않았다. 무게와 표면과 반복은 각자의 물리를 따른다. 그러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양식이 아니라 태도다. 먼저 도착하는 것들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들기를 멈추는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무언가를 신뢰하는 태도.
이 전시는 그 도착의 순간들을 나란히 둔다. 작가가 만든 것도, 우연이 홀로 빚은 것도 아닌 — 스스로 그러한 형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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