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익갤러리
2016년 10월 19일 ~ 2016년 11월 8일
안두진, 닮은 것과 닮은 꼴 Twins of nature and figures, 140x300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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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
정현 (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회화의 보편성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문제인 만큼, 끊임없이 의미의 문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회화 앞에서, <아무 것도 이해 못한>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의미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림이 그들에게 의미를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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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시각의 경계에서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림에서 의미를 찾는다. 화면 안에 있는 작은 얼룩까지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게 미술에 대한 세속적 믿음이다. 만약 이 얼룩이 아무 의미도 없고 게다가 우연의 결과라고 고백하는 순간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이미 선입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들이 이미지를 보는 시선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아니 순수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림을 보는 것일까?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혹은 예술을 통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이미지란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미지 특유의 성질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려주어야 할 점은 볼 수 있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이미지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추상 미술을 이미지라 부를 수도 있고 반대로 이미지가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이미지가 아니기에 더 흥미를 끌 수 있는 경우도 미술의 역사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 같다.
이러한 이미지의 속성, 그림의 운명은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즉 시각과 언어 사이의 필연적 관계로 이어져있다. 한국 현대회화는 줄곧 구상과 추상의 구분을 고수하다가 한순간에 이러한 경계 자체가 허물어진 이미지의 세계로 진입해버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이제 회화에 대한 이론적 탐색이나 매체로서의 회화와 그리는 방식에 관한 질문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안두진은 이러한 경향 속에서 유독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인공적인 색채와 자연현상과 풍경을 연상시키는 모티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저 이미지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잘 아는 이미지들을 닮았지만 그것이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구체적인 서사나 도드라지는 표현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풍경을 닮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풍경의 요소들로 채워진 세계이다. 단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풍경의 질서로 이뤄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그림의 틀 안으로 입장하기 전 스스로 이 네모난 세계에 관한 나름의 계획과 전개 방식을 구축했다. 작가는 이 개념을 이마쿼크라 칭했다. 사실 개념의 명칭이 중요한 지는 않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수도 있으니까. 안두진의 회화에 대하여 우리가 간과했던 것은 그의 그리기 방식과 태도를 표상하는 이 개념이 무엇을 위한 실험이었는지를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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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회화의 모험 혹은 방황은 이미지와 의미의 밀착된 관계에서 멀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화면에서 형상이 서서히 해체되면서부터 예견된 사건이었고 곧이어 화면 위에는 두께를 가진 색채와 붓질의 흔적만이 남겨졌다. 우리는 화면 앞에서 과연 무엇을 보아야 할지에 관하여 그리고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롤랑 바르트는 우리보다 앞서 같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는 얼룩, 낙서 그리고 아무렇게나 끄적거린 듯 보이는 붓질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준 사이 톰블리의 회화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이어서 “그리고 이 지시대상들의 그 어떤 유사한 형상도 ‘재현하고 있지’ 않다.” 2)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를 보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식별하고자 노력한다. 모더니즘 미술이 고전주의적 식별 가능성에서 벗어나려했던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사진과 같이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는 기계와 구별되는 미술만의 고유성을 찾아내려는 의지였을 것이다. 한편 모더니즘 미술은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스트의 실험은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메시지나 의미화의 강박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는 관습의 굴레를 끊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회화의 목적은 무엇을 그리는가도, 무엇을 보여주는가도 그리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도 아니다. W. J. T. 미첼은 정확하게 위의 문제에 대하여 넬슨 굿맨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림은 세계를 비출 뿐 아니라 나아가 “세계를 만드는 방식”” 3)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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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그림이 되는
나는 조현화랑에서 열린 안두진 개인전의 서문에서 자크 랑시에르를 참조하여 이미지에 관한 글을 썼다. 이미지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고 다소 난해한 글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당시 해결하지 못한 질문의 핵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고자 한다. 우선 안두진의 그림을 정밀하게 묘사해보자. “닮은 것과 닮은 꼴”(2016)은 기하학적 형태들의 고향처럼 보인다. 오른쪽 뒤편에 가장 큰 녹색 삼각형이 서있고 그 주변에 좌우로 작은 녹색 삼각형이 위치한다. 바닥은 중간중간 골이 패인 평평한 대지처럼 보이고 그 위를 주홍색 바위(덩어리)가 줄지어 이동 중이다. 바위의 그림자가 삼각형인 게 흥미롭다. 그러고보니 녹색 삼각형도 자주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잇다. 멀리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반원의 색띠가 있고 드라마틱한 하늘에는 자주빛 빛(얼룩)이 찬란(혼란)하게 펼쳐져있다. 그 사이에 구불구불 물줄기가 쏟아진다. 사람들은 대개 이미지를 앞에 두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이용해 판독하려는 강박이 있다. 분명 내가 보는 방식처럼 사람들도 안두진의 그림을 읽어내려 할 것이다. 마치 이미지의 기호를 식별하는 게 그림을 감상하는 최선의 목표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독해가 결국 실패할 것이란 점이다. 안두진은 도상학적 독해, 형식을 기준으로 한 모더니즘식의 해석, 알레고리에 의한 극적 의미에서 해방을 꿈꾼다. 물론 완전히 형상을 지워버린 모더니스트의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적 의미의 형상을 차용하여 시각문화정치학적 해석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하나의 원리를 만든다. 내가 이해한 대로 설명해보겠다. 1. 대상(원본)을 재현하기 위한 그리기가 아니다. 2. 다시 말해 대상을 그리기 위해 상대적으로 바뀌는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지와 그리기를 분리한다. 3. 이미지와 그리기를 분리함으로써 그림의 자율성을 시도한다. 4. 그가 만든 그리기의 원리를 이용해 두 방향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는 수직, 다른 하나는 수평으로.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보면 자연스레 대칭의 합이 나오고 각 패턴들이 배치되면서 이른바 풍경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러한 효과는 작가가 구상한 세계의 요소들로 관람자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기제이자 반대로 시각과 언어 사이의 경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제가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펼친 이 그림의 세계가 또 다른 자연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과 닮은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닮은꼴일 뿐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과 풍경과는 무관한 그 어떤 세계이다. 사실 풍경은 순전히 이미지에 의하여 탄생한 개념이다. 즉 인간이 의도적으로 발명한 자연에 관한 상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풍경의 조건은 무조건적으로 자연을 닮은 이미지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안두진의 그림은 풍경이 아닌 그림만의 자연으로 부를 수 있다. 형광빛과 화학적 물질로 만들어진 세계다. 바로 스스로 그림이 되는 상태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미술사적 궤적이나 방법론보다 오히려 양자물리학에 가깝다. 자연이 발생하는 이유, 자연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과정,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순환, 대립과 충돌에 의한 힘의 균형과 파괴 등이야말로 그가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이다. 더불어 화가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말과 형태,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새로운 절차에 따라 서로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 4) 이처럼 그림(예술)의 도전은 기존의 분류학과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체제를 찾아가는 여정과 다름없다. 한편 안두진의 이 같은 태도가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에 이른바 문화적 맥락에 따른 해석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는 가시적인 세계의 표피에 관심보다 생명의 순환, 힘의 원리 등 비가시적 세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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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롤랑 바르트, 이미지와 글쓰기, 김인식 편역, 세계사, 2011, 35쪽
2) 위의 책, 35쪽
3) W. J. T. 미첼, 그림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린비, 2010. 6쪽
4)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현실문화, 2014, 30쪽

안두진, 먼 곳과 가까운 곳 Far & Close, 116.8x91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6

안두진, 오렌지 스톤 Orange stone, 140x130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6

안두진, 점과 점들 Point and Spot, 45.5x33.5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6

안두진, 거기 There, 70x70cm, Oil and acrylic on canva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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